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19 – 2
“어디 안 좋습니까? 혹시, 아닙니다.”
아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올리버에게 물어보고 있는 건 시간 낭비다.
의사를 데리고 비스컨 가로 찾아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 엘리엇의 모습에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해야 할 상황인데 좀 기분이 나쁘다.
번즈 백작은 늘 이랬다. 오늘 모인 사람 중 아직 미혼인 여자 형제가 있는 사람들은 다들 엘리엇에게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올리버의 동생인 유제니뿐이다. 이 정도로 인기가 있다면 다른 여자들과 차를 마시거나 공연을 보러 갈 만도 하건만, 번즈 백작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확실히 그런 점은 유제니의 오라버니로서 꽤 어깨가 으쓱해질 만한 일이다. 문제는 번즈 백작의 저런 태도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엘리엇이 관심을 가지는 여자는 유제니뿐이지만, 인간으로 쳐도 유제니뿐이다. 아니, 생명체를 통틀어도 유제니뿐이군. 올리버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가 저 멀리 가 버린 엘리엇을 붙잡기 위해 허둥지둥 달려갔다.
“잠깐, 잠깐, 번즈 백작.”
“뭡니까?”
방해하지 말라는 투가 역력한 질문에 올리버는 기분이 상했지만 참고 물었다.
“자네, 유제니와 결혼할 생각이 있는 건가?”
올리버의 바보 같은 질문에 엘리엇은 우뚝 멈춰 서서 그를 노려봤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걸 물어보려고 그녀의 이름을 꺼낸 겁니까?”
유제니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엘리엇의 질문에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유제니 이름을 왜 꺼내겠냐는 표정에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단 한 번도 도움이 되지 않은.
한때는 그래서 올리버를 증오했다. 엘리엇은 허탈한 나머지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마터면 수도의 의사란 의사는 다 끌고 비스컨 가로 갈 뻔했다.
“잠깐, 어디 가?”
올리버는 자신을 무시하고 돌아서는 엘리엇을 붙잡으며 물었다. 유제니랑 결혼할 거냐니까?
번즈 백작은 유제니에게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걸 관심이 있어 보인다 정도로 표현하는 건 관심이라는 단어에 대한 모욕일 것 같지만.
“있습니다. 레이디 비스컨이 원한다면.”
엘리엇은 자신의 팔을 잡은 올리버의 손을 뿌리치며 간단하게 말했다. 당연히 결혼할 생각이 있다. 차마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전과는 달리.
“어, 잠깐만. 그럼 유제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놀랍게도 올리버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집어 물었다. 유제니가 원한다면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유제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없다는 말이다.
“그녀의 인생이니까요. 그녀가 원하는 쪽으로 가야죠.”
깔끔한 엘리엇의 말에 올리버는 눈살을 찌푸렸다. 유제니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하지만 유제니 외의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진심이야?”
올리버의 질문에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유제니가 원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녀가 행복한 것. 그녀가 원하는 것.
유제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진심이다. 물론, 그녀가 원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아, 진짜. 이상한 놈이라니까.”
엘리엇이 떠나 버리자 올리버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투덜거렸다. 저 녀석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엘리엇의 뒤를 따라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걸은 뒤에야 자신이 잘못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젠장.”
엘리엇이 가는 길을 따라갔어야 했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벽을 따라 걸어가던 올리버는 벽 끝에 나온 탁 트인 공터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왕궁이겠지만 왕궁은 넓다. 게다가 여기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면 창피를 당할 수도 있다.
“그만!”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올리버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한 무리의 남자들을 발견하고 눈을 찡그렸다.
익숙한 복장이다. 가벼운 셔츠 차림에 가죽 보호구를 착용한 모습이 검술 훈련이라도 하는 것 같다.
거기까지 본 다음에야 올리버는 여기가 기사단의 훈련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저들은 검은 늑대 기사단이거나 흰 사자 기사단일 것이다.
만약 올리버가 쫓아가서 그들에게 검은 늑대인지 흰 사자인지 물었다면 저들은 화를 냈을 것이다. 흰 사자 기사단이었으니까.
다행히 올리버는 저들이 흰 사자 기사단이라는 것을 묻지 않고 알 수 있었다. 몇 번 카드 게임을 한 적 있는 남자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무어 경.”
잘됐다. 올리버는 아는 사람을 발견하자 반갑게 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여기서 나가는 길을 물어봐야겠다.
스콧 무어는 예상치 못한 얼굴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이 녀석이 왜 여기 있어? 그는 올리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비스컨 남작. 무슨 일이야?”
설마 내가 지난번 게임에서 진 빚을 안 갚았던가?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다행히 그가 빚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올리버가 먼저 말했다.
“오늘 식사 초대를 받아서 왔다가 잠깐 구경 좀 하고 있었지.”
그제야 스콧도 오늘 왕궁에서 작위가 있는 미혼 남성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한다던 소식을 떠올렸다. 아, 그거.
기사들도 작위가 있으니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참석하려면 기사단의 반이 훈련에서 빠지고 가야 한다. 심지어 근무 중인 사람은 근무를 빼야 한다.
그래서 기사단은 두 번에 걸쳐 따로 식사 대접을 받기로 했다. 스콧은 씩 웃으며 물었다.
“아, 그거. 우린 이틀 뒤야. 국왕 전하와 함께 식사한다던데. 진짜야?”
“음. 같이 식사 했지.”
덕분에 국왕의 근처에 앉은 자들은 음식이 코로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식사를 마쳤다.
허, 그래? 스콧은 저도 모르게 턱을 쓸며 말했다.
“잘하면 검은 늑대로 갈 수도 있겠네.”
국왕에게 잘 보여 국왕의 기사단으로 가고 싶다는 말이다. 올리버는 아직도 그 생각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앳된 남자가 쟁반에 컵을 두 개 가져와서 스콧에게 말했다.
“무어 경, 차입니다.”
키는 스콧과 올리버만 한데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도 안 지난 모양이다. 올리버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그가 아직 소년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견습?”
기사단은 어릴 때부터 실력 있는 아이들을 견습 기사로 받아 훈련을 시킨다. 보통 무어 경처럼 물려받을 작위가 없는 귀족 자제들이고.
“입단 시험을 본다고 들었는데.”
올리버의 질문에 스콧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입단 시험을 본다.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 앞에서.
그 시험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기사단에서 나가야 한다. 물론 거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비정기적인 입단 시험이 있다. 근무 중 사고를 당하거나 운 좋게 먼 친척에게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은 기사가 그만두면 자리가 비기 때문이다.
“저, 그건 라넌 경 건데요.”
스콧이 자연스럽게 린가르드가 가져온 컵 두 개를 집어 들자 린가르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 스콧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어쩌라고. 그 여자 차까지 내가 생각해야 해?”
“아, 아닙니다.”
린가르드가 허둥지둥 물러나자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라넌 경?”
“라넌 경은 무슨.”
스콧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 여자 생각만 해도 짜증 난다. 왜 기사단에 들어오고 난리야?
“왜? 무슨 일 있어?”
클레어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스콧의 태도에 올리버는 솔깃해서 물었다. 그도 클레어가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다.
건방진 여자. 유제니 앞에서 그에게 창피를 줬지. 다음에 만나면 진짜 한 소리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스콧이 말했다.
“아, 존재 자체가 일이지. 무슨 기사를 하겠다고 들어와서 물을 흐리냐고.”
“왜? 실력이 안 좋아?”
실력이 안 좋냐는 질문에 스콧의 입이 닫혔다. 그건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검은 늑대 쪽으로 가려고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검은 늑대 단장인 에스컬레 경은 허락하지 않았고 멍청한 흰 사자 기사단 단장인 에스마 경이 받아들였다.
“아, 안 좋은 건 아닌데. 아니지, 다들 여자라 방심해서 그런 걸 거라니까.”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올리버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입단 시험을 봐줬다고?”
그거 두 기사단장과 겨루는 거로 알고 있는데. 에스컬레 경이 봐줬을 리가 없다. 올리버는 어릴 때 에스컬레 경에게 검술 훈련을 받았다.
어찌나 혹독하게 받았는지 아직도 가끔 그때 꿈을 꾼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목소리가 확 작아지는 스콧의 모습에 올리버는 인상을 썼다. 뭐가 문젠데? 그가 이해하지 못하자 스콧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 좀 짜증 나. 우리끼리 하던 농담도 저 여자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한다니까? 이 여름에 옷 다 갖춰 입고 훈련해야 하는데, 상상이 되냐?”
“글쎄.”
올리버를 떨떠름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스콧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원래 농담은 듣는 누구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야 농담이다. 신사라면 어디서든 의관을 단정히 해야 하는 법이고.
심지어 여긴 왕궁이다. 왕궁 안에서 기사라는 자들이 덥다는 핑계로 홀딱 벗고 있다면 기사단의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한 소리 나올 게 분명하다.
“라넌 경이 마음에 안 드는 게 그런 이유야?”
“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니까? 너도 겪어 봐야 해. 얼마나 쌀쌀맞은지. 살살거리고 웃으면 좀 좋냐고.”
확실히 라넌 경은 좀 쌀쌀맞다. 아니, 쌀쌀맞은 정도가 아니라 싸가지 없다는 거에 가깝다.
“게다가 안 그래도 저 여자 때문에 검은 애들이 우릴 우습게 본다고.”
검은 애들은 검은 늑대 기사단을 부르는 흰 사자 기사들만의 별명이다. 물론 검은 늑대에서는 흰 사자 기사단을 흰 애들이라고 부르고.
“왜 우습게 보는데?”
“왜긴. 지네가 안 받는다고 한 걸 우리가 주웠잖아. 아, 우리가 쓰레기통이냐고.”
그건 기분 나쁘겠네. 적당히 친구의 징징거림을 받아 주던 올리버의 시선이 저 멀리 있던 클레어와 부딪쳤다. 젠장.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