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1/239)

96화. 19 – 5

비밀?

유제니의 말에 로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비밀? 그녀가 몸을 기울이자 유제니는 정말로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난 번즈 백작이 나한테 구혼할 줄 몰랐어.”

“어, 정말로요?”

그렇게 눈에 띄도록 따라다녔는데? 사실 그런 소문도 있다. 레이디 비스컨이 번즈 백작이라는 보루가 있어서 렌시드 경과 파혼한 게 아니냐는.

물론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건 때때로 가당치 않은 이야기일 때도 있는 법이다.

“음. 난 평생 혼자 살 각오를 하고 파혼한 거야.”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올리버에게 미안하긴 하다. 귀족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산다는 건 결국 남자 형제에게 기댄다는 뜻이니까.

올리버는 그리 부유하지 않은 비스컨 가의 재정 속에서 유제니도 건사해야 했을 거다. 물론 유제니는 방 한 칸만 내주면 만족했을 테지만 자존심을 중요하게 여기는 올리버가 동생을 그렇게 둘 리가 없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새 드레스를 사 주려 하겠지.

대부분의 귀족가에서 최대한 빨리 딸을 시집보내는 이유는 바로 그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드는 돈이 늘어나니 부담스러운 거다.

“저는….”

유제니의 이야기를 들은 로렌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전 결혼 안 하고 싶어요.”

제일 처음 꿈을 꿨을 때 한 다짐이 그거였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

유제니는 로렌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그녀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나도 어닝과 파혼하기로 결심하고 여차하면 수도원으로 들어갈 생각도 했어.”

물론 최후의 수단이다. 제대로 된 혼처가 없다면 마지막 수단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다들 피하는 만큼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할 테지만, 유제니는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규칙적인 생활도, 검소한 음식과 옷차림도 괜찮았으니까.

“아뇨. 전 수도원에는 안 갈 거예요.”

로렌은 유제니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른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그래도 기부금과 함께 들어온 사람들은 좀 괜찮을 테지만 로렌 같은 사람은 노동도 함께 해야 할 거다.

노동은 괜찮다. 검소한 식단과 무채색의 거친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한다.

으으. 로렌은 회색의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떠올리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옷을 입고 싶지 않다. 너무 끔찍하다.

“결혼 안 한다며?”

그럼 어떻게 하려고? 유제니의 질문에 로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서 의상실을 하려고 한 거예요. 제가 번 돈으로 먹고살려고.”

뭐라고?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질문은 내뱉지 않을 수 있었다.

“오.”

알겠다.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왜 로렌이 의상실을 하겠다고 했는지 이제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가 의상실을 하고 싶다고 주장한 이유가 자신의 꿈이 예지몽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인 줄 알았다. 그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인 줄 알았다.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보다 좀 더 근본적인 이유였다.

기댈 가족이 없는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수도원에도 들어가지 않겠다면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레이디 비스컨, 혹시 그래서 저와 인연을 끊고 싶으시다면….”

다시 로렌이 부르는 유제니의 호칭은 레이디 비스컨이 되어 있었다.

귀족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 의상실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직접 운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재단을 하고 재봉을 한다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귀족이 노동을 한다면 귀족 사회에서 그와 어울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제니.”

유제니는 재빨리 로렌의 말을 고쳐 주었다.

과거에는 생각보다 많은 가난한 귀족 여자가 가정 교사가 되었다. 유제니를 가르쳐 주었던 선생님 중 하나도 귀족 출신이라고 들었다.

“가정 교사가 될 생각은 없지?”

조심스러운 유제니의 질문에 로렌은 픽 웃었다.

“저,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요.”

가정 교사가 되려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로렌은 아카데미 공부를 소홀히 했고 그게 지금 그녀가 후회하는 수많은 것 중 하나였다.

“난 네가 영리하다고 생각해. 지식은 다른 문제고.”

유제니는 로렌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말했다. 로렌 정도의 나이에 벌써 자기 미래를 그렇게 정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로렌의 나이에 어땠는지 잠시 생각했다. 별생각 없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제니는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기보다는 서재에 처박혀서 책을 읽는 편이 더 좋았다.

“그래, 알았어.”

유제니는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했다. 그사이 로렌은 자신을 영리하다고 말한 유제니의 말이 진심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고 일하고 싶단 말이지.”

“누가요?”

그때, 열린 문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엄마야! 깜짝 놀라 돌아본 유제니와 로렌은 문틈으로 줄리아의 얼굴을 발견했다.

“누가 결혼하지 않고 일하고 싶대요?”

줄리아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보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오늘 방문하겠다고 했다.

유제니는 집사에게 줄리아가 오면 바로 안내해 달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로렌과 줄리아가 같이 오는 줄 알고 그랬다.

“나.”

다행히 로렌은 줄리아에게 비밀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곤란해하는 유제니의 얼굴을 보고 재빨리 줄리아에게 말했다.

“너? 결혼 안 하고 일한다고?”

줄리아 역시 유제니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결혼 안 하고 일한다니, 노동자 계급이라도 될 생각이야?

로렌은 줄리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응. 결혼하기도 싫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기도 싫으니까.”

허. 줄리아의 시선이 유제니를 향했다. 좀 말려 보라는 시선에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다. 로렌의 말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 말이 된다. 그렇잖은가. 결혼도 하기 싫고 수도원으로 가기도 싫다면 일을 하는 수밖에 없지.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그날 오후, 유제니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던 엘리엇은 그녀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듣다가 물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에 유제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일단 아카데미는 계속 다니기로 했어요.”

원점이다.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본 유제니가 인상을 쓰며 덧붙였다.

“결론이 안 났다는 말이죠.”

“결론 내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결혼하기 싫다는 걸 흔쾌히 응원해 주기는 어렵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인생이 어떤지 아니까.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엘리엇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양산, 내가 드는 게 낫지 않겠어요?”

다른 산책하는 연인들은 다 여자가 들고 있다. 여자용이니까 당연하다. 하지만 엘리엇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신이 들면 제 눈이 찔릴 것 같거든요.”

그건 그렇다. 유제니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둘 다 안 쓰는 편이….”

“햇볕이 뜨겁잖습니까. 타면 아플 텐데요.”

어떻게 아는 걸까. 매년 여름이면 제대로 햇빛을 가리지 않은 부위가 타서 괴로워하곤 했다.

이것도 꿈에서 알게 된 정보인 모양이다. 유제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잘 아는데, 그녀는 엘리엇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게.

“왜 그러십니까?”

엘리엇은 늘 그렇듯 유제니의 작은 한숨에도 금세 반응했다. 그녀는 불공평하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걸 불공평하다고 말하면 엘리엇과 로렌의 꿈을 진짜 미래로 인정해 버리는 느낌이 든다.

“키가 큰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서요.”

나란히 서 있으면 엘리엇은 유제니보다 머리 두 개쯤 크다. 그녀가 든 양산이나 우산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찌를까 봐 걱정이 되는 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아니었다. 그는 유제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렇습니까? 전 꽤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느 부분이요?”

“당신의 양산을 들어 줄 수 있다는 부분이요.”

유제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말 참 예쁘게 한다니까. 그녀는 엘리엇의 팔에 얹은 손으로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진심인데요.”

정말 진심이라는 표정이라 유제니는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소리 내어 웃다가 재빨리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주제를 바꿔서 말했다.

“어쨌든, 로렌을 어떻게 도와줄지는 좀 생각해 봤는데요.”

“결혼하라고 설득할 생각은 없으시고요?”

당연하다. 유제니는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당연히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할 생각도 없다.

“로렌은 자기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만.”

에이, 정말. 유제니의 손이 엘리엇의 팔뚝을 가볍게 때렸다. 아프기는커녕 느낌조차도 없을 정도로 그녀의 손길은 가벼웠지만, 그는 일부러 아프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자 미안했는지 유제니가 그의 팔뚝을 가볍게 쓸며 말했다.

“로렌이 사람 보는 눈을 키우고 싶다니 그걸 도와주면 어떨까 싶어요.”

“그걸 어떻게 도와주시게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팔뚝에 스치는 게 기분이 좋아서 엘리엇은 만족한 표정으로 물었다. 유제니가 쓰다듬는 것을 멈췄을 때는 아쉽기까지 했다.

“전에 당신 배를 빌려준다고 했잖아요.”

곧이어 유제니의 입에서 나온 당신이라는 호칭이 엘리엇을 더욱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는 그다음에 유제니의 입에서 나올 말이 이번에는 심장을 뽑아 달라는 요청이라고 해도 기쁘게 내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 정식으로 계약하고 써도 될까요?”

“소유주를 넘겨드리죠.”

“아니, 그건 아니에요.”

소유주를 넘겨준다니. 유제니는 당황해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로 돈을 좀 벌어 볼까 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