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19 – 3
“레이디 비스컨.”
응접실에 앉아 있던 로렌은 유제니를 보자 벌떡 일어났다. 약간 창백한 안색이 어디 아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유제니는 원래 그렇다.
앉아, 앉아. 유제니는 손을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원래 그렇다는 것도 로렌이 새로 발견한 점이었다. 의외로 레이디 비스컨에게는 털털한 구석이 있었다.
줄리아가 연락 없이 놀러 갈 때면 응접실에서 신발을 벗고 길게 앉아 신문을 보고 있을 때도 있다고 한다. 신발을 벗고 있다니, 지금 레이디 비스컨을 보면 상상도 안 될 모습이다.
“혼자 왔어?”
유제니의 질문에 로렌은 움찔했다. 그녀는 자신과 유제니의 위치가 얼마나 다른지 잘 알았다.
최근 파혼하긴 했지만, 유제니는 유서 깊은 비스컨 백작가의 아가씨다. 그녀가 다음 혼처를 구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다.
처음 유제니의 파혼 소식을 들은 사람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렌시드 자작가보다는 좀 떨어지겠지만, 귀족과 결혼할 거라고.
신흥 귀족이지만 부유한 영웅, 번즈 백작이 구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지금은 사람들의 믿음이 더욱 공고해졌다. 유제니 비스컨은 귀족 사회에 머무른다. 그녀가 귀족 사회에서 떨어져 나갈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로렌은 달랐다. 그녀는 몰락 귀족이었고 그녀를 보호해 줄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후견인이었던 먼 친척이 그녀를 정부로 팔아넘기려고 했던 거겠지.
위치가 공고한 유제니와 달리 로렌은 언제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모르는 입장이었다. 로렌은 자신의 방문이 유제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지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줄리아와 함께 올 걸 그랬나요?”
로렌의 질문에 유제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줄리아랑? 왜? 다행히 그녀는 로렌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금세 이해했다.
자신이 줄리아의 친구라 방문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한 거다. 유제니의 친구가 아니라.
유제니는 재빨리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아니야. 줄리아도 오늘 온다고 했거든. 그래서 같이 오는 줄 알았어.”
로렌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가 방문한 게 유제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닌 모양이다.
그때, 유제니가 덧붙였다.
“네가 오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야. 다음엔 연락 없이 그냥 와.”
로렌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서 유제니를 쳐다봤다. 귀족의 집에 방문할 때는 반드시 방문 허락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언제 와도 좋다는 답장을 받아야 방문할 수 있다.
물론, 방문 자체는 연락 없이 할 수 있다. 상대가 받아 주지 않아서 그렇지.
연락 없이 방문할 경우, 집사가 거절한다. 몸이 안 좋다거나, 다른 손님이 있다는 핑계로.
귀족의 집에 연락 없이 방문해도 되는 건 아주 가까운 사람들뿐이었다. 줄리아처럼 가깝게 지내는 친척이나 아주 친한 친구들이 그렇다.
지금처럼 사교 시즌에는 구혼자들까지 허용이 된다. 만약 유제니가 약혼을 하거나 사교 시즌이 끝나면 구혼자들도 미리 방문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지금 유제니의 발언은 로렌에게 일종의 신분 상승이었다. 그녀가 레이디 비스컨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는.
“저, 정말요?”
로렌은 유제니의 말이 믿기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물었다. 방문 허락 없이 와도 된다고? 진짜?
그녀의 인생에서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에겐 가까운 친척이 없었고, 꿈에서는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쯤에 가까운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정숙하고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정부와 어울리는 것을 기피하는 법이다. 로렌이 살아 본 인생에서 그녀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건 기르던 개뿐이었다.
유제니는 자신의 말에 밝아진 로렌의 얼굴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녀의 예상대로 로렌이 방문 허락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집은 없었던 거다.
“응. 혹시 내가 없어도 차 마시고 가.”
유제니는 착잡한 자신의 표정을 가리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다들 그렇게 한다. 유제니가 없으면 그냥 가기도 하지만 날이 너무 덥거나 추우면 집사가 잠시 차를 마시고 가라고 권한다.
줄리아는 유제니가 없다는 것을 알아도 방문한다. 그리고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커런트의 속삭임을 읽곤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런 저속한 잡지를 읽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참, 이거요. 줄리아가 오기 전에 드릴게요.”
차를 한 모금 마신 로렌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
이게 뭐지? 유제니는 찻잔을 든 채 로렌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꼭 돈주머니처럼 보였다.
“전에 투자해 주신 돈이요. 얼마 안 되지만 이자도 붙였어요.”
“뭐라고?”
돈주머니처럼 보이더니 돈주머니였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유제니의 입이 딱 벌어졌다. 게다가 이자를 붙였다고?
유제니의 반응을 본 로렌은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에 제가 의상실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투자해 주셨잖아요?”
“후원.”
유제니는 재빨리 로렌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건 투자가 아니라 후원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후원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법이다.
아니, 바라는 게 있기는 하다. 로렌이 훌륭한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거. 하지만 유제니조차 스스로가 훌륭한 어른인지 자신할 수 없는데 그걸 감히 로렌에게 요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후원이었어, 로렌. 투자가 아니라.”
안다. 로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제니는 그녀를 후원해 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번즈 백작과 레이디 비스컨이 후원해 주었다.
그 사실에는 감사한다. 로렌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보답해 드리고 싶어요. 번즈 백작님께도 저를 위해 내주셨던 금액을 갚을 거예요.”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로렌은 평생을 걸쳐서라도 번즈 백작이 마스터슨 경에게 지불한 금액을 갚을 생각이었다.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표정과 말투에 유제니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전에도 로렌은 그렇게 말했다. 대가가 돈이라면 그건 차라리 저렴한 거라고.
그게 유제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기는 한다. 도움을 받으면 감사해야 하고 뭔가를 받으면 그만큼 돌려주는 게 맞다고.
하지만 이자를 붙여 주는 정도로 칼같이 계산하려는 사람은 흔치 않다.
로렌이 이렇게 한다는 건 그녀의 인생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제니의 머릿속에 그녀와 마스터슨 경과의 분쟁이 떠올랐다. 마스터슨 가는 조용해졌지만 그건 마스터슨 경이 번즈 백작에게 로렌에게 들어간 돈을 전부 받아 냈다는 소문이 퍼진 다음의 일이다.
그런 자가 로렌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내가 이걸 받아야 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할게.”
유제니는 로렌이 내려놓은 주머니에 손을 대지 않을 채 말했다. 얼마 들었는지 확인해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확하게 그녀가 준 돈과 약간의 이자가 포함돼 있을 거다.
그녀는 로렌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짐 가방을 많이 찾던데. 사업은 잘돼 가?”
“사업이라뇨.”
사업이라니, 너무 거창하다. 로렌은 당황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건 그냥 작은 아이디어였을 뿐이다.
“꿈에서 봤거든요.”
“짐 가방을?”
“그건 아니고요.”
짐 가방을 천으로 감싸는 걸 꿈에서 본 건 아니었다. 그녀의 꿈에서 발시안은 전쟁과 드래곤의 습격으로 황폐했고 가난했다. 귀족과 아주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예쁜 천을 구하기 힘들었고.
그 와중에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아이들에게 의무 교육을 강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말고 학교를 보내라니, 말이 되는 소리냐는 원성이 자자했지만 어쨌든 왕의 명령이다.
제대로 된 교재도, 필기구도 없었지만, 수도에 사는 아이들은 아침이면 모두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때 로렌은 아이들이 마대로 만든 조악한 책가방을 메거나 들고 가는 것을 봤다.
“아이들이 좀 예쁜 가방을 들고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곡식을 담는 자루로 얼기설기 만든 책가방이라니, 조금 마음이 안 좋았다. 사정이 좀 괜찮은 아이들은 낡은 천으로 책가방을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 사정이 나빴다.
특히나 모든 아이에게 일을 시키지 말고 아카데미에 보내라는 명령은 초기에는 굉장히 큰 반발을 일으켰다. 마대로 만든 책가방이라도 챙겨 준 집은 그나마 나았다는 뜻이다.
“그게 생각나서 해 본 거예요. 누구나 예쁜 걸 좋아하니까요.”
로렌의 말에 유제니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네. 누구나 예쁘고 좋은 물건을 좋아한다. 짐 가방이야 마차 뒤에서 흔들리고 부딪치니 조금 덜하지만 그래도 여유만 있다면 예쁘게 꾸미고 싶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럼 사업을 의상실에서 짐 가방 쪽으로 옮기는 거야?”
유제니의 질문에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체크무늬뿐 아니라 꽃무늬나 줄무늬도 괜찮았을 테니까.
하지만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로렌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고 싶었는데요. 당했어요.”
“당해? 뭐를?”
“짐 가방에 천을 덧대는 거요. 이미 리브 씨가 하고 있더라고요.”
리브 씨가 누구지? 잠시 생각한 뒤에야 유제니는 리브 씨가 로렌과 동업하는 의상실 주인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체크무늬 드레스가 인기를 얻을 거라고 호언장담한 로렌이 동업을 하기 위해 찾았던 손님이 없는 작은 의상실 주인이다.
“이미 하고 있다니, 너 몰래?”
“네. 이미 자기 생각인 것처럼 사람들한테 팔고 있더라고요.”
오, 저런.
유제니의 얼굴에 안됐다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감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다. 사람들이 체크무늬 짐 가방을 찾기 시작하자 리브 씨가 재빨리 나선 거겠지.
그녀의 의상실에서 수선해 준 거라고. 거기에 로렌의 이름을 넣지 않았던 거다.
유제니는 로렌을 위로하기 위해 말했다.
“하지만 네 생각이잖아. 다른 의상실을 알아보면 되지.”
“아니에요.”
처음에는 로렌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아이디어였는데 날 배신해? 어디 두고 보자. 그런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분노는 로렌 자신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늘 이랬다. 꿈에서도 그녀는 비슷한 실수를 몇 번이나 저질렀다.
“레이디 비스컨의 말이 맞았어요. 전 옷 만드는 법을 모르잖아요.”
로렌의 말에 유제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옷 만드는 법을 모르는 건 맞지만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