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23 – 4
“말씀은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로고소 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남은 복숭아 타르트를 쳐다보더니 뭔가 다짐하는 것처럼 그것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단단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올해는 저보다 언니에게 도움이 더 필요하니까요.”
그렇군. 나는 자신은 욕해도 되지만 터너 경은 욕하면 안 된다던 로고소 양의 말을 떠올렸다.
“저도 그래요.”
뜬금없는 내 말에 로고소 양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요. 빌어먹을 오라버니지만 나만 욕할 수 있죠. 가족도 아닌 사람이 빌어먹을 올리버라고 욕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로고소 양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는 찻잔을 들어 올려 가볍게 건배했다. 빌어먹을 오라버니와 망할 언니지만 내 오라버니고 로고소 양의 언니다. 남이 욕하게 두지 않을 거다.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커널 남작 부인을 로고소 가로 데려올 거예요?”
아직 의식 불명인 커널 남작 부인을 로고소 양이 간병하려면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 로고소 양이 커널 저택에 머물 거나, 커널 남작 부인을 로고소 저택으로 옮겨야겠지.
로고소 양은 어느새 복숭아 타르트를 다 먹은 뒤였다. 하나 더 먹겠냐고 묻자 그녀는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뇨. 제가 커널 저택에 들어가려고요.”
음. 그걸 커널 남작이 허락할까.
내 표정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였나 보다. 로고소 양은 결연하게 말했다.
“물론 커널 남작은 반기지 않았지만요. 정부를 데리고 들어오고 싶은 모양이더라고요.”
“세상에.”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커널 남작 부인이 아직 멀쩡하게 있는데 정부를 데리고 들어오겠다고? 로고소 양 역시 아니, 나보다 더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우울하게 말했다.
“언니가 깨어 있었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연하죠. 정부를 다 데리고 들어온다니, 제정신이 아니네요.”
미친 게 분명하다.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로고소 양이 멈칫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는 아니고 한 명을 데리고 들어오고 싶은가 봐요.”
“어? 한 명만요?”
커널 남작의 정부가 대여섯 명쯤 된다던데? 그중에서 한 명만 데리고 들어온다고?
그럼 남은 사람들은 어쩌고? 아니, 왜 한 명만 데리고 들어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로고소 양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네. 한 명만요. 마지막 정부가 아이를 가졌다는 거 같아요.”
뭐라고?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로고소 양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 많은 정부를 두고도, 커널 남작 부인과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고도 자식 소식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마지막 정부가 아이를 가졌다고?
“어, 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다행인 건 로고소 양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차를 마시다가 말했다.
“거짓말인 것 같죠?”
“으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게 진짜라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약 진짜 커널 남작의 정부가 임신한 게 맞다면 커널 남작과 그 정부에게는 남작 부인이 장애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연 자기 부인을 죽이려 할까.
“글쎄요.”
로고소 양이 떠난 뒤, 나는 엘리엇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내 추측을 들은 엘리엇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을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커널 남작이 남작 부인을 해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뭐라고? 나는 엘리엇의 질문이 이해가 안 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칠 이유가 차고 넘치죠? 다른 여자가 그렇게 바라는 후계자를 임신한 거잖아요?”
“그렇죠.”
엘리엇은 자세를 고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계속 말하라는 표정을 짓자 그는 가볍게 인상을 썼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커널 남작에게 중요한 건 후계자지, 정부나 부인이 아니잖습니까?”
방금 인상을 쓴 건 내가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커널 남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는 다시 인상을 쓰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를 빼앗아서 남작 부인에게 키우게 하면 일이 더 쉽잖습니까.”
엘리엇의 대답은 내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한지 몰라 잠시 눈을 깜빡였고 그의 말을 이해한 다음에는 입을 딱 벌렸다.
“더 쉽다고요?”
“네. 그쪽이 더….”
거기까지 말한 엘리엇의 눈에 내 표정이 보인 모양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아주 훌륭하다 생각하던 차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고 엘리엇의 얼굴 위로 죄책감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나도 안다. 나는 내 두 손을 맞잡은 채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먹다 남은 케이크가 눈에 보였다. 내가 오고 얼마 안 돼서 하인이 가져왔다.
아마 급하게 만든 모양인지 케이크 위에 졸인 복숭아를 얹은 형태였다.
나는 복숭아를 좋아한다. 향도 좋고 달콤하니까. 복숭아 파이, 복숭아 케이크, 복숭아 잼. 다 좋아한다. 그리고 엘리엇은 그걸 알았다.
“당신 꿈에서요.”
마음이 진정되자 궁금해졌다. 내가 입을 열자 엘리엇이 듣고 있다는 신호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최대한 단어를 골라서 물었다.
“커널 남작에게 자식이 있었나요?”
엘리엇의 시선은 마치 나를 꿰뚫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뱉듯 말했다.
“아니요.”
“커널 남작 부인은요? 그녀는 살아 있었나요?”
다음 대답은 좀 더 늦게 나왔다. 나는 엘리엇의 대답을 듣지 못할까 싶어 숨을 죽였다. 잠시,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기억이 안 나나 보다. 엘리엇은 인상을 쓴 채 어딘가 한 지점을 쏘아보더니 말했다.
“아니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나는 차를 마시는 엘리엇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꿈과 비슷했다. 커널 남작 부인은 의식 불명이고 커널 남작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부인이 죽지 않았고 정부가 남작의 아이를 임신했을 가능성 정도겠지.
그때 문득, 남작 부인이 엘리엇에게 이상한 제안을 했다는 게 생각났다. 나는 그에게 몸을 내밀며 물었다.
“전에 남작 부인이 당신과 일 년만 사귀자는 제안을 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엘리엇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세상에.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만약 커널 남작 부인이 엘리엇이나 로렌, 라넌 경처럼 꿈을 꾼 사람이라면? 그녀가 일 년 안에 자신이 살해당한다고 생각했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바꾸려 했을 것이다. 로렌이나 라넌 경처럼.
다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레이디 데번, 로렌, 라넌 경. 그리고 커널 남작 부인.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앞의 세 명에게는 꿈을 꿨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꿈에서 본 자신의 인생을 바꾸려 했지.
“예지몽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로렌은 모든 게 똑같이 흘러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커널 남작 부인에게도 똑같이 흘러갔다.
“아니요.”
엘리엇의 대답은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나왔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그게 예지몽이라면 이 나라는 불바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의문이 들었다. 나는 엘리엇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드래곤을 찾아갔죠. 나라가 불바다가 되는 걸 막았고요.”
그가 꿈에서 드래곤의 둥지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면, 그리고 드래곤의 약점을 알았다면 말이 된다. 엘리엇이 나라를 구한 그 자체가 그와 다른 사람들의 꿈이 예지몽이라는 말이다.
생각보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예지몽이었구나.
나는 로렌과 레이디 데번을 그리고 라넌 경과 커널 남작 부인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예지몽을 꿨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바꾸려 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인생이 크게 바뀐 건 나일 것이다. 예지몽에서 나는 왕이라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엘리엇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 덕분에 내 가족들이 살았다. 그리고 내가 평범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왜 엘리엇이지? 그리고 왜 레이디 데번과 로렌과 라넌 경이지?
예지몽을 꾼 사람과 꾸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뭐지?
“커널 남작을 지켜보라고 하겠습니다.”
예지몽을 꾼 사람과 꾸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엘리엇이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뭐라고? 내가 고개를 들자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덧붙였다.
“커널 남작 부인이 그렇게 된 데에 커널 남작이 어떻게든 연관돼 있을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널 남작 부인을 그렇게 만든 게 커널 남작이라면 그녀를 간호하고 있는 로고소 양도 위험할 수 있다.
“미안한데.”
로고소 양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커널 남작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로고소 양도 살펴봐 줄 수 있냐고 물어보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말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엘리엇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안하실 것 없습니다. 제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 존재하니까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라 해도 너무 다정한 말이었다. 그는 내가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는 사이에 자세를 바로 하며 말을 이었다.
“로고소 양도 지켜보라고 하겠습니다.”
“고, 고마워요.”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바닥을 뺨에 대며 인사했다. 정작 엘리엇은 담담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