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4/239)

99화. 20 – 3

나는 엘리엇의 한쪽 어깨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품을 뒤졌다.

“괜찮아요?”

“괜찮습니까?”

우리는 동시에 서로에게 물었다. 내게는 하나도 튀지 않았다. 내 몸이 엘리엇의 몸에 가려졌으니까. 그는 내 몸에 물방울 하나 튀지 않은 것을 확인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 손수건을 받아 들며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잘해 준 게 아닙니다.”

정작 손수건을 받아 놓고도 엘리엇은 그걸로 물을 닦지 않았다. 빨리 닦아야 하지 않나? 오히려 안달 내는 내 앞에서 그는 느긋하게 손으로 물을 털어 내며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한 거죠.”

우리가 같은 주제를 두고 대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여전히 내 손수건이 그의 손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며 물었다.

“나한테 잘해 주는 게 좋아하는 일이에요?”

“그럼요. 당신이 기뻐하잖습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엘리엇은 양산을 흔들어 거기 묻은 흙탕물을 털어 내며 말을 이었다.

“전 그게 좋습니다.”

이 남자는 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좋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데 싫을 사람은 없지. 하지만 동시에 좀 무섭기도 했다.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고.

“죄송합니다. 양산은 새것으로 바꿔 드리죠.”

몇 번을 털어도 양산에 묻은 얼룩이 떨어져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엘리엇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흙탕물이니 당연하다.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나는 양산에 묻은 흙을 털어 내려 애쓰는 엘리엇의 손에 내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미친 사람이라는 생각을 취소한다는 건 아니다. 그때보다 아는 게 많아졌으니 궁금한 게 생겼을 뿐이다.

“꿈에서 우리는 연인이 아니라고 했고요.”

이어진 내 말에 엘리엇의 행동이 멈췄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는 질문이 담긴 행동에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쩔 거예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내가 그를 사랑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건 내 마음이다. 나는 끝까지 엘리엇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그가 좀 좋기는 하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게다가 지금처럼 이렇게 다정하고 귀여운 말을 하는데.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사랑은 다른 거다. 나는 어닝을 좋아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

그게 어려운 거다. 그리고 내가 순진했던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같이 살다 보면, 부부가 되면 언젠가는 서로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어닝은 아니었다. 그는 절대로, 죽어도 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러니 언젠가 남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내 바람을 우습게 생각했던 거겠지.

그게 내게 좀 상처가 되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 배우자를 구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었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지? 반대로,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다른 구혼자가 더 마음에 듭니까?”

엘리엇이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엘리엇은 구혼자 중에 자신이 가장 잘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남자가? 그의 저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얼굴이 좀 얄미워서 나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요.”

머릿속에 또 다른 두 명의 구혼자가 떠올랐다. 하지만 얼굴은 어슴푸레한 그림자에 가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떤 느낌이었는지만 떠올랐을 뿐이다.

잠깐, 이름이 뭐였지? 한 명이 라이언인 건 생각이 나는데 다른 한 명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구혼자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당신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엘리엇은 덤덤하게 말했다. 응? 그래? 내가 쳐다보자 그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이 행복한 거니까요.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저는 저 나름대로 당신이 행복할 방법을 찾겠죠.”

허.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약간 섭섭해졌다.

나는 그렇게 못 할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면 속상해서 방에 틀어박혀 있을 거다. 그리고 상대방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겠지.

엘리엇이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화냈으면 하는 마음과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탄하는 마음이 뒤섞였다. 나는 어느 쪽 마음을 따라야 할지 몰라서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살짝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어서 돌아가요. 옷은 내가 깨끗하게 만들어서 돌려주라고 할게요.”

슬쩍 보기엔 어깨만 좀 튄 것 같다. 그래도 날 지켜 주려다 더러워진 거니까 우리 집에서 세탁해서 돌려주는 편이 좋겠지.

우리는 그대로 걸어서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지나가는 마차를 타고 돌아가자고 했지만 엘리엇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흙탕물이 튄 옷과 양산을 들고도 그는 여유 있는 태도였다.

* * *

“비스컨 남작, 번즈 백작이 무슨 사업을 한다는 건지 혹시 알고 있어?”

다음 날, 올리버가 클럽에 도착하자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들이 그에게 몰려와 물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번즈 백작이 배로 무슨 사업을 한다는 기사가 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번즈 백작의 거대한 배는 강에 떠 있고 그걸로 그가 어떤 사업을 하려는 것 같다는 말이 있지만, 정확히 어떤 사업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는 기사였다.

물론 올리버도 그 기사를 읽었다. 집에서 가족들과 신문을 읽고 나온 참이었다.

“아, 그거….”

올리버는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향하자 씩 웃었다. 그리고 여유롭게 빈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무슨 사업인데?”

“어떤 거야?”

“투자자는 필요 없나?”

번즈 백작이 하는 사업이라니 그게 뭔지 아주 궁금하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투자도 하고 싶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거였다. 올리버는 다가온 직원에게 우선 차를 한 잔 가져오라고 한 뒤 사람들을 둘러봤다.

“무슨 사업인지 알지.”

“뭔데?”

궁금해 죽겠다는 사람들의 표정이 올리버를 즐겁게 했다. 그는 직원이 차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뭐냐니까?”

“어허, 좀 기다려 봐.”

“비스컨 남작, 출출하지 않아? 여기, 샌드위치 하나 가져오게.”

“샌드위치는 무슨. 여기 위스키 한 잔 가져와.”

“한 잔이라니. 한 병 다 가져오게.”

고작 번즈 백작의 사업 소식 하나에 클럽 안이 난리가 났다. 올리버는 샌드위치에 쿠키와 위스키까지 전부 받은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사업이라고 할 것도 없어. 거긴 그냥 여자들의 사교 모임 같은 거니까.”

“뭐?”

받을 거 다 받아 놓고 이러기야? 올리버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여자들의 사교 모임이라는 말이 맞다. 주최자는 유제니고 참석자는 그녀가 아는 여자들로 한정돼 있으니까. 올리버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가 아는 것을 설명했다.

“유제니가 수영을 배우고 싶다더군. 그래서 번즈 백작이 배를 빌려준 것뿐이야.”

“신문에서는 사업이라던데?”

“사업처럼 보이는 거지.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유제니를 통해서 수영을 배우러 올 수 있거든.”

거기까지 말한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재빨리 덧붙였다.

“아, 여자들만이야.”

그제야 여자들의 사교 모임이라는 올리버의 말이 지닌 의미를 이해한 사람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올리버에게 샌드위치와 위스키를 사 준 남자 둘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아서 물었다.

“그럼 왜 사업이라고 기사가 난 거야?”

“수영을 가르쳐 줄 사람을 고용해야 하잖아. 배우고 싶다는 사람이 많으면 돈을 받아서 더 많은 교사를 고용하려고 그런대.”

말이 사업이지 그냥 모임이다. 허 참. 샌드위치를 사 준 남자가 혀를 차고 떠났다. 올리버에게 위스키 한 병을 사 준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투자 필요한지 물어봐 줄까?”

올리버는 샌드위치를 삼키며 물었다. 필요 없다. 여자들이 노는 데 무슨 투자까지 필요하단 말인가. 남자는 짜증 난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올리버의 손에서 위스키병을 빼앗아 버렸다.

“멍청하긴.”

올리버는 술병을 빼앗겼지만,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집에서 그 기사를 봤을 때 이럴 수도 있다는 걸 유제니가 경고해 줬기 때문이다.

내 동생이지만 잔머리 하난 좋다니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올리버.”

그때, 클럽 안에 그의 친구인 테드 라이언이 들어왔다. 혼자 넓은 테이블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던 올리버는 친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 테드. 샌드위치 먹을, 너 얼굴이 왜 그래?”

아직 샌드위치 반쪽이 남아 있다. 친구에게 나눠 주려던 올리버는 테드의 얼굴을 보고 지금 샌드위치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테드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어디서 굴렀는지, 맞았는지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아, 이거. 어제 어떤 놈이랑 부딪쳐서.”

“부딪쳐? 어쩌다가?”

민망하다. 테드는 턱을 쓰다듬으려다가 멍든 부위를 건드리고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것도 아프다. 그는 올리버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 술 좀 마시고 나오다가 부딪쳤어. 어우, 하마터면 마차에 칠 뻔했다.”

완전 죽다 살아난 거지. 허세를 부리는 친구의 모습에 올리버는 피식 웃었다. 어디서 술을 마시다 그랬는지 알겠다. 아래쪽의 질 낮은 동네에서 술을 마셨던 모양이다.

그러게 작작 좀 마시라는 올리버의 말에 테드는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한동안 너네 집은 못 갈 거 같다. 여동생한테 말 좀 전해 줘.”

우리 집에 왜? 그렇게 물어보려던 올리버는 친구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구혼 중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테드가 유제니에게 구혼 중이라는 게 그리 탐탁지 않았다. 부유한 편이긴 하지만 작위도 없고 평소 그가 무슨 짓을 하며 놀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테드는 올리버보다 더 카드 게임을 좋아했고 종종 내기 카드를 치곤 했다. 가끔은 카드 빚을 갚지 못해 아버지께 혼이 난 적도 있고.

“그게 좋겠다.”

유제니가 보면 기겁할 거다. 올리버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왜 자신의 여동생이 번즈 백작을 테드와 하인즈 경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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