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21 – 1
“수영복이 없으시면 지금 여기서 바로 구매하실 수도 있어요.”
위에서 로렌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나 보네. 나는 배 위에 올라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용하는지 설명하는 로렌의 모습이 그려져서 씩 웃었다.
“힘들진 않습니까?”
곧바로 내 앞에서 엘리엇이 물었다. 그는 평소와 똑같이 완벽한 차림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미있어요. 생각보다 내가 수영에 재능이 있나 봐요.”
처음 배우는 것 치고는 잘한다고 라넌 경이 그랬다. 그녀는 어릴 때 강가에 살아서 수영을 꽤 할 줄 알았고.
물놀이 때도 그래서 참석한 거라고 한다. 매년 이 시기면 물놀이를 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이 있으니까.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어서 참석해 있었다는 말에 나와 로렌, 줄리아는 박수를 쳤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좀 미안하네. 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올라와서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하고 싶은데….”
“괜찮습니다.”
엘리엇은 덤덤하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야 올라와서 차 한 잔 마시라고 하고 싶다. 저 위엔 차뿐만 아니라 간단한 디저트도 준비해 놨다. 견학하러 온 사람들에게 내놓기 위해서다.
하지만 엘리엇에게 올라오라고 하지 못하는 건 배 위가 금남의 구역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마음 편하게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남자의 출입을 막았다. 그건 배 주인인 엘리엇에게도 똑같았고 그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유제니.”
그때, 우리 앞에 마차가 멈추더니 낯익은 남녀가 내렸다. 리사와 그녀의 약혼자인 오웬 경이었다. 그녀도 내게 잠깐 들르겠다고 편지를 보냈었다.
“어서 와요, 리사.”
나는 재빨리 리사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라. 바쁠 텐데 일부러 얼굴을 내밀어 준 거다. 이건 파티가 아니지만 리사처럼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와 주면 그것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관심을 받는 게 내 목표였다. 그래야 호기심에라도 보러 오는 사람이 늘어날 테니까. 보러 오는 사람이 많을수록 수영을 배우는 사람도 늘어날 거다.
“레이디 비스컨.”
곧이어 오웬 경도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 두 사람은 아직 엘리엇과 인사를 나눈 적이 없던가? 나는 재빨리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엘리엇 번즈입니다.”
“압니다. 유명하신 분이죠.”
오웬 경은 엘리엇과 악수를 하며 싹싹하게 말했다. 그사이 나는 리사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리사는 나보다 조금 더 조용한 생활을 한 모양이다. 뭐, 이번 시즌에 나보다 더 파란만장한 생활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냐마는 말이지.
“유제니.”
그때, 엘리엇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리사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가 오웬 경이 출입구 쪽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들어가면 안 됩니까? 다리 아픈데.”
오웬 경은 입구에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남자분들은 들어올 수 없어요. 여긴 여성 전용이라서요.”
“왜요?”
응?
이어진 오웬 경의 질문에 나는 멈칫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리사를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려 엘리엇을 쳐다봤다. “왜요”라니, 뭐가 “왜요”라는지 모르겠다.
“왜 여성 전용이죠? 수영은 모두 할 수 있는 거잖습니까.”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그래서 여자분들도 수영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어요. 저 안에는 수영복을 입은 여자분들이 돌아다니고요.”
이 정도로 설명하면 알아듣고 물러나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오웬 경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저는 왜 못 들어가는 겁니까?”
오.
나는 반사적으로 리사를 쳐다봤다. ‘네 약혼자, 좀 멍청하구나?’라는 시선에 리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코너, 무슨 수영을 하겠다고 그래요?”
다행히 리사가 나서서 오웬 경을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웬 경은 오기가 들었는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상하잖아요. 왜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건데요? 우리 둘이 같이 수영하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 물어보는 겁니다.”
허어.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 둘이 수영하고 싶으면 집에 가서 욕조에 물 받아 놓고 하렴.
그때, 엘리엇이 불쑥 끼어들었다.
“귀족들은 남녀 관계에 좀 보수적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네?”
“응?”
나와 리사는 물론 오웬 경도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씩 웃으며 다시 말했다.
“두 분이 같이 수영하면 재미있겠다면서요. 벌써 상대방에게 그런 차림까지 다 보여 준 모양이죠?”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은 리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오웬 경이 당황해서 헛기침만 하자 나섰다.
“아니에요. 우린 그런 적 없어요.”
“그래요? 하지만 방금 오웬 경이 꼭 둘이 수영을 하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그건, 그냥, 코너. 말 좀 해 봐요!”
화가 난 리사의 호통에 오웬 경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아니, 난 그냥 저기에 들어가고 싶어서….”
“다른 여자들이 수영복 입고 돌아다니는 곳에 들어가고 싶었다고요? 허. 오웬 경, 그렇게 안 봤습니다만.”
어라?
말려야 하는지 망설이는데 엘리엇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이 남자, 일부러 이러는 거구나.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겠다. 나는 천연덕스러운 엘리엇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누가 보고 싶대? 여자들 수영복 차림이 뭐 대수라고? 그런 거 안 보고 싶어!”
정곡을 찔렸는지 오웬 경은 버럭버럭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부끄러워 죽고 싶다는 리사의 표정을 보고 재빨리 나섰다.
“리사, 잠깐만 들렀다가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후 일정이 있다면서요.”
“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냐고 되물으려던 리사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맞아요. 약속이 있는데 늦었네요. 미안해요, 유제니.”
“괜찮아요. 다음에 또 오면 되죠.”
‘다음에 또’라는 말에 리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음에 또 와도 되냐는 표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바로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마차로 다가가며 말했다.
“코너! 빨리 와요!”
“아니, 난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코너!”
마지막 부름은 꼭 어머니가 올리버를 부를 때 같다. 나는 마차에 탄 리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휴, 별일이 다 있네. 그래도 이번 일로 이 배에 꼭 필요한 게 뭔지 알았다. 나는 두 사람이 떠나자 엘리엇에게 몸을 돌려 인사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보다….”
엘리엇은 어딘지 모르게 서두르는 느낌이었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나?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을 곤란하게 하려고 말했을 뿐, 저 두 사람이 둘이서 뭘 하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응?
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엘리엇을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나도 당신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관심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고 비난했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다. 신사다운 태도에 미소가 나왔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걸로 부족했는지 뭔가를 더 말하려는 것처럼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그만 가 봐야겠다고 말했다.
“내가 오래 붙잡았군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저는 더 있고 싶지만 바쁘실 테니까요.”
내가 바쁘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아무리 로렌이 잘하고 있다고 해도 내가 가서 있어야 한다.
나는 그만 가겠다는 엘리엇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한 뒤 배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안의 분위기는 훨씬 좋았다.
다들 재미있다는 표정이라 내 기분도 훨씬 나아졌다. 내가 갑판으로 올라가자 견학하러 온 사람들에게 수영복을 입어 보라고 권하던 로렌이 내게 다가왔다.
“제가 오늘 수영복을 몇 벌이나 팔았는지 아세요?”
로렌의 얼굴은 흥분으로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뿌듯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표정에 나도 미소가 나왔다. 나는 웃으며 물었다.
“세 벌 다?”
수영복이 있다면 가져오라고 하긴 했다. 하지만 없는 사람이 경험해 보고 싶다고 한다면 입어 볼 수 있도록 세 벌 정도 만들어 왔다.
그 세 벌 전부 팔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당연하지만 사람마다 치수가 다르니 옷 한 벌이 다양한 사람에게 맞을 리가 없다. 우리가 준비해 온 수영복은 로렌의 체형에 맞춘 거고 로렌은 나보다 키가 큰 편이니까.
로렌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흥분을 감추려 애쓰며 말했다.
“열두 벌이요.”
뭐라고? 나는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그게 가능해? 우린 세 벌만 가져왔는데?
로렌은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긴 하지만 확인해야 한다.
나는 짐짓 진지하게 물었다.
“아홉 벌은 어디서 났어?”
“주문을 받았죠. 일주일 뒤에 여기서 다시 보기로 했어요.”
세상에.
어찌나 놀랐는지 나는 할 말을 잃고 로렌을 쳐다봤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말은 열두 명에게 수영복을 팔았을 뿐 아니라 아홉 명에게 일주일 뒤에 다시 수영을 배우러 오도록 설득했다는 말이다.
“로렌, 너 재능 있구나?”
“네?”
로렌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애, 체크무늬 천도 가방에 붙여서 싹 팔아 치웠다. 나는 로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람을 설득하는 데 재능이 있어. 대단하네.”
처음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