115화. 24 – 2
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다 내게 좋은 일을 선택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어서 어머니의 얼굴에 죄책감이 떠오른 것을 보고 말을 잃었다.
어머니도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셨던 거다. 하지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어머니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나는 재빨리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도 제가 어닝과 잘 살 줄 알았어요.”
어닝과 괜찮은 부부가 될 줄 알았다. 열렬하게 사랑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잘 살 줄 알았다.
어머니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 손을 한 번 꽉 잡았다가 놓은 뒤 라이언 경에게 다가갔다.
“고마워요. 난 저기 친구들에게 인사 좀 해야겠어요.”
어머니는 라이언 경에게 음료를 받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내게 이야기해 보라는 표정을 짓고 친구들에게 가 버렸다.
으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라이언 경이 건네는 잔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왜 나한테 구혼 안 하냐고? 네가 구혼을 해야 내가 거절한다고?
이걸 어떻게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고민하는 내게 라이언 경이 말했다.
“백작 부인은 괜찮으실 겁니다.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요. 감히 여기서 강도질을 하는 멍청이는 없겠죠.”
내 표정이 어머니를 걱정하는 거로 착각한 모양이다. 나는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 맞춰 물었다.
“다른 피해자가 있다면서요?”
“듣기로는 그렇다더군요.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요.”
나와 올리버의 예상대로 신문에 실린 부인과 달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 당당한 이유로 밤늦게 다닌 게 아닌 모양이다.
나는 가볍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전 솔직히 남작 부인의 정부를 의심했어요.”
“커널 남작 부인 말입니까?”
올리버의 말에 의하면 그녀도 귀족 부인을 노린 강도의 피해자 중 하나라고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언 경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아닐 겁니다. 그날, 커널 남작 부인을 만나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안 만났다고 했어요?”
“네. 아마 확실할 겁니다. 그 시간에 어디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조사를 받고 있을 테니까요.”
어, 그러네.
커널 남작 부인이 집 밖에서 습격을 받았으니 나뿐만 아니라 다들 제일 먼저 정부를 의심했을 거다. 하지만 그가 조사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요.”
내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자 라이언 경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전 다른 정부를 의심했습니다.”
“다른 정부요?”
커널 남작 부인에게 정부가 또 있었나?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라이언 경이 다시 말했다.
“듣기로는 남작 부인이 다른 정부를 구하고 있었다더군요. 그게….”
말을 하다 멈춘 라이언 경이 망설이기 시작했다. 정부를 둘이나 두다니, 대단하네. 나는 가볍게 생각했다.
커널 남작의 정부가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이니 그만큼 만들려고 한 걸까. 돈도 돈이지만 그만큼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게 대단하군.
난 솔직히 구혼자 셋도 버겁다. 라이언 경과 핸더슨 경의 교제는 거의 거절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셋 중에서 고민했다면 머리가 터졌을 거다.
“그중 하나가 번즈 백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어진 라이언 경의 조심스러운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엇이? 금세 머릿속에 그에게 커널 남작 부인이 일 년간 교제를 하자고 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입니다.”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라이언 경이 당황해서 말했다. 이런. 내가 안 믿고 비웃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웃음을 멈추려 했지만 그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미, 미안해요.”
엘리엇이 커널 남작 부인의 정부라니. 어울리는 건지 안 어울리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누, 누가 그래요?”
미안하게도 라이언 경은 좀 기분이 상해 보였다. 내가 그를 비웃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게 아닌데. 나는 최선을 다해 표정을 다듬었다. 그러자 라이언 경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커널 남작의 생각입니다. 남작 부인이 정부를 구하러 다닌다며 남작에게도 자랑했나 보더라고요. 남작이 이를 무척 언짢아했지요.”
그렇군. 그렇다면 커널 남작은 남작 부인이 정부를 더 구할 거라는 걸 알았다는 말이다. 그중 하나가 엘리엇이라는 것도 알았다는 말이고.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재빨리 라이언 경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사실, 번즈 백작에게 이미 그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들었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리엇이 커널 남작 부인의 교제를 거절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주었다.
그러자 라이언 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제가 라이벌을 음해한다고 생각하셨겠군요.”
“오, 아니에요.”
아, 약간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음해까지는 아니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경께서는 저를 걱정하신 거니까요. 이해해요.”
꼭 엘리엇의 뒷담화를 하는 게 아니라, 내 구혼자니까 나를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엘리엇이 커널 남작 부인과 그런 관계라면 교제를 끊는 게 내 명예와 가문의 명예를 위해 좋은 판단이니까.
물론 거기에 엘리엇을 견제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라이언 경은 올리버의 친구잖아. 내가 그의 구혼을 거절할 생각이라고 해도 오라버니의 친구에게 못되게 구는 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언 경은 그렇게 말하며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듣기로는 왕비 전하께서 레이디 비스컨의 배에 방문하신다고 하던데요.”
그 소문이 벌써 났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라이언 경이 말했다.
“원래는 왕자 저하와 함께 방문하려 하셨지만 거절하셨다던데, 사실입니까?”
허허. 그런 소문도 퍼졌군. 아, 놀랍지 않다. 패터슨 부인은 소문이 나길 원해서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한 걸 테니까.
“그게 정말인가?”
지나가던 노신사가 끼어들었다. 다들 이럴 거다. 그는 반사적으로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주변을 돌아보며 민망해했다.
“리로이 자작님.”
나는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그다지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 이 파티에 얼굴을 비춘 이유는 이게 그의 파티이기 때문이지.
정확하게는 리로이 자작 부인이 연 파티다.
“미안하군. 이 나이가 되면 그런 소문이 느려서 말이야.”
리로이 자작님의 사과에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냥 소문도 아니고 왕비님이 언급됐으니 놀랄 만도 하다. 그리고 그게 이 소문이 퍼진 이유겠지.
귀족들이 상대방의 파티에 초대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하지만 그게 왕비가 된다면 다들 흥미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리로이 자작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재빨리 말했다.
“오, 아니에요.”
“아니야?”
“네. 그건 패터슨 자작 부인의 생각이었어요.”
그녀는 내가 왕비님의 부탁을 거절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거였다.
내 설명에 리로이 자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라이언 경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노신사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가 패터슨 자작 부인을 두둔해 주고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왕비님께서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수영장이라 여자들만 입장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셨거든요.”
“그렇군.”
노신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라이언 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왕비님께서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군.”
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왕비님은 나를 이해해 주셨다. 그리고 왕자를 두고 혼자 오겠다고 하셨고.
왕비님이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덕분에 내가 좀 더 길고 피곤할 뻔했던 달갑지 않은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보여 다행이야.”
리로이 자작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하하.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하려 했다. 하지만 상투적인 인사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네는 렌시드 가의 멍청이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지.”
생각도 못 한 자작의 말에 나는 당황해서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는 그런 나를 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번즈 백작과 함께 오게. 그 사람도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 들었어.”
엘리엇은 재미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좀 독특한 사람일 것 같은데. 하지만 리로이 자작님의 기준으로는 그 두 개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리로이 자작님과 헤어졌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온 어머니와 만나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