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97/239)

102화. 21 – 3

“터너 가에서는 뭐래요?”

리사의 질문에 에리카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결혼을 좀 미루재요. 올해 말에 하기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에리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귀족과 결혼하고 싶었다. 그녀는 항상 로고소 남작 부인인 큰어머니가 부러웠다. 에리카의 어머니인 로고소 부인이 늘 큰어머니와 자신을 비교하며 한탄했기 때문이다.

똑같이 파티를 열어도 로고소 남작 부인이 여는 파티와 로고소 부인이 여는 파티는 참석 명단이 다르다. 파티에 참석하는 건 즐기기 위해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맥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여는 파티일수록, 영향력 있는 사람이 참석한다고 알려진 파티일수록 참석자의 수가 늘어난다.

“이해가 안 돼요. 언니는 남작 부인이잖아요. 좀 참으면 안 됐던 걸까요?”

이어진 에리카의 울먹이는 말에 유제니는 말을 잃었다. 그녀는 커널 남작 부인이 지금까지 참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리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에리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도 안다. 언니가 남작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제 말은, 제가 결혼한 다음에 애인을 만들었어도 되는 거잖아요. 아니면 하다못해 소문이라도 내질 말든가.”

소문을 냈다고? 소문이 난 게 아니라? 유제니와 리사의 머릿속에 같은 의문이 들었다. 더 끈기가 없었던 건 리사였다. 그녀는 에리카를 향해 몸을 내밀며 물었다.

“소문을 냈다고요?”

“네! 그거 언니가 낸 소문이에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냥 정부를 만든 게 아니라 정부를 만들었다고 소문까지 냈다는 말이다. 많은 귀족이 정부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정부를 가지는 것과 가졌다고 소문을 내는 건 다른 문제다.

다시 리사와 유제니의 시선이 부딪쳤다. 대체 무슨 일일까? 두 사람은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며 힘없이 일어나는 에리카를 배웅해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와요. 수영 안 해도 상관없으니까요.”

유제니의 말에 에리카는 힘없는 미소를 지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준 리사는 마차가 멀어지자 유제니에게 말했다.

“복수심일까요?”

“커널 남작 부인이요?”

남작의 바람기를 몇 년 동안이나 견뎌 줬다. 그러니 너도 어디 한번 당해 보라는 심산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로고소 가문은 가문만으로 보면 커널 가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멜다와 에리카의 아버지는 작위가 없는 방계로 부유한 것도 로고소 가문이 부유한 거지 에리카의 아버지가 부유한 게 아니다. 귀족인 것도 아버지까지지 그 딸인 에리카와 이멜다는 그냥 로고소 양일 뿐이다.

그에 비해 커널 가는 상당히 부유한 데다가 이멜다의 남편은 커널 남작이다. 즉, 이멜다가 낳은 아이가 장래의 커널 남작이 된다는 말이다.

아들을 낳는다면 말이지만.

유제니는 에리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귀족 부인이 결혼하고 반드시 후계자를 낳으려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가 공고해질 뿐만 아니라 괜한 소문에 시달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멜다는 반대를 선택했다. 그게 과연 복수심 때문일까.

“사람은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진다니까요.”

유제니의 말에 리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도 지난번에 약혼자의 무례한 행동 때문에 화가 나서 혼났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그녀의 얼굴을 못 볼 줄 알라고 말했을 정도다.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유제니는 리사와 함께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

* * *

“비스컨 남작?”

스콧 무어는 연습장 근처를 서성이는 올리버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이 녀석이 여긴 또 무슨 일이지?

가끔 기사를 선망하는 아이들이 이 근처를 서성이긴 한다. 하지만 훈련이란 지난한 법이다. 대부분 한두 번 구경하면 잘 안 온다. 그러니까 올리버가 연습장 근처를 서성이는 게 이번이 세 번째라는 말이다.

“갑자기 기사가 되고 싶기라도 했어?”

스콧은 올리버의 곁에 서서 그렇게 이죽댔다. 올리버는 검은 늑대 기사단장에게 검을 배웠다고 들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에스컬레 경이 친척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스콧은 그게 무척이나 부러웠다. 재능도 없는 놈이 에스컬레 경 같은 천재에게 검을 배우다니. 그가 에스컬레 경에게 어렸을 때 검을 배웠다면 지금쯤 검은 늑대 기사단에 들어가 있었을 거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스콧의 생각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흰 사자 기사단장인 에스마 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는 무슨.”

올리버는 스콧의 말에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는 기사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어릴 때는 아주 잠깐 기사가 되고 싶긴 했다. 모든 귀족가의 남자애들이 꿈꾸는 게 그거 아니던가.

기사가 되는 거. 그리고 기사단장이 되는 거.

심지어 올리버는 나라 최고의 실력자라는 검은 늑대 기사단장인 에스컬레 경의 친척이니 더 그랬다. 그리고 그 꿈은 에스컬레 경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한 날 박살이 났다.

난 절대 기사 같은 거 안 될 거야. 체력 단련부터 해야 한다며 공원을 다섯 바퀴 정도 달린 뒤 올리버는 구역질을 하며 그렇게 다짐했다. 기사단 근처도 가지 않을 거다. 그렇게 다짐했음에도 그는 지금 기사단 연습장을 서성이고 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야.”

올리버의 말에 스콧은 코웃음을 쳤다. 여기는 왕궁에서도 좀 안쪽에 있다. 여길 지나가려면 건물을 꽤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성의 있게 하지 그래.”

“거짓말이라니. 진짜로 지나가는 길이야. 여기만큼 조용한 길이 어디 있어? 생각하기 딱 좋다고.”

유제니가 들었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라버니가 생각을 한다고?’라고 외쳤을 테지만 여기 있는 건 스콧뿐이다. 스콧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길 생각하면서 걷는다고?”

“이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하면서 걷고 있었지.”

무슨 헛소리야, 이 녀석. 스콧의 얼굴에도 유제니와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날 뭘로 보는 거야? 올리버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스콧은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다.

“참, 이번에 스나이더 저택에 올 거야?”

올리버 역시 스콧과 마찬가지로 스나이더 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초대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비스컨 사람 모두 초대를 받았다.

올리버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

“왜? 스나이더 영애가 너한테 푹 빠져 있잖아.”

올리버가 신경 쓰이는 주제가 나왔다. 그는 멈칫했지만 금세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푹 빠진 아가씨가 어디 한둘이던가?”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올리버 비스컨 남작. 번즈 백작이 부상하기 전까지는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미남이었다. 비스컨 가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올리버는 다섯 살쯤에 이미 약혼을 했을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론 반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 여유 있지 않은 집안임에도 저 얼굴 하나만으로 아직도 콧대를 세우고 있는데 돈까지 많았으면 더 약혼을 안 했을 거라는 거다.

스콧은 어쩌면 후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럼 갈 거지?”

“어, 음. 뭐.”

올리버가 애매하게 대답했을 때였다. 그의 시선에 건물 쪽에서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나오는 견습 기사가 보였다.

왔다. 자연스럽게 올리버의 시선이 한쪽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클레어에게 향했다. 중간 휴식 시간이었나 보다. 훈련하던 기사들이 모두 행동을 멈추고 견습 기사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대로 있었다.

“간식 드세요!”

견습 기사가 떨어져 있는 다른 기사들에게 알리기 위해 외쳤지만, 클레어는 마치 듣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묵묵히 훈련에 매진하는 것을 본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무어 경.”

동료에게 자기 몫의 간식을 챙겨 달라고 소리치던 스콧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간식은 커다란 햄을 끼운 빵이다. 적당히 올리버를 보내고 어서 가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스콧을 지배했다.

“왜? 불렀으면 말을 해.”

스콧이 가볍게 짜증을 냈지만, 올리버는 끝까지 클레어를 확인했다. 안 먹는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기사단의 시간표는 상당히 철저해서 지난번에 올리버가 왔을 때도 휴식 시간이었다.

그때 나온 간식은 튀긴 닭이었다. 간식으로 튀긴 닭이라니, 너무 무겁지 않냐고 비스컨 백작 부인이 기겁할 테지만 기사단에서는 꽤 흔한 간식이다. 근무에 훈련까지 이 정도는 먹어 줘야 하는 거다.

하지만 그때도 클레어는 먹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견습 기사도 그녀에게 먹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에게는 다 권했는데.

“라, 아니, 저 사람 말야.”

라넌 경이라고 말하려던 올리버는 스콧의 눈치를 살피고 말을 바꿨다. 그는 스콧이 클레어를 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간식을 안 먹네?”

“뭐? 뭐야, 비스컨. 별걸 다 보네?”

스콧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그걸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여기까지 와서 구경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는 뭐라고 둘러댈지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저 여자가 여기 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건 안다. 올리버는 너도 그렇지 않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너보다도 더?”

올리버의 질문에 스콧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 그보다 더 싫어하는 녀석들이 있다.

“나는 신사거든.”

“웃기고 있네.”

말도 안 된다는 듯 올리버가 비웃었지만, 스콧은 화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카드 게임을 한다. 게임판에서도 신사다울 수는 없는 법이다.

“뭐, 난 혼자 싫어하고 마는 정도지만 적극적으로 저 여자를 여기서 내보내려는 사람들이 있다고만 이야기하지.”

“적극적으로? 내쫓을 순 없을 텐데?”

문제를 일으켜서 쫓겨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어지간한 정도로는 쫓겨나지 않는다. 범죄 정도는 저질러야 한다.

그리고 올리버는 라넌 경이 누가 시킨다고 범죄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쫓아낸다는 거지?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스콧이 혀를 차며 말했다.

“꼭 내쫓을 필요는 없지. 자기 발로 나가게 하면 되지.”

“자기 발로 나갈까?”

“나가야지. 여기서 얻을 게 전혀 없다는 걸 알면 나갈 거야.”

허. 올리버의 시선이 다시 클레어를 향했다. 어느새 그녀는 자리를 이탈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간식도 얻을 수 없다는 거네.”

“집에서 가져온 것도.”

스콧은 얼마 전 누군가가 라넌 경의 가방을 망가트린 것을 봤다. 그는 망가진 자신의 가방을 보고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라넌 경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독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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