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06/239)

111화. 23 – 2

아주 잠깐, 방 안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내 느낌만은 아니었을 거다. 패터슨 자작 부인 역시 굳어 있었으니까.

나는 잠시 패터슨 자작 부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왕비 전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고작 수영장입니다. 그런 가십에 오르내릴 가치가 없습니다.”

왕비쯤 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압박을 가하려면 좀 더 대단한 거여야 한다. 아들과 하는 수영 정도는 왕궁에서도 할 수 있다. 작은 수영장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까.

고작 유행하는 수영장을 아들과 쓰기 위해 귀족을 압박했다는 소문이 돈다면 왕비 전하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왕족쯤 된다면, 공포의 대상이 될지언정 웃음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

“그렇다는군, 마리온.”

왕비는 그렇게 말하며 패터슨 자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자작 부인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왕비가 이런 요구를 한 건, 패터슨 자작 부인이 부추겼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녀는 곧 내게 고개를 돌리며 자작 부인에게 말했다.

“내 방에 가서 그걸 가져오게.”

왕비의 지시에 패터슨 자작 부인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뭘 가져오라는 걸까. 설마 날 혼내려는 건 아니겠지.

감히 내게 훈계를 하다니, 고얀 것! 뭐 이렇게.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왕비 전하는 패터슨 자작 부인이 나가자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억지를 부려 미안하네, 레이디 비스컨. 마리온이 워낙 권해서 말이야.”

역시 패터슨 자작 부인이 부추긴 모양이다. 하지만 왕비 전하는 수많은 부추김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하필 나에 한해서만 그 부추김에 응하기로 한 이유가 뭘까.

“왜 패터슨 자작 부인의 권유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최대한 완곡하게 물었다. 패터슨 자작 부인의 권유가 억지라 생각했음에도 따른 이유가 있겠지.

왕비는 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미안하다는 표정을 미소를 지었다. 허어.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왜 그랬는지 답이 됐다. 나는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썼고 왕비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하겠네. 자네가 이 곤란한 상황에서 어찌 빠져나갈지 궁금했어.”

쉽게 말하면 나를 시험해 봤다는 말이다. 아까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쓴 덕분에 나는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왕비는 다시 내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아닙니다, 전하.”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부인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봐 봐. 모든 사람은 다들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어느 정도는 아첨한다니까.

나는 비꼬는 거로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하께서는 원하신다면 궁금증을 채우실 수 있으니까요.”

즉, 넌 누구나 압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젠장. 노력한 것보다 훨씬 날카롭게 들린다.

왕비는 내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고작 이 정도로 내 목을 자르지는 못할 거다. 눈에 보이는 벌을 내리지도 못한다. 설령 평민이 방금 전의 나 같은 행동을 했다 해도 좀 건방졌다는 이유로 벌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상대는 왕족이고 왕족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

나는 사과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네가 요새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다는 걸 아나?”

그때, 왕비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가 화를 내지 않은 것과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뜻 중 어느 쪽에 더 반응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제가요?”

어리둥절한 내 반응에 왕비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내밀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자네의 사업이 아주 잘되고 있다지. 다들 자네를 주시하고 있어.”

나를? 나는 왕비 전하가 재미없는 농담을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웃어야 할지 망설였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의견이 갈리더군. 그게 자네의 사업이라는 사람도 있고 번즈 백작의 사업이라는 사람도 있고.”

이어진 왕비 전하의 말에 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재빨리 폈다.

대외적으로 그 사업은 엘리엇의 사업이다. 하지만 수영장에 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게 내 사업이라는 걸 알겠지.

“그래서 궁금했네. 그게 누구의 사업인지.”

왕비의 솔직한 말에 불쾌했던 기분이 풀어졌다. 왕족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녀가 나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누구의 사업인지 아셨습니까?”

내 태도가 누그러지자 왕비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자네의 최근 행보가 아주 흥미로워. 파혼을 하고 사업에 뛰어든 미혼 여성이란 그리 흔하지 않잖아.”

나는 여전히 내가 왕비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행동은 과격하다 못해 파격적이었다. 다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거다. 어쩌면 뭐, 미쳤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

머릿속에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던 여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커널 남작 부인, 레이디 데번, 로렌, 그리고 라넌 경.

네 사람의 공통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 사람의 공통점이군. 그때, 왕비 전하가 이어 물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한데.”

“저는 명예가 중요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왕비의 표정에 나는 씩 웃었다. 귀족 중에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내가 유독 명예를 중시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무슨 소린지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패터슨 자작 부인이다. 자작 부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금세 왕비 전하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대더니 자작 부인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말씀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자작 부인의 손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두 개 들려 있었다. 저게 뭐지? 나는 너무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사이에 자작 부인은 상자 하나를 테이블, 왕비 전하의 앞에 내려놓았다.

“고맙네.”

가볍게 자작 부인에게 인사한 왕비 전하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저게 뭘까. 작은 보석함처럼 보인다. 하지만 왕비 전하가 내게 보석을 줄 이유가 없을 텐데.

“얼마 전에 나비 궁을 정리했거든. 그때 발견한 걸세.”

나비 궁이라면 지금은 빈 궁이다. 원래라면 성인이 된 공주가 결혼하기 전까지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공주님은 뉴커크의 왕비님이 되셨고.

왕비는 상자를 내 쪽으로 밀더니 열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날 주는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열었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사용하시던 거라더군.”

가느다란 팔찌였다. 음, 그렇네.

나는 왕비를 한 번 쳐다보고 팔찌를 들어 올렸다. 공주님이 사용했다면 검소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가는 사슬에 보석인지 구슬인지 모를 게 몇 개 달려 있었다.

흠. 귀엽네.

나보다는 줄리아가 하는 게 더 귀여울 것 같다. 아니, 잠깐.

혹시나 하고 팔찌를 들여다봤지만, 그냥 구슬이었다. 내 태도를 본 왕비 전하도 웃으며 말했다.

“보석은 아니야. 거기 달린 검은 거 하나만 빼고 말이지.”

알록달록한 구슬 중 단 하나, 검은 건 보석인 모양이다. 나는 검은 보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진주인가? 아니면 사파이어?

하지만 어느 쪽도 아니었다. 검은 구슬은 광택이 거의 없었다. 음, 이런 보석은 못 본 것 같은데.

우리 집이 부유하지는 않지만 나는 보석을 볼 줄 안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보석은 못 봤다. 내가 이상하다는 듯 검은 구슬을 관찰하자 왕비가 말했다.

“마법석이라는군.”

“마법석이요?”

그게 뭐지? 잠깐.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있다. 나는 내 새끼손톱보다 작은 마법석을 쳐다보다가 그것을 재빨리 상자 안에 놓았다.

마법석. 쉽게 말해서 마법을 품을 수 있는 돌이다. 보통 보석도 마법을 품을 수 있지만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보석이 갈라지거나 터진다고 한다.

하지만 마법석은 마법을 여러 번 품을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석은 장식용이 아니라 전투용에 가까웠다. 상아의 탑에서 연구용으로 쓰기도 하고 부유한 용병들이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팔찌로 가공이 돼 있다면 마법석은 마법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그 마법이 어떻게 발현이 될지 모르고.

“걱정하지 말게. 텅 비어 있으니.”

그때 왕비가 말했다. 마법석이 마법을 품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보다. 그녀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제네비브 공주가 여기 있었다면 자네에게 줬을 거라고 생각해. 자네의 어머니와 아주 절친한 사이였으니까.”

그랬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공주님의 말동무였고 아주 친했다고 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공주님의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완벽했는지.

어머니의 이야기만 들으면 제네비브 공주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 내 롤모델이 그녀였으니 말 다 했지.

“감사합니다.”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상자를 닫았다. 그냥 구슬이라 공식적인 자리에 차고 나가긴 좀 그렇고 일상적으로 착용할 수는 있겠지.

그때, 왕비 전하가 패터슨 자작 부인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자작 부인이 들고 있던 또 다른 상자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자네가 하기엔 좀 유치하지. 아마 제네비브 공주님도 아카데미 시절에 착용했던 게 아닌가 싶어.”

이건 또 뭐야?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왕비 전하가 말했다. 그녀는 열어 보라는 눈짓을 하고 말을 이었다.

“구슬만 보석으로 바꿔서 내가 사용할까 생각도 했거든. 하지만 오늘 내가 자네에게 실례를 했으니 사과의 의미일세.”

허.

나는 왕비의 말에 잠시 두 번째 상자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어 보니 작은 보석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러네.

팔찌에 달린 구슬과 비슷한 크기였다. 종류도 다양하다. 구슬과 바꿔 달면 될 것 같다.

슬쩍 패터슨 자작 부인의 안색을 살피자 그녀는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금세 표정 관리를 했다. 그렇군.

나는 처음부터 왕비가 이럴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행동은 나를 향한 행동인 동시에 패터슨 자작 부인을 향한 행동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상자 두 개를 집어 들며 인사했다. 다음에 또 놀러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방문할 때보다 더 기분이 좋을 수 있었다.

물론 패터슨 자작 부인은 아니었을 거다.

처음부터 왕비는 내게 제네비브 공주님의 팔찌와 팔찌의 구슬을 대체할 수 있는 보석을 줄 생각이었던 거다. 하지만 그냥 줬다간 편애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니 자작 부인이 시키는 대로 끌려가는 척한 거지.

즉, 패터슨 자작 부인이 원하는 대로 나를 압박하는 척하고, 그것에 대한 사과로 팔찌와 보석을 준 거다.

그것참 머리 아프네.

다시 마차를 타고 돌아오며 나는 부디 왕족이 날 부르지 않기를 기도했다. 팔찌 하나 주는 것도 저렇게 머리를 써야 하는 곳이 왕궁이다. 난 좀 단순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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