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0/239)

95화. 19 – 4

그녀가 어리둥절해하자 로렌이 설명했다.

“아카데미에 계속 다녀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더 배워야 한다고요.”

그 비슷한 말은 한 적이 있다. 돈이 드는 아카데미는 그만두고 의상실 일에 전념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물론 유제니는 로렌이 더 배워야 해서 아카데미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만약 의상실 일이 잘못된다면 도망칠 구멍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나에게나 마지막 도피처는 있어야 한다. 그게 로렌에게는 아카데미가 되어 줄 거라 생각했다.

“레이디 비스컨 말이 맞아요. 저는 더 배워야 해요. 꿈에서도 그랬거든요.”

“꿈에서도 의상실을 하려고 했니?”

그렇다면 로렌이 의상실을 하려고 했다는 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로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사람 보는 눈이요. 전 솔직히 레이디 비스컨이 왜 절 도와줬는지도 모르겠어요.”

꿈에서 그녀는 세케이 경이 제공해 준 집에서 그의 돈으로 하녀를 고용했다. 문제는 로렌이 사람을 부리는 법을 전혀 몰랐다는 데 있다.

사람을 볼 줄도, 일을 시킬 줄도 모르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정부를 존중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로렌을 무시했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시시때때로 도둑질했다.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하녀가 그녀가 이야기한 것들을 소문내서 크게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한탄을 주변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며 비웃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로 죽고 싶었다.

“음. 글쎄.”

로렌의 말에 유제니는 자신이 그녀를 왜 도와줬는지 생각했다. 잘 모르겠다. 그냥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고 그녀는 도와줄 수 있었다.

그래서 도와준 것뿐이다.

딱히 로렌을 믿거나 한 건 아니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로렌에게 하면 상처받을 테니 말하진 않았다.

“줄리아의 친구라고 했고, 도움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유제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게 진심이다. 깊이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러자 로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었잖아요?”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보는지 잘 알았다. 마스터슨 경의 후원을 받으면서 좋은 드레스나 탐내는, 얼굴만 예쁜 멍청한 아가씨. 그게 로렌의 이미지였다.

아무도, 심지어 아카데미의 교수나 기숙사의 사감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도움받는 주제에 마스터슨 경에게 뻔뻔하게 군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도와준 건 유제니뿐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유제니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로렌이 거짓말한다는 생각은 안 했다. 자신의 미래를 꿈으로 봤다는 건 거짓말로 하기엔 너무 허황한 이야기니까.

진짜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했겠지.

“그럼 왜 도와줬어요? 그걸로 그….”

그, 뭐? 유제니는 찻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로렌을 쳐다봤다. 그러자 로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왕비님께 불려 가서 혼났다면서요.”

“오.”

기억난다. 유제니는 왕비와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혼난 건 아니었지만.

“저한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나요?”

로렌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던 유제니는 행동을 우뚝 멈췄다. 가치가 있냐고? 그녀는 로렌의 말을 믿을 수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인생이었잖아. 아니야?”

로렌의 인생이 걸린 일이었다. 실제로 걸린 게 인생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로렌 본인이 그렇게 믿었다. 그녀의 인생이 걸려 있다고.

그렇다면 그녀의 인생이 걸린 거다.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로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제니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게 왜 가치가 없어? 네 인생이 걸렸는데?”

너무 정론이라 로렌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 여기에는 그녀의 인생이 걸렸다. 그러니 가치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배신한 사람들도 있다.

“전 잘 모르겠어요.”

로렌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힘없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배신한 리브 씨보다 도와준 유제니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 자신의 뭘 보고 도와준 걸까. 자신이 유제니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는데.

유제니는 기운이 빠진 듯한 로렌을 보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 이러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리브 씨의 배신이 꽤 충격적이었던 거다.

그녀는 거의 망해 가는 의상실의 주인이었다. 로렌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당연히 감사할 줄 알았는데 배신을 했으니 충격을 받았겠지.

그리고 동시에 그건 로렌에게 자기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로렌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마스터슨 경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뭘?”

“제가 배신했다고요. 기껏 길러 줬더니….”

“로렌.”

유제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로렌을 불렀다. 너무 나갔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로렌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마스터슨 경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니?”

“그건 아닌데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리브 씨의 배신을 알기 전까지는. 로렌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꿈이 희미해지고 있어요. 요즘은 내가 정말 꿈을 꾼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유제니의 머릿속에 문득 그녀의 꿈이 떠올랐다. 엘리엇이 그녀의 가족들을 죽이던 꿈. 처음 꿈에서 깼을 때는 공포심과 상실감에 눈이 붓도록 울었다.

하지만 그녀의 꿈도 다른 꿈과 마찬가지로 희미해져서 요새는 거의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건 로렌도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며칠 간격으로 꿈을 꿨는데 지금은 전혀 꾸지 않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큰 사건만 기억나고 자잘한 일들은 희미해졌다.

진짜 자신의 것 같았던 감정들도 퇴색했다.

“로렌, 만약 네가 그 꿈을 꾸지 않았다면 마스터슨 경이 시키는 대로 세케이 경을 만났을까?”

“네.”

로렌은 유제니의 질문에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녀를 돌봐 준 분이니 시키는 대로 했을 거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꿈의 무서운 점이다. 거기서 일어난 모든 일은 그 상황이면 당연히 일어났을 일들이었다. 로렌 성격상 꿈을 꾸지 않았다면 꿈과 똑같이 흘러갔을 거다. 그건 꿈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꿈에서와 똑같이 후회했을 테고?”

“그렇죠.”

꿈과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은 인생을 살았겠지. 그리고 꿈과 똑같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후회했을 거다.

“그럼 뭐가 문제야?”

갑작스러운 유제니의 질문에 로렌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뭐가 문제냐고?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에 유제니가 말했다.

“너는 네 인생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거잖아. 위험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고 꿈과 다른 인생을 살려고 노력했어. 적어도 꿈과 다른 후회를 하고 있지. 이 정도면 훌륭한 거 아냐?”

그, 그런가? 로렌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계속해서 눈만 깜빡였다. 그렇게는 생각 안 해 봤다. 꿈과 다른 후회를 하고 있다고? 꿈과 다른 인생을 살려고 노력했다고?

모두 맞는 말이다.

“리브 씨가 배신한 건, 리브 씨가 배신한 거지. 네가 뭘 잘못한 게 아니잖아. 네가 마스터슨 경을 배신한 것 역시 마찬가지야.”

난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유제니는 재빨리 그렇게 덧붙이고 말을 이었다.

“너는 너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어. 나는 그걸로 충분해. 널 도와주길 잘했다고 생각해.”

맙소사. 로렌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유제니에게 도와주길 잘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으니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자, 잘하고 있는 건지 모, 모르겠어요.”

목이 메서 로렌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눈앞이 흐려지는 걸 유제니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를?”

로렌의 고백에 유제니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뭘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계속 실패만 하고 있잖아요. 그, 음, 유행을 맞추는 것도 실패했고….”

리브 씨에게도 배신당했다. 로렌은 다시 침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기혐오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꿈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유제니와 번즈 백작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마스터슨 경으로부터 벗어나기도 어려웠을 거고.

레이디 비스컨과 번즈 백작에게 돈을 갚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어떻게 갚을지조차 막막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면 결국 꿈에서와 똑같은 인생을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자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자신의 인생이 꿈과 같이 실패한 인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처음 꿈을 꿨을 때는 명확하던 미래가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왜 실패야?”

유제니는 우유 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실패와 성공은 동전의 양면처럼 꼭 붙어 있지도, 반대편을 향하고 있지도 않다.

“연습 중인 거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잔에 우유를 약간 따랐다. 자연스럽게 찻물의 색이 연해졌다.

“처음부터 유행을 잘 맞추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람 보는 눈도 그래. 태어나면서부터 사람 보는 눈이 있으면 그건 예언가지.”

예언가라고 사람 보는 눈이 있을까? 유제니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금세 그 의문을 떨쳐 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하잖아요. 레이디 비스컨도….”

“유제니.”

로렌의 반박에 유제니는 재빨리 말했다. 유제니라고 불러. 그녀의 말에 로렌의 얼굴이 멍해졌다가 금세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그녀가 이름으로 부르는 건 아카데미에서 가까운 친구 몇 명뿐이다. 로렌은 유제니가 진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유, 유제니도 렌시드 경과 파혼했지만 번즈 백작님의 구혼을 받고 있고요.”

그게 성공으로 보일 수도 있구나. 유제니는 로렌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생각도 안 해 봤다. 그녀는 로렌을 바라보다가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비밀 하나 알려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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