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21 – 5
사랑 고백치고는 너무나 관대한 태도에 유제니는 그만 당황해 버렸다. 그녀는 멍하니 엘리엇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당신이 날 사랑하는 마음보다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자 엘리엇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씩 웃었다. 아차. 유제니는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요. 언젠가는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니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엘리엇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 해도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지는 못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다. 엘리엇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주제를 바꿨다.
“어쨌든 일 년이라는 시간이 좀 특이하긴 하군요.”
다행이다. 엘리엇의 말에 뭐라 반박해야 할지 몰랐던 유제니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일 년일까. 단순히 생각하면 정부라는 게 처음엔 다 그렇게 기간제 계약인지도 모른다.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시 그녀의 머릿속은 커널 남작 부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배에 와서 하소연을 하던 로고소 양에게 이어졌다.
언니 때문에 파혼당할까 봐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언니가 사고를 당했으니 지금 기분이 말이 아니겠지. 로고소 양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지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유제니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모른 척해 주는 것뿐이다.
* * *
“그러게, 행동을 조심했어야지.”
의기소침해져 있는 에리카 앞에서 제프리가 말했다. 뭐라고? 그의 말에 에리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제프리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정부를 만들다니.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습격을 당해 의식 불명인 사람을 비난하다니. 에리카는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제프리, 그래도 제 언니예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당신은 앞으로 터너 자작 부인이 될 사람이잖아. 우리 터너 자작가의 명예는 당신뿐 아니라 당신 가족들의 행동거지에도 걸려 있다고.”
가문의 명예를 들먹이자 에리카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맞다. 제프리는 터너 자작이 될 사람이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그의 가문에 누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에리카의 마음은 불편했다. 그녀도 자신의 언니가 하는 행동이 모두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특히나 최근 몇 달간은 불만투성이였다. 정부를 두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너무 소란스럽게 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당하길 바란 건 아니다.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 설령 그게 누구라 해도 에리카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당신도 행동 조심해, 에리카.”
차를 한 모금 마신 제프리가 나지막하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행동을 잘못한 적이 없다. 욱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에리카의 입이 열렸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배 말야. 거기 갔잖아.”
배라고? 에리카는 처음에는 제프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그가 ‘그 배’를 말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게 어때서요?”
“몰라서 묻는 거야?”
답답하네. 제프리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감히 그런 곳에 다녀와 놓고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다니.
“내가 말했지. 그런 수준 낮은 곳에 다니지 말라고.”
“수준 낮다뇨? 거긴 레이디 비스컨의 살롱이에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데요.”
그런트 양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데번 백작 부인도 다녀갔다고 들었다. 말이 수영장이지 살롱이라는 말이 딱 맞는다. 수영을 하지 않아도 방문해서 거기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니까.
하지만 제프리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잖아. 그게 결국 수준이 떨어진다는 증거라고.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수준 떨어지는 이야기나 하겠지!”
그렇지 않다. 그런트 양은 이번에 도움이 필요한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레이디 비스컨이 배에서 모금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핸더슨 후작 부인도 찾아와서 아들이 행방불명된 거마로트 공작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에리카는 그런 이야기를 해 봤자 제프리에게는 수준 낮은 이야기로 들릴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제프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 곳에 다니지 말란 말야. 다른 조신한 부인들처럼 집 안에서 자수 놓고 하라고.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결국, 에리카는 알겠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괜히 반박했다간 흥분한 제프리가 이 테이블을 더 세게 칠 테니까. 그러면 사람들의 시선이 모일 테고 제프리는 그걸로 또 에리카에게 화를 낼 것이다.
그녀가 멍청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가십에 오르게 생겼다고 말이다.
에리카는 그날 오후 내내 제프리와의 일을 생각했다. 내가 문제인 걸까. 제프리의 말대로 그녀가 너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말대로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 떠는 건지도 모르고.
모르겠다. 이럴 때면 그녀는 이멜다와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녀의 언니는 제프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동의해 주었었다.
하지만 이멜다는 요 몇 달간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고 급기야는 괴한의 습격을 받아 의식 불명이다. 이멜다를 떠올리자 에리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그런 걸까. 문득 에리카는 항상 자신만 이멜다에게 고민 상담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멜다도 힘들었을 텐데 그녀 앞에서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 말대로 정말 더 이상 참기 어려웠던 걸까. 에리카는 이멜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어 편지지를 한 장 꺼냈다.
* * *
“로고소 양.”
레이디 비스컨이 들어오자 에리카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간 창백한 피부색과 왜소한 체격 탓인지 레이디 비스컨을 처음 보는 사람은 그녀가 아프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그녀는 원래 이렇다. 그녀의 오라버니인 비스컨 남작과 비교하면 남매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물론 안 닮은 거로 치면 이멜다와 에리카도 안 닮긴 했지만.
“오는데 덥진 않았어요?”
약혼 건으로 물어보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음에도 유제니는 예의 바르게 날씨와 로고소 가문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이런 별것 아닌 대화는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 주기 마련이다. 로고소 가문 사람들의 안부는 자연스럽게 이멜다까지 이어졌다. 유제니는 잠시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분은 어때요? 차도가 있나요?”
커널 남작 부인이 아니라 언니라는 호칭에 에리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눈두덩이를 찍어 눌렀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 아직이요.”
“곧 일어날 거예요.”
다정한 유제니의 위로에도 에리카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꼭 쥔 채 그대로 물었다.
“파, 파혼은 어떻게 하나요?”
뭐라고?
막 찻잔을 들어 올리던 유제니의 행동이 그대로 멈췄다. 눈이 동그래진 채 에리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파악하려는 그녀 앞에서 에리카가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레이디 비스컨께서는 렌시드 경과 파혼하셨잖아요? 어떻게 하셨어요? 파혼하겠다는 다짐은 어떻게….”
거기까지 말한 에리카의 표정이 확 굳었다. 너무 흥분한 탓에 실수했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어,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괜찮다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유제니는 가까스로 참아 냈다. 괜찮지 않으니까. 타인의 파혼을 이렇게 캐묻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하지만 에리카의 필사적인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엘리엇에게 들었던 커널 남작 부인의 이상한 제안도.
유제니는 그대로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왜 파혼하려 하는 걸까. 전에 언니의 행실 때문에 파혼당할까 봐 두려워한다고 들었는데.
“지금 묻는 게 로고소 양이 파혼을 하는 쪽인 거죠? 당하는 쪽이 아니고요?”
혹시나 싶어서 확인했는데 에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파혼하고 싶어 한다는 말이다. 어째서일까. 유제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파혼을 생각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 질문에 에리카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제프리의 행동은 다 그녀를 위한 거였다. 그녀가 터너 가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이멜다를 비난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동생이 있는데 정부를 만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는 건 정숙한 행동이 아니다.
제프리가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니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벌써 파혼당했을 거다.
“이, 이상하죠?”
에리카는 찻잔을 손안에 감싼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제프리가 안다면 화를 낼 거다. 고마움도 모르는, 제 언니와 똑같은 이기적인 여자라고.
언니처럼 괴한에게 습격당해도 싸다는 호통을 칠 게 귀에 선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로고소 양.”
그때, 유제니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에리카의 지친 표정을 본 유제니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도 어닝과 약혼했을 때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이 결혼을 하는 게 맞는 걸까. 내가 잘 선택한 걸까.
그 생각은 어닝이 이상해지기 전에도 가끔씩 들곤 했다. 그때는 딱히 어닝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걸 지금은 안다.
“파혼하고 싶은 이유가 있나요?”
유제니는 다시 물었다. 어닝이 이상해지기 전에 그녀가 파혼하고 싶었던 이유는 어닝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선택에 자신이 없었을 뿐이지.
에리카도 그런 거라면 유제니는 에리카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에리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이상하죠? 제프리는 절 위해 하는 말인데, 전 그게 숨이 막혀요.”
숨이 막힌다고? 유제니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그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고 줄리아가 들어오며 소리쳤다.
“당연하죠! 그렇게 못된 말만 골라서 하는데!”
“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