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20 – 2
“그래요?”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그런 생각 안 한다고?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면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단 말이야?
“당신과 결혼하려는 거라면 이런 자잘한 짓을 할 필요가 없죠.”
자잘한 짓? 나는 엘리엇의 단어와 태도 중 어느 쪽을 지적해야 할지 몰라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더니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와 결혼하려면 뭘 하면 되는데요?”
이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질문에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뭘 해야 내가 엘리엇과 결혼할까?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당신 가족이요.”
우리 가족? 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스컨 가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 되겠죠. 비스컨 남작의 빚을 갚아 주고….”
“올리버에게 빚이 있어요?”
어쩌다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카드 빚이었다. 카드 게임을 하는 건 좋다. 하지만 과도한 금액은 걸지 말라고 어머니와 내가 누누이 말했다.
엘리엇은 내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비스컨 남작의 빚을 갚아 주거나 원하는 걸 사 주는 거죠. 백작 부인께도 선물을 보내고.”
“나한테 보내는 게 아니라요?”
보통 구혼할 때는 결혼하고 싶은 여자한테 선물을 주지 않나? 엘리엇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당신은 손수건 이상은 안 받을 거 아닙니까.”
“허.”
이 남자, 날 너무 잘 안다.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엘리엇을 빤히 쳐다봤다. 그 꿈 때문에 나를 이렇게 잘 아는 거냐고 묻고 싶지만 무슨 대답을 해도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서 그만뒀다.
“올리버와 어머니께 잘해 주면 나와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사실이잖습니까.”
엘리엇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뻐기는 표정도, 미안하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냥 그게 사실이지 않냐는 담백한 표정에 오히려 기운이 빠졌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내가 어닝과 약혼했던 건,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그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렌시드 자작가는 괜찮은 집안이었고 어머니와 올리버가 어닝을 마음에 들어 했다. 나 역시 어닝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았고.
“그러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엘리엇의 말에 동의했다. 그가 내 어머니와 오라버니에게 잘해 줬다면, 그래서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나는 엘리엇과 결혼했을 거다. 지금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는 엘리엇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안 해요?”
그는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고 나와 결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안 하는 걸까.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은 엘리엇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건 아니다. 나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아니요. 하지만 그렇게 잘 아는데 왜 그렇게 안 하는지 궁금해서요.”
“그건 당신과 결혼하는 방법이지, 당신의 사랑을 받는 방법이 아니잖습니까.”
제일 먼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맙소사. 이 남자 미친 거 아냐? 나는 그대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저런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어?
나는 재빨리 손가락 사이로 주변을 살폈다. 우리 대화를 누군가가 들었을까 봐 걱정이 됐다.
“유제니?”
내 태도에 엘리엇이 괜찮냐는 듯 나를 불렀다. 세상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내가 이상한 것 같다. 정작 엘리엇은 우리가 이 찻집에 들어올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으니까.
“괜찮습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엘리엇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아니, 아니지. 나는 재빨리 손을 얼굴에서 떼어 내 그에게 손바닥을 보여 줬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거, 거기 앉아 있어요.”
다행히 엘리엇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가 다시 반대편 자리로 가서 앉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슬그머니 눈을 떠서 확인해 보니 그는 여전히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 나는 여전히 붉어져 있을 게 뻔한 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재빨리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 척하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어요?”
“뭘 말입니까?”
그는 정말로 모르는 표정이었다. 어리둥절해하던 엘리엇이 곧 알았다는 듯 말했다.
“아, 기분 나빴다면 죄송합니다. 비스컨 남작이나 백작 부인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의 난데없는 사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공략하면 나와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한 부분을 사과하는 모양이다.
맙소사.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나와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게.
다시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나는 재빨리 차를 마시는 척했다.
“유제니, 괜찮습니까?”
다시 엘리엇이 물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가 약간 분노를 느꼈다. 낯간지러운 말을 한 건 엘리엇인데 내가 왜 부끄러워하는 건지 모르겠다.
왜긴 왜야. 그 말을 듣는 당사자가 나니까 그렇지.
“괘, 괜찮아요.”
차 마시는 척하다가 정말로 차를 다 마셔 버렸다. 나는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용기를 그러모아 엘리엇을 쳐다봤다.
엘리엇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를 더 가져오라고 하죠.”
그때, 엘리엇이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르며 말했다. 아니, 됐다. 나는 재빨리 그를 말렸다.
“괜찮아요. 다 마셨어요.”
여기서 더 마셨다간 집이 아니라 화장실에 가야 할 판이다.
“그만 돌아갈까요?”
내 상태를 본 엘리엇이 계산서를 요구하며 물었다. 그래야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찻값을 지불한 뒤 직원에게서 내 양산을 받아 들고 있었다.
“내가 들게요.”
나는 엘리엇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올 때도 양산을 그가 들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양산을 펴더니 왼팔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바닥이 질척거리니 이건 제가 들겠습니다.”
이 남자는 내 손에 뭐가 들려 있는 꼴을 못 보겠는 모양이지. 어제 비가 온 탓에 아직도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남아 있긴 하다. 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그의 왼팔에 손을 얹었다.
“꿈에서도 이랬어요?”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개를 들자 엘리엇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게 보였다.
“양산이요. 꿈에서도 내가 못 들게 했어요?”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같은 양산 아래에서 그렇게 웃는 건 반칙이다. 내가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엘리엇이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하지만 그게 제 바람이긴 했습니다.”
말도 안 된다.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양산을 들어 주는 게 소원이라니.
하지만 엘리엇은 웃지 않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웃지는 않았다.
“진짜요?”
“네.”
고작 양산을 들어 주는 게? 나는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러자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엘리엇이 말했다.
“가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제야 나는 그와 내가 작은 양산 안에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평소라면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있을 수 있는 건 그가 내 양산을 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엘리엇의 남성스러운 냄새가 불현듯 코끝에 강하게 느껴졌다. 묵직하면서 시원한 향기였다.
“괜히 말했군요.”
곧이어 엘리엇이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살짝 떨어졌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양산에서 벗어나는 게 보였다.
“왜요?”
거리가 약간 떨어졌지만, 여전히 내 주위는 엘리엇의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질문에 그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제가 너무 가깝다고 의식했잖습니까.”
정확하다. 하지만 그게 왜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엘리엇이 계속해서 말했다.
“불편하게 느끼셨고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의식해야 하지 않나요?”
엘리엇이 너무 가깝다고 생각해서 불편하긴 했지만 그를 피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는 약간 놀란 듯한 엘리엇에게 말을 이었다.
“내 사랑을 받고 싶다면서요. 의식해야 사랑에 빠지죠?”
엘리엇의 눈이 커졌다. 어라. 그건 생각을 못 했나? 나는 어리둥절해서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런 거 아니었어요?”
“그런 거요?”
“나한테 잘해 줬잖아요.”
굉장히 잘해 줬다. 좀 위험하다 싶은 일에도 나서 줬고.
하지만 아니었나 보다. 엘리엇은 멈칫하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어, 아니었어? 내가 자기를 의식하게 하려고 그렇게 잘해 준 게 아니었단 말이야?
“저는….”
엘리엇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들고 있던 양산을 내려 마차길 쪽으로 내밀었다. 그 행동과 거의 동시에 달려오던 마차가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면서 우리 쪽으로 흙탕물이 쏟아졌다.
세상에. 하마터면 우리 둘이 흙탕물을 뒤집어쓸 뻔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