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21 – 4
“어머, 세상에.”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신문을 읽던 비스컨 백작 부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지? 올리버와 유제니는 자신이 보고 있던 신문을 확인했다.
이 집에 오는 커런트의 속삭임은 두 부. 올리버와 유제니가 한 부씩 읽고 있으니 두 사람의 어머니가 읽는 건 다른 신문이다.
“그거 발시안 일보예요?”
비스컨 백작 부인이 보는 신문을 확인한 올리버가 물었다. 물론 비스컨 저택에서는 발시안 일보도 본다.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읽는 게 커런트의 속삭임일 뿐이다.
“커널 남작 부인 말이야.”
아들의 어리둥절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작 부인은 자신이 할 말을 꺼냈다. 그녀는 신문에서 시선을 떼고 두 자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제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는구나.”
“괴한이요?”
놀란 유제니가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곧바로 올리버를 향했다.
“라이언 경도 괴한에게 습격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방문할 수 없다고 편지를 보냈었다. 유제니는 쾌유를 빈다는 답장을 적어 보냈고.
올리버는 괴한이 아니라 그냥 취객이었다고 알려 줄까 하다가 말았다. 테드는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부딪친 거다. 상대방은 덩치가 좋은 취객이었고.
상대방의 덩치가 크고 취했다는 사실에 겁을 먹은 테드가 항의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래 놓고 민망하니 유제니에게는 괴한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둘러댄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겠지.”
올리버는 친구의 명예를 위해 그렇게 둘러대 주었다. 하지만 그건 유제니에게는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당신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어요.”
그날 오후, 구혼자로서 당당하게 비스컨 저택을 찾은 엘리엇과 차를 마시며 유제니가 당부했다. 여유로운 태도로 차를 마시던 엘리엇은 그녀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할지, 라이언 경의 거짓말을 비웃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물었다.
“보통 절 걱정하실 게 아니라 본인을 걱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를요? 왜요?”
유제니는 진심으로 자신을 왜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지만, 저보다는 당신이 더 위험하니까요.”
무슨 소린지 알겠다.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약하다는 말이라면 맞겠지만요. 이건 위험도의 문제잖아요.”
“위험도의 문제요?”
“나는 위험한 장소나 위험한 사람을 만날 일이 없는걸요.”
유제니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다. 집과 배.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집.
하지만 엘리엇은 다르다. 그는 신흥 귀족이고 사업을 하고 있다. 유제니는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과 위험한 장소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하고 물었다.
“하지만 커널 남작 부인도 당신처럼 위험한 장소나 위험한 사람을 만날 일이 없을 텐데요.”
그렇지 않다. 유제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덕분에 그녀의 뺨 주변으로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엘리엇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감상했다.
오후의 뜨거운 햇빛이 하얀 커튼에 반쯤 투과해 응접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안에서 유제니는 그녀가 좋아하는 녹색 드레스를 입고 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엘리엇은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 그녀가 긴 금발을 늘어트리고 간소한 드레스만 입은 채 거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게. 혼자 있었다면 신발을 벗고 있었겠지.
“커널 남작 부인에겐 정부가 있잖아요.”
그런데요? 엘리엇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기울였고 유제니는 차를 홀짝인 뒤 덧붙였다.
“정부를 집 안으로 불러들일 수 없었을 테니 밖에서 만났겠죠.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 없는 거리나 가게로 갔을 테고요.”
그럴듯한 가정이라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바로 떠오른 생각에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만, 커널 남작 부인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정부를 만났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부를 만나는데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니. 유제니는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귀족 사이에 정부를 두는 풍습이 만연하다 해도 정부의 존재는 사람들 앞에 그렇게 드러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에 커널 남작 부인이 저를 찾아온 적이 있잖습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던 엘리엇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 생각해서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유제니 역시 그랬다. 그녀는 엘리엇의 말에 눈썹을 모았다. 언제 찾아왔느냐는 표정에 엘리엇이 다시 설명했다.
“제게 부도덕한 제안을 했을 때 말입니다.”
“부도덕? 오.”
다행히 유제니는 커널 남작 부인이 엘리엇에게 어떤 제안을 했는지 곧바로 기억해냈다. 자신의 정부가 되어 달라고 청했다고 했지.
엘리엇은 잘생겼고 젊다. 아마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잘생길 거라고 생각하며 유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나서 물었다.
“잠깐, 커널 남작 부인과 친분이 있었어요?”
“그날 처음 만났습니다.”
“허.”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정부를 제안했다는 말이다. 들은 것보다 더 커널 남작 부인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유제니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런 걸 제안했는지는 말하던가요?”
그녀의 질문에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누군가의 정부 제안을 받기엔 부족해 보이십니까?”
뭐라고? 유제니는 자신의 질문이 그렇게 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물론, 당신은 아주 멋져요. 잘생겼고. 누구라도 당신과 만나고 싶어 할 거예요.”
“농담입니다.”
이 자식이 진짜.
유제니의 얼굴이 당혹과 분노로 붉어졌다. 하지만 엘리엇은 즐거웠다. 그녀가 자신을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물론 엘리엇은 자신이 잘생겼다는 걸 안다. 자신이 가진 게 많다는 것도 알았다. 재산, 능력, 외모. 무엇 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
그러나 그에게 이 모든 것은 오직 단 하나. 유제니의 사랑을 받기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잘생겼다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유제니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저를 그렇게 좋게 판단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엘리엇의 감사에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성격은 별로 안 좋지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여기서 엘리엇의 성격까지 좋다면 신에 대한 모독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굳이 이렇게 완벽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자기 곁에 두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으니까.
“전 제 성격이 꽤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물론 그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엘리엇에게 중요한 건 오직 유제니뿐이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는지. 그것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좋아요, 엘리엇 번즈 백작.”
유제니의 입에서 그의 풀 네임이 나오자 엘리엇은 재빨리 자세를 고쳤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주제를 바꿨다.
“당신은 누구의 정부도 애인도 남편도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 제안하는 건 그 사람의 인성이 의심스럽거든요.”
그리고 유제니는 커널 남작 부인에 대한 소문을 좀 들었다. 요즘 이상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남편의 바람으로 비롯한 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유제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다. 커널 남작이 정부와 함께 있는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다음 날 가십지에 실리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면 그 기사 봤냐고 떠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럴 때 커널 남작 부인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유제니는 그녀가 가여웠다. 그녀는 무엇도 잘못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데, 비난받거나 동정을 받았으니까.
“그때도 그녀가 저를 이용하려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엇의 지적에 유제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의 대화가 기억난다. 그때도 지금 커널 남작부인의 정부가 누군지는 몰라도 엘리엇이 더 잘생겼을 거라고 말했었다.
“맞아요. 커널 남작에게 복수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라면….”
거기까지 말한 유제니는 말을 멈췄다. 화난 커널 남작이 칼을 들고 쫓아와서 이길 것 같다고 말하는 건 좀 무례하게 들린다.
하지만 다행히 엘리엇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약간 느긋하게 기대며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한 제안이기는 하더군요.”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한 제안이었다.
“딱 일 년만 자신의 정부가 되어 달라고 했거든요.”
“일 년이요? 보통 그렇게 기간을 정하나요?”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왜 그러지?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엘리엇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 받아 보는 제안이라.”
“오, 미안해요.”
또 실수했다. 재빨리 사과한 유제니는 자신의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덧붙였다.
“주변에서 혹시 들은 게 있나 해서요.”
남자들은 정부를 두면 자기들끼리 자랑한다고 들었다. 실제로 클럽에서 공공연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때때로 사정이 안 좋아진 친구의 부탁으로 그의 정부를 자신의 정부로 삼는 사람도 있고.
그걸 우정이라고 부른다지? 엘리엇의 얼굴에 잠시 경멸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유제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전 그런 게 싫거든요.”
“그런 거요?”
“서로에게 충실하지 않은 부부요. 저는 제 배우자가 저를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뜻밖의 고백에 유제니의 행동이 멈췄다. 그녀가 어닝에게 한 말이다.
그는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단순히 결혼하는 게 아니라 유제니의 마음을 얻고 싶다고 했다.
유제니는 가만히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은요? 당신도 배우자를 사랑할 건가요?”
당연한 질문에 멈칫한 엘리엇의 얼굴에 곧바로 실수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유제니를 향해 몸을 내밀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무슨 말실수를 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유제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이 저를 사랑하길 바랍니다. 제가 사랑하는 만큼이 아니어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