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22 – 1
“말조심해!”
응접실 안에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친 남자의 목소리에 클레어는 멈칫했지만 앉아 있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위험할까? 흥분한 비스컨 백작의 모습에 클레어는 잠시 긴장했다. 그리고 여차하면 사람을 부르기 위해 클레어가 몸을 돌렸을 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스컨 백작. 말조심해야 할 건 당신이네.”
거친 비스컨 백작의 숨소리가 응접실 안을 채웠다. 클레어는 아주 잠깐, 그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비.”
재빨리 문을 열고 밖에 서 있던 병사들을 불렀다. 그들도 안에서 나는 고함을 들었으리라.
클레어가 병사들과 함께 응접실로 돌아갔을 때 이미 비스컨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몇 년간의 가혹한 현실로 날카로워진 그의 인상은 클레어가 병사를 데리고 들어온 것을 보자 더욱더 험악해졌다.
“네 오라비를 병사에게 끌려가도록 하겠다고?”
비스컨 백작의 비난에도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차갑게 말했다.
“내 오라비는 앞뒤 가릴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아닌데.”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말에 비스컨 백작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내가 내 친구의 복수를 하겠다는데 뭐가 천둥벌거숭이란 말이야?”
지난번 전투 때문이다. 드래곤의 분노를 사서 멸망하는 나라, 발시안. 모든 왕족이 사망한 발시안은 주위 나라에서 제일 손쉽게 집어삼킬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다들 그렇다고 생각했다.
끊임없는 침범을 가까스로 막아 내는 와중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다행인 것은 이웃 나라가 발시안이 생각만큼 손쉬운 먹잇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전쟁은 일시적으로 멈췄지만, 전투는 멈추지 않았다. 호시탐탐 발시안의 경계를 노리는 시도에 유제니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비스컨 백작이 지난번 전투로 사망한 친구의 복수를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친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시기에 군대를 이끌고 전방으로 나가겠다고?”
차갑게 말한 유제니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걸 천둥벌거숭이라고 하지.”
“유제니!”
화가 난 비스컨 백작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소리친 순간, 클레어가 나섰다. 그녀는 재빨리 병사를 지시해 비스컨 백작의 곁으로 다가가도록 했다. 그리고 병사들 옆으로 가서 말했다.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클레어 리오스 부인.
반역을 꾀하다 사망한 리오스 경의 부인이었으나 유제니가 자신의 말동무로 거둬 주었다.
그녀의 얼굴을 향한 비스컨 백작의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었다. 유제니는 그의 동생이다. 동생과 단둘이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여자가 그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네 남편이 반역을 꾀하기 전에 그리 말하지 그랬어?”
비스컨 백작의 빈정거림에 클레어의 얼굴이 확 굳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내지 않는 데 성공했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마녀의 말동무가 된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남편의 죽음을 팔아 승진한 마녀 같은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클레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꾸했다.
“내 남편에게 그러지 못했으니 백작에게라도 말해야죠.”
너도 반역을 꾀할 것 같으니 말리는 거라고 받아치는 거지만 올리버는 금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 클레어를 쳐다보다가 얼굴을 확 구겼다.
화낸다.
클레어는 올리버가 불같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화내지 않았다.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소파에 앉았다.
“간다.”
한참을 앉아 있던 비스컨 백작이 마음을 다스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가 정말 왕궁에서 나가는지 확인하라고 병사들에게 지시한 클레어는 재빨리 응접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지친 표정의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다. 유제니는 그런 느낌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신발을 벗더니 소파 위에 몸을 늘어트렸다.
피곤하겠지. 클레어는 새삼 비스컨 백작이 싫었다. 처음부터 그리 마음에 드는 작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오라버니면서,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오늘처럼 힘들게 할 때면 평소보다 더 싫어지곤 했다.
“차를 다시 내올까요?”
클레어의 질문에 유제니는 고개를 들었다. 차. 아까 비스컨 백작에게 내가서 둘 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군사를 이끌고 전방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비스컨 백작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두게.”
다 식은 차지만 유제니는 자세를 바로 하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새 차를 내오고 싶지만, 그녀가 그걸 바라지 않는 것을 안다.
마녀라는 별명답게 사치를 일삼을 것 같지만 고귀한 레이디는 검소한 편이다. 클레어는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기 위해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금 전, 비스컨 백작이 앉아 있던 자리다.
“응?”
소파 위에는 동그랗게 뭉친 헝겊 조각 같은 게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그녀는 동그란 헝겊 뭉치를 들어 올렸다. 안에 뭔가를 감쌌는지 좀 묵직했다.
“전하.”
어떻게 할까요? 그런 물음이 담긴 부름에 유제니는 고개를 들었다.
“이리 주게.”
“이게 뭔지 아십니까?”
유제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클레어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 * *
그건 뭐였을까. 클레어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소파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헝겊 뭉치.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다 보니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아니, 그때의 일이라 해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일이니까.
“어, 또 왔네.”
그때,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클레어는 훈련장 맞은편 저쪽에 서 있는 올리버를 발견했다.
또 왔네.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다. 올리버 비스컨. 멍청하고 짜증 나는 작자. 잘생긴 얼굴로 여자들의 관심을 즐기는 게 보이는, 한없이 가벼운 한량.
그 비스컨 백작, 아니, 지금은 남작이다. 비스컨 남작은 최근 계속 흰 사자 기사단의 훈련장을 찾고 있었다.
처음엔 그녀에게 시비를 걸려는 줄 알았다. 눈이 몇 번 마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훈련장을 찾는 동안 비스컨 남작은 한 번도 그녀에게 알은척을 하지 않았다.
만약 시비를 걸었다고 해도 클레어는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시하면 되니까.
물론 이 멍청한 흰 사자 기사단 녀석들은 그걸로 또 클레어를 괴롭히려 들겠지.
발시안의 양대 기사단이라는 흰 사자 기사단의 수준이란 고작 이 정도였다. 그게 클레어를 기운 빠지게 만들었다. 존경도, 보람도 없는 기사단 생활. 이 모든 것을 감내하는 것은 단 하나.
그녀의 레이디, 유제니 비스컨을 위해서였다.
클레어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지와 작위는커녕 돈도 별로 없는 가난한 하급 귀족이다. 가지고 있는 거라곤 아버지가 귀족이었다는 경이라는 호칭 하나뿐.
그녀는 부유하지도, 눈부시게 아름답지도, 여자로 태어난 게 안타까울 정도로 영리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할 뿐이다.
그런 클레어에게 행운이 찾아온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모든 것을 잃은 뒤였다. 남편이 반역을 꾀하다 사형당하고 그녀와 그녀의 동생들까지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그녀의 레이디가 그녀를 구해 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어느 누구도, 심지어 클레어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녀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다.
- 검을 배우는 게 어때?
지나가면서 한, 가벼운 말이었다. 그때의 클레어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남편이 반역을 꾀하다 죽은 젊은 과부. 이제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말동무가 된 부인이 검을 쥔다는 게 터무니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겪고 다시 돌아왔을 때, 클레어의 머릿속에 그때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덕분에 그녀는 아버지가 가져온 늙은 남자와의 결혼을 거부할 수 있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그녀의 인생을 두 번이나 구했다. 지금은 사라진 미래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현재에서 한 번.
“휴식!”
휴식을 외치는 카슨 경의 목소리에 클레어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간식 시간인지 린가르드 경을 비롯한 몇몇 견습 기사들이 바구니를 들고 훈련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어차피 클레어에게는 나눠 주지 않을 것이다. 흰 사자 기사단의 기사들은 견습 기사들이 클레어에게 물 한 모금조차 나눠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샌드위치를 집으려 하면 누군가가 세게 그녀의 몸을 밀어 버리고 그녀가 집으려던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으며 비열하게 웃곤 했다.
기사들이란 원래 이 모양이었지. 클레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려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개인 옷장에도 손을 대기 때문에 어지간한 물건을 다 지니고 있다. 약간의 돈과 마실 물 정도지만.
“이봐.”
혼자서 물이라도 마시고 싶어서 향한 건물 뒤에는 올리버가 있었다. 건물을 돌자마자 나타난 커다란 형체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자, 클레어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들었다.
“오, 유제니보다 낫네.”
재빨리 두 손을 들어 방어하려던 올리버는 클레어가 마지막 순간 그를 알아보고 주먹을 멈추자 가볍게 감탄해서 말했다.
유제니였다면 반사적으로 휘둘렀을 거다. 그리고 다른 데라면 상관없지만, 코를 맞았다면 좀 아프겠지.
하지만 유제니는 작은 편이고 올리버는 스무 살 이후로 유제니에게 목 위로 맞은 적이 없었다.
“뭐야?”
자신을 기다린 듯한 태도에 클레어가 경계하며 물었다. 비열하게 숨어 있다가 때리려는 거라면 이미 시도한 멍청이들처럼 한동안 집 안에 처박혀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올리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냈다.
“뭘 하는….”
무기 같은 걸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 저 주머니에 의외로 괜찮은 무기를 숨길 수 있다는 걸 클레어는 이미 알고 있다. 남자 손바닥만 한 단검 같은 거.
“자.”
올리버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헝겊 뭉치였다. 적어도 클레어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올리버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