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22 – 2
“뭘….”
먹으라는 거지? 클레어가 질문을 끝맺기도 전에 올리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슨 짓이야? 놀라서 뿌리치려는데 그가 그녀의 손에 헝겊 뭉치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반대편 주머니에서 똑같은 헝겊 뭉치를 꺼내며 말했다.
“이것도.”
그제야 클레어는 헝겊 뭉치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그냥 헝겊이 아니라 손수건이었다. 안에 든 게 뭔지 몰라도 기름 같은 게 배어나 있었다.
“이게 뭔데?”
“햄이랑 과자야. 어디서 훔친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
집에서 가져왔다. 요리사는 도시락을 싸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괜찮다고 했다. 빵은 뭉개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클레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걸 왜 그녀에게 주는 거냐고 묻고 있었다.
그건 올리버도 모르겠다. 그는 싫으면 먹지 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 그냥 유제니 생각이 났다. 그는 “음” 하고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내 동생 말야. 어릴 때 입이 좀 짧았거든.”
안다. 하지만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의외로 가리는 음식이 많았다. 고기류는 냄새 때문에 향신료를 듬뿍 넣어야 먹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계피나 후추는 너무 매워서 많이 넣으면 못 먹었다.
그녀가 가장 무리 없이 먹을 수 있는 건 스콘이나 비스킷 같은 거였는데 그런 건 설탕과 버터가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자주 찾지 않았다.
처음엔 저렇게 작고 말랐는데 몸매 관리라도 하는 건가 했다. 하지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몸매 관리 때문이 아니라 그게 사치이기 때문에 자주 먹지 않는 거였다. 백성들은 먹을 게 없어 굶고 있는데 그녀가 먹을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우유를 허비할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먹지 않아야 다른 귀족들이 눈치라도 본다는 게 이유였다.
“어머니와 유모가 고생을 좀 하셨지. 식사 시간에도 자기 몫의 음식을 다 못 먹었거든. 어머니는 예의범절에 철저하셔서 말야.”
자기 몫의 음식을 다 못 먹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 음식들이 유제니가 못 먹는 것도 아니고 양도 그리 많은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린 유제니는 조금만 기분이 안 좋으면 아무것도 넘기지 못했다. 그게 비스컨 백작 부인과 유모를 더욱 걱정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내가 먹었거든?”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꽤 재미있었다. 유제니가 도저히 못 먹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면 그는 식탁 밑으로 손을 내민다. 그러면 유제니가 못 먹겠는 고기나 빵 같은 걸 식탁 밑으로 그에게 건네주곤 했다.
“그럼 고, 레이디 비스컨이 금세 배가 고파졌을 텐데.”
예리한 지적에 올리버는 다시 웃었다. 마치 소년 같은 미소였다. 이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클레어는 처음으로 그의 미소가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간식을 나눠 줬지.”
쿠키나 스콘 같은 걸 나눠 줬다. 간식 시간이 되면 늘, 올리버는 자기 몫의 커다란 쿠키를 반으로 잘라 손수건으로 감싼 뒤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유제니의 저녁 식사를 먹어 치운 뒤, 테이블 밑으로 손수건으로 감싼 쿠키를 건네주곤 했다.
테이블 아래로 먹을 것을 교환하는 남매. 여자애 쪽은 작은 유제니 비스컨이다. 그걸 상상하자 클레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창백한 외모에 금발을 가진, 작고 마른 소녀가 오라버니에게 쿠키를 받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을 것을 상상하니 클레어의 가슴이 따듯해졌다.
꿈을 꿀 거라면, 그때 꿨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제니와 클레어가 모두 어릴 때. 둘 다 열 살 미만일 때.
그랬다면 클레어는 어떻게 해서든 유제니에게 접근해 그녀의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녀의 곁에서 함께 있어 주다가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묘한 표정에 올리버의 말이 멈췄다. 슬픈 것 같으면서 동시에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클레어의 그 표정이 유제니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게 이상하게도 올리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도?”
멍하니 클레어의 얼굴을 보던 올리버는 그녀의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그는 클레어가 자신을 바라보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 아냐. 열네 살쯤이었나. 스스로 그만하겠다고 하더군.”
그의 동생이지만 영리한 아이였다. 그게 자신에게 그리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올리버의 간식을 빼앗아 먹는 게 미안하다고도 했고.
슬슬 식탁 밑으로 음식을 교환하는 게 어려워지던 터라 올리버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심 좀 섭섭하기도 했다.
작고 어린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어른스러운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레이디 비스컨의 입이 짧았던 게 그거 때문인 거 아냐?”
그때 클레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간식을 숨겼다가 주다니. 단걸 먹으면 입이 달아져서 식사를 잘 못 한다. 괜히 어릴 때 식사 전에 과자를 못 먹게 하는 게 아니다.
그거 때문인 거 아니냐가 아니라 그거 때문인 게 맞다. 하지만 올리버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이 달아져서 식사를 잘 못 한다니. 입이 달아지면 차로 입가심을 하면 되지 않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돌렸다.
“음, 어쨌든. 어릴 때 유제니한테 내 간식을 이렇게 줬거든. 그 녀석, 주머니가 더러워지는 걸 싫어해서.”
쿠키나 케이크 같은 걸 그냥 주면 주머니가 더러워진다고 싫어했다. 하는 수 없이 올리버는 자기 손수건으로 감싸 주곤 했다.
주머니가 더러워지는 걸 싫어했다는 말에 클레어는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디 비스컨답다. 그녀의 웃는 소리에 올리버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 순간, 클레어가 웃음을 뚝 그쳤다. 비스컨 남작과 건물 뒤에서 단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녀를 배신하는 기분이었다.
올리버는 클레어가 지금 이 상황을 어색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 걸음 슬쩍 물러나며 말했다.
“어쨌든, 먹어. 기사잖아. 잘 먹어야지.”
그는 어릴 때 검술 훈련도 받았고, 아카데미 시절부터 조정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당연히 운동에는 상당한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 체력에는 잘 먹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아무리 미운 놈이라 해도 일단 먹어야 하는 법이다. 특히나 그게 그의 동생을 구해 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고 보니 전에 물놀이에서 유제니를 도와준 걸 고맙다고 인사하지 못했다는 게 올리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어머니와 유제니가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긴 했다.
하지만 올리버는 그녀와 보자마자 싸우느라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뗐을 때였다. 올리버의 귀에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그리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가 클레어를 쳐다봤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라넌 경이 함께 있는 걸 다른 기사들이 본다면 라넌 경에게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클레어의 귀에도 들렸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순간, 올리버가 큰 소리로 말했다.
“너도 나쁠 것 없잖아? 그냥 저 녀석들 약점 하나만 알려 주면 된다니까?”
“무슨….”
당황한 클레어가 입을 열자 올리버가 자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태도에 클레어는 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미간을 찡그렸다.
재빨리 뒤쪽에 귀를 기울인 올리버는 이쪽으로 다가오던 발걸음 소리도, 말소리도 뚝 끊긴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싫긴 뭐가 싫어?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동료라고 감싸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클레어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 했다. 뜬금없는 이야기다. 저 녀석들은 누구고 약점은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때, 올리버의 뒤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나타났다.
“비스컨 남작?”
“엇.”
올리버는 과도하게 놀라는 시늉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몸에 가려져 있던 클레어가 기사들의 눈에 들어왔다.
“라넌 경? 잠깐.”
눈치 빠른 기사들은 올리버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아니, 오해했다. 올리버가 유도한 대로.
상황이 순식간에 악화됐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클레어 역시 올리버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잠깐….”
“입 닥쳐, 라넌 경.”
그 순간, 올리버가 소리쳤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거친 태도에 클레어는 물론 다른 기사들도 멈칫했다. 올리버는 클레어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한마디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기사들에게는 올리버가 클레어를 협박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클레어에게는 다른 모습도 보였다. 그녀를 협박한 올리버가 재빨리 입 모양만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기 때문이다.
“기사를 협박하다니 배짱 한번 훌륭하군, 비스컨 남작.”
올리버의 연극에 클레어가 당황하는 사이, 한 무리의 기사 중 사일록 경이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클레어를 가장 괴롭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협박? 난 제안을 한 것뿐이야.”
올리버는 사일록 경 앞에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 뻔뻔한 태도에 기사들의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우리 동료를 협박해?”
“동료? 여기 이 기사의 동료가 어디 있지?”
그들이 클레어를 동료로 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는 태도에 몇몇 기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외부인이 알아차릴 정도였다는 말이다.
올리버는 쐐기를 박기 위해 말했다.
“어디 한 번 내가 라넌 경을 협박했다고 말해 보시지? 사람들은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궁금해할걸?”
같은 기사도 아닌 외부인이 기사의 약점을 알려 달라고 다른 기사에게 요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사단 안에 불화가 있다는 증거다.
올리버의 말에 사일록 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수치일지 분노일지 클레어가 궁금해하는 사이, 사일록 경이 말했다.
“그만 나가 주시지, 비스컨 남작. 여긴 우리 훈련장이라서.”
“아, 그래, 그래. 여긴 흰 사자 기사단의 훈련장이지. 아주 재미있더군.”
마지막까지 비꼬는 올리버의 말에 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일록 경의 지시에 따라 몇몇 기사가 올리버를 끌고 훈련장 밖으로 향했다. 클레어는 지금 일어난 일이 믿을 수가 없어서 끌려가는 올리버를 쳐다봤다.
“라넌 경.”
사일록 경이 클레어를 불렀다. 그는 끌려나가는 올리버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비스컨 남작과 친한가?”
친하냐고? 전혀 아니다. 클레어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니.”
그거면 됐다. 사일록 경이 몸을 돌리자 다른 기사들도 그를 따라 자리를 떴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손에는 올리버가 쥐여 준, 손수건으로 감싼 햄이 들려 있었다. 싫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원수라고. 기회만 된다면 반드시 죽여 버릴 사람 중 하나기도 했다.
“라넌 경!”
그때, 사일록 경이 몸을 돌려 클레어를 불렀다. 그는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빨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