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0/239)

105화. 21 – 6

갑작스러운 줄리아의 등장에 에리카는 물론 유제니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제니는 금세 줄리아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 대화를 엿들으면 안 된다고 했지.”

유제니의 지적에도 줄리아는 당당했다. 지금 그녀의 행동이 올바르나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로고소 양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터너 경이 그녀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도 봤다.

“당장 파혼해요. 그런 쓰….”

“줄리아.”

줄리아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유제니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말조심해야지. 줄리아가 쳐다보자 유제니는 입 모양만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며 에리카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로고소 양. 이쪽은 제 친척이자 친동생처럼 여기는 줄리아 에스컬레예요. 지금은 친동생처럼 여기고 싶지 않지만요.”

마지막 유제니의 덧붙임에 줄리아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유제니가 그렇게 말해도 그녀를 아낀다는 걸 안다.

줄리아는 재빨리 에리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한 뒤 유제니의 옆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파혼해요.”

“줄리아.”

다시 유제니가 줄리아에게 주의를 던졌다. 큰언니와 막냇동생 같은 태도에 에리카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금세 그 웃음소리는 흐느낌으로 변했다.

그녀와 이멜다도 그랬다. 그녀는 줄리아보다 좀 더 조심성이 있긴 했지만.

“죄, 죄송해요.”

한참을 흐느끼던 에리카는 간신히 그렇게 내뱉고 숨을 골랐다. 언니가 그리웠다. 가끔은 답답하고 짜증 났지만, 그것조차도 그리웠다.

“언니가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유제니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에리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도 그럴 것이다. 올리버가 다치거나 쓰러진다면, 그래서 의식이 없다면 온종일 그의 옆에 앉아 그렇게 기도하겠지.

짜증 나고 가끔은 죽여 버리고 싶은 오라버니지만, 그래도 무사하길 원한다.

“왜 제프리와 파혼하고 싶어 하는지 물어봤죠?”

유제니에게 받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낸 에리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손에 쥔 손수건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언니가 그렇게 된 게 자업자득이라고 했거든요.”

“파혼해요!”

다시 줄리아가 소리쳤다. 그녀의 말에 오히려 에리카는 안심이 됐다. 나만 불쾌하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안도.

하지만 유제니는 달랐다.

“파혼하면 뭘 할 건데요?”

그건 생각 안 해 봤다. 에리카는 그냥 그 상황이 견딜 수가 없었을 뿐이다. 언니를 향한 제프리의 모욕적인 말들이. 그녀에게 그러는 건 괜찮다. 하지만 습격을 당해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까지 그러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뭘 하긴요? 일단 파혼부터 해야죠!”

“줄리아.”

유제니는 흥분한 줄리아의 무릎을 가볍게 건드리며 그녀에게 주의를 줬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우린 네가 여기 있는 걸 아직 허락하지 않았어.”

언제든지 내보낼 수 있다는 말에 줄리아의 입이 삐쭉였지만 조용해지긴 했다. 유제니는 줄리아의 차도 내와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이민 하인에게 고개를 저은 뒤 에리카에게 물었다.

“파혼하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요? 터너 경 외에 당신과 결혼할 사람이 있나요?”

모르겠다. 에리카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그녀에게 구혼자가 좀 있긴 했다. 하지만 제프리와 약혼한 뒤에도 교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혼 과정에서 친구가 되어 다른 사람과 약혼하고도 친분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제프리가 용납하지 않았고 에리카는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만약 당신과 결혼할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유제니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건 줄리아와 에리카에게 가혹하게 들렸다.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굳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 줄리아는 유제니에게 몸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터너 경이 로고소 양의 언니를 모욕한 거잖아요.”

“아니지, 줄리아.”

유제니는 냉정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다시 에리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로고소 양이 어떻게 사느냐야. 가족의 명예를 위해 파혼하는 것도 좋지. 하지만 명예가 밥 먹여 주진 않아.”

로고소 가문은 평생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먹고살 만큼 여유 있지 않다. 남자라면 본가에서 뭐라도 시켜서 먹고살 수 있게 해 주겠지만 에리카는 여자다. 일을 시킬 리 없는 것이다.

“운이 나쁘면 로고소 남작가에서 나이 많은 남자의 후처로 보낼 수도 있어. 그 남자가 터너 경보다 낫다는 보장은 없고.”

냉정한 유제니의 판단에 줄리아는 입을 딱 벌렸다. 그건 에리카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유제니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했다.

그럴 것이다. 혼기를 놓친 귀족 여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산다.

“운이 더 나쁘면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할 수도 있지.”

이어진 유제니의 말에 에리카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집안이 부유하다면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조용하지만, 여유 있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집이라면 들어가서 노동을 해야 한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노동을 하지 않고 사는 여자들은 집안에서 그녀를 보살펴 주는 대신 꽤 많은 기부금을 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온종일 수도사의 옷을 바느질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에리카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럴 각오로 파혼을 생각한 건가요?”

유제니의 질문에 에리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반대로 물었다.

“당신은요? 그럴 각오로 렌시드 경과 파혼한 건가요?”

“네.”

유제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럴 각오였다. 수도원에서 어떤 노동을 할지도 생각해 놓았다. 그녀의 글씨체는 단정하고 예쁘니까 필사를 할 수도 있겠지.

바느질은 못하지만 밭을 일구는 건 할 수 있다. 요리는 못하지만 다듬는 거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유제니는 수도원에 가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은 번즈 백작이 구혼 중이잖아요.”

다시 에리카의 반박이 이어졌다. 유제니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운이 좋았죠. 나는 운이 좋았어요.”

이건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엘리엇이 그녀에게 구혼하는 건, 그리고 그걸 본 다른 남자 둘도 그녀에게 구혼하는 건 운이 좋은 거다. 그녀의 능력 밖의 일이니까.

그래서 유제니는 자신의 인생을 운에 맡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어닝 같은 남자를 만난다면, 그런 남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거침없이 파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다면 로고소 양, 당신도 운이 좋을까요?”

그녀가 운이 좋았기 때문에 더더욱 에리카에게 줄리아처럼 파혼하라고 할 수가 없다.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걸 아니까.

“그럼 그냥 참아요? 터너 경이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데요?”

이어진 줄리아의 질문에 유제니는 다시 그녀를 응시했다. 한 번만 더 끼어들면 쫓아낼 거라는 무언의 경고에 줄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로고소 양, 내가 당신의 파혼을 응원하고 당신이 운이 나쁠 때 옆에서 위로해 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진 않을 거예요.”

로고소 가는 그리 부유하지 않다. 본가는 좀 다르지만, 에리카는 방계고 그렇기 때문에 이멜다는 커널 남작과 결혼했다.

결혼 전부터 안 좋은 소문이 있었지만 어쨌든 부유했으니까. 동생과 아버지를 돌봐 줄 수 있고 젊은 남자였다. 이멜다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책임감 없이 당신에게 파혼하라고 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을 다른 더 좋은 남자와 결혼하게 해 줄 능력이 없으니까요.”

담담한 유제니의 말은 잔인했지만, 에리카는 납득했다. 그녀가 파혼하고 어떻게 살지 준비돼 있다면 유제니는 얼마든지 그녀를 응원해 줄 것이다.

하지만 준비돼 있지 않다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럼 그냥 터너 경과 결혼해야 하는 거예요? 그 끔찍한 놈과?”

“줄리아.”

다시 참다못한 줄리아가 끼어들었다. 유제니는 그녀에게 당장 응접실에서 나가라고 말하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줄리아를 설득하기 위해 말했다.

“네 속이 시원하자고 파혼을 응원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럼 유제니는 로고소 양이 터너 경과 결혼하길 바라는 거예요?”

다시 유제니의 시선이 에리카를 향했다. 파혼을 응원하지 않는다고 터너 경과의 결혼을 응원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그건 로고소 양의 인생이니까. 나는 당신의 선택을 응원할 거예요. 어떤 선택을 하라고 응원하는 게 아니라.”

앞말은 줄리아에게, 뒷말은 에리카에게 하는 말이었다. 에리카는 가만히 유제니를 보다가 물었다.

“내가 언니를 배신하고 제프리와 결혼해도요?”

“난 그걸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멜다는 의식 불명이고 커널 남작은 수많은 정부를 두고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커널 남작이 부인의 치료를 거부한 경우, 에리카가 터너 자작 부인이라면 할 수 있는 게 있다.

하지만 그냥 로고소 양이라면 좀 힘들어지겠지.

“터너 경이 치료비를 줄 리가 없어요.”

줄리아가 말했다. 유제니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돈이 있다 해도 이멜다가 커널 남작 부인인 이상 커널 남작이 치료를 거부하면 에리카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녀는 에리카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터너 자작가의 이름으로 커널 남작을 압박할 수는 있죠.”

부인을 치료하라고 압박할 수 있다. 유제니는 그걸 에리카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시간을 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반대로 당신이 파혼한다면, 커널 남작 부인의 동생으로서 커널 저택에 머물면서 이멜다를 돌봐줄 수도 있죠.”

선택은 에리카의 몫이다. 그녀의 인생이니까.

유제니는 자신뿐 아니라 누구도 에리카가 어느 쪽을 택하든 비난할 생각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까스로 입을 연 에리카는 목이 메서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올 때보다 좀 더 또렷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파혼할 각오를 하고 다시 연락한다면 나와 같이 제프리에게 가 줄 수 있나요?”

“각오했다면요.”

“그럼, 내가 제프리와 결혼하면 결혼식에 와 줄 거예요?”

“초대한다면요.”

에리카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그녀는 좀 더 생각해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인생이다. 좀 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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