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07/239)

112화. 23 – 3

“파혼하고 싶어요.”

좀 더 당당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로고소 양의 불안정한 목소리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터너 경은 에리카의 말투보다 말의 내용 그 자체에 충격받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 에리카.”

간신히 충격을 수습한 뒤, 터너 경은 로고소 양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여자한테 선동이라도 당한 거야? 파혼이 무슨 유행인 줄 알아?”

“말조심해, 터너 경.”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왜 로고소 양이 내게 같이 있어 달라고 했는지 알겠다. 나는 만나는 장소를 우리 집으로 정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여긴 비스컨 저택이네. 예의는 선택이 아니야.”

망할 네 집이라면 몰라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삼켰다. 터너 경은 내 비난에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금세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을 붉혔다.

“레이디 비스컨의 말이 맞아요.”

간신히 로고소 양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찻잔을 꽉 쥐고 있었지만 나를 흉내 내듯 단호하게 말했다.

“예의를 지켜 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내가 예의를 지키지 않아서 파혼하겠다고?”

“아니요.”

터너 경의 누그러진 태도에 로고소 양은 좀 더 용기를 얻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당신이 날 모욕했기 때문이에요. 내 언니에게 자업자득이라고 했죠.”

끝말이 조금 떨리긴 했지만 로고소 양은 말을 끝맺는 데 성공했다. 터너 경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나를 쳐다봤다.

네가 시킨 거냐고 묻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묻고 싶으면 소리 내서 말해야지.

“파혼해 주세요.”

이어진 로고소 양의 말에 터너 경은 침착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그는 피식 웃더니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싫은데?”

으흠.

다시 한번 로고소 양이 왜 내게 같이 있어 달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터너 경은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모양이다. 적어도 로고소 양의 말은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 해 주면….”

“안 해 주면? 어쩔 건데?”

터너 경이 로고소 양의 말투를 따라 하며 물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고 나를 한 번 쳐다본 그는 자세를 고쳤다.

“공개적으로 파혼 요구를 할 수밖에 없어요.”

좀 더 당당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두 번째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터너 경이 로고소 양의 말을 비웃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내가 무례해서 파혼한다고? 하! 어디 해 보시지?”

“터너 경.”

왜 이렇게까지 로고소 양을 무시하는지 모르겠네. 아니, 사실은 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 형제뿐이지.

터너 경은 귀족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들었다. 친척인 터너 자작에게 자식이 없으니까. 그가 죽으면 자작위는 터너 경이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만약 커널 남작 부인이 의식 불명이 아니라면 상황은 좀 나았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의식 불명이고 로고소 양을 귀족 사회에 남아 있을 수 있게 하는 건 자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터너 경과의 결혼뿐이다.

아, 좀 화나네.

부글부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커널 남작 부인이 멀쩡했다면 당장 터너 경과의 약혼을 파기해 버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적어도 커널 남작 부인이 멀쩡했다면 터너 경이 이런 식으로 굴지 못했겠지.

“무례해서 파혼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다행히 로고소 양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녀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터너 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침을 한 번 삼킨 뒤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와 언니를 모욕해서 파혼하는 거예요. 공개적으로 파혼 요구를 한다면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사람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고요.”

터너 경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턱을 들며 말했다.

“뭐? 당신 언니가 자업자득이라고 한 거?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걸?”

로고소 양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그의 말이 맞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거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맞아. 하지만 그걸 로고소 양에게 하는 것과 뒤에서 속삭이는 건 다르지.”

사람들은 로고소 양이 터너 경의 행각을 밝히면 그를 비난할 거다. 그리고 내 경우에도 그랬지만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게 더 타당한 파혼 사유가 된다.

내 지적에 터너 경이 다시 멈칫했다. 그는 로고소 양을 돌아보며 물었다.

“진심이야? 네 망할 언니에게 자업자득이라는 말 좀 했다고 네 인생을 망치겠다고?”

허어.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터너 경에게 입 닥치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로고소 양이 말했다.

“그래! 내 망할 언니니까! 나는 욕해도 돼! 근데 망할 네가 욕하면 안 되지!”

응?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터너 경을 노려보는 로고소 양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완전히 흥분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터너 경을 노려보고 있긴 했다.

“마, 망할?”

다행히 나보다 터너 경의 충격이 더 컸던 모양이다. 당황하는 그를 돌아보는데 로고소 양이 다시 소리쳤다.

“그래, 이 망할 자식아! 네가 뭐라고 우리 언니한테 욕이야?”

“이, 이게….”

터너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허.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다.

“앉아.”

“뭐라고?”

“갈 거 아니면 앉으라고.”

우습게도 터너 경은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는 앉아야 할지 그냥 가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대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나가려는 것처럼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아시지, 레이디 비스컨. 당신이 레이디 비스컨이라고 이렇게 멀쩡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도 되는 줄 알아?”

허어. 왜 자꾸 내가 뭘 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고작 내가 망칠 수 있는 걸 왜 당신은 지키지 못했어?”

터너 경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렇잖아? 내가 로고소 양의 인생을 망쳤다며? 그럼 그녀와 가장 가까운, 약혼자라는 입장인 터너 경은 왜 로고소 양의 인생을 지키지 못했지?

안타깝게도 터너 경은 끝까지 내 지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지적이 지적이라는 건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어디 그렇게 잘난 척해 보시지. 당신 인생도 쟤처럼 될 테니까.”

“칭찬 고마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터너 경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결혼 안 해도 난 레이디 비스컨이잖아. 로고소 양은 커널 남작 부인의 동생이고.”

그제야 터너 경은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로고소 양은 커널 남작 부인의 동생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터너 경과 결혼하면 터너 부인이 되겠지.

남작 부인의 동생과 터너 부인의 차이는 크다.

“나, 나는 터너 자작이 될 사람이야!”

“오, 그건 두고 봐야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 응접실 문을 열어 하인을 불렀다. 누군가가 터너 경을 배웅해 줬으면 좋겠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가 이 집에서 확실하게 나가는지 지켜보라는 뜻이다.

분노인지 충격일지 모를 감정으로 터너 경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집사와 하인이 나타나자 순순히 떠났다.

“세상에.”

둘이 남자 로고소 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하인에게 간식거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괜찮아요?”

하인이 복숭아 타르트를 가져왔다. 나는 터너 경의 흔적을 지워 달라고 부탁한 뒤 터너 경이 앉았던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다행히 로고소 양은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가 권하는 대로 복숭아 타르트에 포크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네. 괜찮아요. 제가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몰라서 놀란 것뿐이에요.”

“잘하던데요.”

솔직히 말하면 놀랐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덧붙였다.

“그 망할 터너 경이 아주 놀랐어요.”

로고소 양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미소로 휘어졌다. 그리고 곧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웃으니 다행이다. 나는 로고소 양이 웃는 것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터너 경과 파혼했으니 결혼하려면 다른 구혼자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벌써 여름이 지나고 있다. 물론 사교 시즌은 가을까지고 가을에도 사람들은 다양하게 교류를 한다.

사냥을 하기도 하고 음악회나 미술 감상을 하기도 하지. 연극 같은 걸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건 결국 여름 동안 친해진 사람들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혼 생각이 없더라도 여름 동안 부지런하게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그래야 가을에 어울릴 사람이 생기니까.

로고소 양은 터너 경과 파혼했으니 그와 공통으로 아는 지인들과 거리를 둬야 할지도 모른다. 가을에 어울릴 사람이 확 줄어든다는 뜻이다.

“괜찮으면 나와 함께 다닐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리엇이 내게 구혼한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는지 내게 초대장이 꽤 많이 온다. 나와 어머니는 이미 아는 사람이 아니면 거절하고 있지만 로고소 양을 위해 몇 가지 초대에 응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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