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3/239)

108화. 22 – 3

“잘하셨습니다.”

어느 순간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허우적거리다가 그녀의 팔을 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아직도 물 안에서 서 있는다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서 있을 수 있다.

뒤돌아보니 내가 어느샌가 수영장을 가로질러 클레어가 있는 곳까지 도착해 있었다. 세상에.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성공했네요?”

“네. 성공했습니다.”

클레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수영장을 수영해서 가로질렀다. 걷는 게 아니라.

세상에.

나는 신이 나서 다시 수영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클레어를 돌아보며 말했다.

“성공했어요!”

“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기분 좋게 물 안에서 뛰었다. 거북하게 느껴졌던 물의 느낌이 지금은 꽤 기분 좋게 느껴졌다. 걷는 건 여전히 좀 어색했지만.

나는 클레어와 함께 수영장 밖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슬슬 수영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올 때가 됐다. 우리가 의자에 앉자 직원들이 차를 내왔다. 정확히 말하면 로렌이 고용한 직원들이다.

주급을 내가 지불하기는 하지만 사람을 고용하고 배를 운영하는 전반적인 일을 로렌에게 맡겼다. 물론 내가 검토를 하기는 하지만 로렌은 그 일을 굉장히 잘하고 있다.

우리의 사업은 적자만 아니면 된다던 초기의 기대와 달리 상당한 이득을 보고 있었으니까.

“혹시 비스컨 백, 남작이 제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클레어는 주저하며 내게 물었다. 그 이야기였군. 오늘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내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 쓰잘데기 없었던 올리버와의 대화를 되돌아보았지만 역시나 오라버니의 입에서 나온 말의 절반은 쓸모가 없다.

아, 물론 남은 절반이 쓸모 있는 말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절반은 쓸모가 없다고 말한 이유는 남은 절반은 내가 못 들은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못 들은 말도 쓸모없는 말일 테지만 일단은 가능성을 버리지 말자는 게 내 좌우명이라서.

“음, 아니요. 안 하던데요.”

또 싸웠나?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클레어의 명예를 위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클레어와 올리버는 사이가 좋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클레어가 올리버를 싫어하는 거겠지. 그리고 그건 내 기준으로도 꽤 이상한 일에 속했다.

살면서 올리버를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별로 없다. 내 오라버니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올리버는 꽤 잘생겼거든.

아, 그래. 정정한다. 올리버는 아주 잘생겼다. 줄리아가 그랬다. 지금 사교계의 남자 중에서 올리버보다 잘생긴 남자는 많지 않다고.

하지만 올리버는 내 오라버니고 나는 그가 그렇게 잘생긴 줄 모르겠단 말이지. 좀 잘생긴 건 알겠는데 사교계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건 좀 과장된 것 같다.

어쨌든, 잘생기고 그럭저럭 성격도 좋은 덕에 올리버는 인기가 많은 편이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도 그를 좋아한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면 방학 때마다 친구들을 우르르 끌고 오곤 했다.

그래서 보통 올리버를 싫어한다는 건 그에게 실연을 당했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올리버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클레어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고.

“저 때문에 곤란해졌다는 말도 없었고요?”

뭐라고? 나는 클레어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레어 때문에 곤란해졌다고?

내 표정을 본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더니 결심한 것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비스컨 남작이 절 도와준 것 같아요.”

“도와준 것 같다고요?”

도와준 거면 도와준 거지, 도와준 것 같은 건 뭐야? 내 질문에 클레어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했고 그 장면을 들킬 것 같아 보이자 그가 그녀를 협박하는 척 굴었다고 한다.

왜 도와준 것 같다고 했는지 알겠다.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했을 거다. 다른 기사들의 미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올리버다운 방식이기도 했다.

“도와준 게 맞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카데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귀족과 평민이 섞여서 다니는데도 귀족은 귀족끼리, 평민은 평민끼리 어울린다고 한다.

“로만이라고, 올리버의 친구가 있는데 오라버니가 조정 클럽에 끌고 갔거든요.”

올리버 말로는 조정을 시키면 잘할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정말로 잘했고, 덕분에 시합에서도 몇 번 이겼다. 문제는 아카데미에서 조정 클럽에 든 학생은 다들 귀족이었다는 거다.

로만은 클럽 안에서 어울리지 못했고 올리버는 팀을 이기게 해 준 재원을 놓치기 싫었다고 한다.

“그때도 다른 사람들 욕을 했대요?”

“그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요.”

로만을 제일 괴롭히는 녀석을 지목해서 로만과 싸우게 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쓰냐고 어머니와 내가 경악했지만,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우리끼린 통한다니까?

실제로 통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로만과 싸우고 난 뒤 그 클럽은 그를 받아들였다. 진짜 심하게 싸웠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때 싸운 학생의 부모가 학교에 항의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 항의는 금세 취소됐고 올리버의 조정 클럽은 똘똘 뭉쳤다. 지금도 로만은 귀족뿐인 올리버의 조정 클럽에서 평민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아, 물론 이제는 유일한 평민 선수가 아니라고 들었다.

“그럼 그가 절 도와준 게 맞네요.”

클레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도와줬다는 것보다 올리버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걸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클레어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면 뭔가 착각한 게 아니냐고 물었을 거다.

“뭐, 도와줄 수는 있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도 그렇지만 올리버도 좀 그런 구석이 있다. 로만을 조정 클럽에 끌고 갈 때도 그랬다. 왜 굳이 그를 클럽에 데려갔냐고 물어보자 오라버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잘할 것 같았다니까? 잘할 것 같은데 뭐가 더 필요해?

올리버가 보기에도 기사단이 클레어를 대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 내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건 아닐 거예요. 아마 당신을, 유제니를 떠올린 것 같아요.”

“저를요?”

“어릴 때 입이 짧아서 음식을 잘 못 먹었다면서요?”

아, 그랬다. 지금은 다 잘 먹는다. 쉽게 말해서 편식을 좀 했지.

올리버가 그런 말까지 했단 말야?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클레어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손수건에 햄을 감싸서 주더라고요.”

“맙소사, 손수건에요?”

못살아, 진짜. 나는 이마를 감싸 쥐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 건 가족끼리만 하란 말이다, 이 멍청한 오라버니야.

“미안해요. 올리버는 지금도 가끔 그래요. 술에 취하면 가끔 손수건에 과자를 담아서 내 방에 두고 나가더라고요.”

아주 가끔 그런다. 그 술집에서 과자나 스콘 같은 걸 팔 때만. 덕분에 다음 날 아침이면 그가 술에 완전히 취해서 돌아왔다는 걸 어머니와 내가 알게 된다.

“사이가 좋군요?”

믿을 수 없다는 클레어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형제자매는 다 그렇지 않나요? 서로를 죽이고 싶지만, 남이 죽이는 건 용서할 수 없죠.”

올리버를 욕하는 건 나만 할 수 있다. 아무리 그가 욕을 얻어먹어도 싼 인간이라 해도, 가족 외의 사람에게 욕을 먹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클레어는 내 설명에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 표정인지 모르겠네.

가끔 형제자매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건 안다. 보통 재산 때문이지. 아니면 결혼 때문이기도 하다. 동생이 좋아한 사람과 형이나 언니가 결혼하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와 올리버는 남매고, 서로가 좋아하는 상대와 결혼할 리가 없다. 우리 집은 싸울 만큼의 재산이 있지도 않고.

“왜요? 내가 올리버와 사이가 나쁜 줄 알았어요?”

내 질문에 클레어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 직원이 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올라오라고 하세요.”

“그냥 밖에서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남자예요?”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내게 받아 둔 명함을 내밀었다. 에리카 로고소. 나는 클레어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디 비스컨.”

에리카는 배 입구에 서 있었다. 들어와도 되는데. 나는 수영을 하기 위해 배를 찾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올라오지 그래요?”

많은 사람이 수영을 하지 않더라도 배를 찾는다. 지난번에 리사와 에리카도 수영하지 않고 차만 마시고 갔다.

하지만 에리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곧 가 봐야 해요. 언니를 돌봐야 해서요.”

아, 그렇지. 나는 재빨리 커널 남작 부인의 용태를 물었고 에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별 차도가 없는 모양이다.

“전에 제게 파혼한 다음에 어떻게 살지 생각해 봤냐고 물어봤죠?”

그랬다. 에리카의 말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곧이어 에리카의 말이 이어졌다.

“결과를 감당할 수 있냐고도 물었고요.”

조금 거칠게 말하면 그랬다. 파혼한 뒤 구혼자가 없다면 우리는 수도원에 들어가야 할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지금 약혼자보다 더 나쁜 남자와 결혼해야 할 수도 있고.

그녀의 인생이다.

에리카의 인생이고 에리카의 선택이다. 거기에 내가 왈가왈부할 부분은 손톱만큼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선택을 응원해 주는 것뿐이다.

“감당할래요.”

이어진 에리카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로?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가 약혼을 유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터너 경이 무신경하고 무례하고 이기적으로 굴었다고 들었다. 그녀가 떠난 뒤로 줄리아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한참이나 떠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에리카가 터너 경과 결혼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이런 말은 슬프지만 로고소 양의 집은 가난한 편이고, 에리카의 언니인 이멜다는 의식 불명이며 이멜다의 남편인 커널 남작은 새로 생긴 정부에게 푹 빠져 있다고 들었으니까.

에리카가 자기 인생을 먼저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에리카의 인생과 그녀가 생각한 인생은 방향이 좀 다른 모양이었다.

“고민해 봤어요. 내가 제프리와 살 수 있을지요.”

에리카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장갑을 낀 자신의 손을 비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못하겠어요. 그는 나를 모욕했어요. 내 언니를 모욕하고 내 가족을 모욕했어요. 그런 자와 결혼해서 살면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도 그랬다. 어닝이 나를 모욕했다. 내 가족을 모욕했다.

그가 동성을 사랑한다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중요하긴 했지. 하지만 그가 내게 솔직했고 나를 존중했다면 나는 파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참하게 터너 부인으로 사는 것과, 고돼도 언니와 자신에게 떳떳하게 사는 것 중에 후자를 선택할래요.”

슬프게도 그리고 조금은 기쁘게도 에리카는 나와 같은 선택을 했다. 그녀는 비틀던 자신의 손을 떼고 내게 내밀며 물었다.

“내 선택을 응원해 준다고 했죠?”

그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에리카는 내게 단호한 표정으로 요구했다.

“제프리와 파혼할 때 같이 가 줘요.”

그렇게 약속했다. 나는 백작의 딸이고 레이디 비스컨이다. 내가 내뱉은 말은 내 목숨보다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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