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87/239)

92화. 19 – 1

“이 마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 눈에서 피눈물 날 거다!”

넓고 황량한 알현실에서 사람들이 끌려나갔다. 국보를 빼돌린 죄로 작위를 박탈당한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허. 엘리엇은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감히 국보를 다른 나라에 팔아넘기고도 뻔뻔하다. 하지만 동시에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빼돌리긴 했지만 되찾아 왔다. 가까스로 되찾아 온 국보를 가지고 달려왔는데 작위 박탈이라니.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사람들이 끌려나가고 알현실이 조용해지자 엘리엇이 물었다. 국보를 빼돌려 외국으로 팔아넘기려 한 마스터슨 백작과 거기에 협조한 그 친구들에게만 벌을 주는 거로 충분했을 것이다. 귀족 몇이 벌을 받고 마스터슨 백작가는 벌금으로 전 재산을 내놓아야겠지.

게다가 국보를 빼돌렸으니 명예도 타격을 받을 것이다. 마스터슨 백작가와 어울리려 하는 사람이 줄어들 테니 어쩌면 몇십 년 안에 가문이 몰락할 수도 있다.

지금과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지만 마스터슨 가의 사람들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증오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보를 빼돌렸는데 당사자에게만 벌을 준다? 전장의 검은 늑대가 약한 소리를 하는군.”

그의 앞에서 거대한 왕좌에 가려져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던 유제니가 입을 열었다. 앙상하게 마르고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엘리엇은 그런 유제니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잘못을 깨닫고 되찾아 왔잖습니까.”

그의 말에 유제니의 입가가 비틀렸다. 되찾아 왔으니 됐다고? 마스터슨 백작은 감히 국보에 손을 댈 생각을 했다. 감히 국보로 제 배를 채우려 했으며 감히 국보를 이웃 나라에 팔아넘기려 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되찾아 왔으니 됐나? 이 국보가 전과 똑같나?”

“흠 하나 없잖습니까.”

“어리석은 소리.”

유제니는 콧방귀를 뀌며 엘리엇을 비웃었다. 정확히는 그의 말을.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이 국보는 한 번 도난당했다. 그게 가진 의미는 대단하다. 누구나 국보에 손댈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내가 저들을 용서해 준다면 누군가가 또 도전하겠지. 그리고 두 번째에는 되찾아 올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고. 번즈 백작. 보장할 수 있나?”

없다. 엘리엇은 유제니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쉽게 말하면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거다.

그도 알았다. 본보기의 중요성을.

하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말은, 작위 박탈은 너무 가혹하다는 겁니다.”

유제니는 엘리엇의 말에 다시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몸을 돌려 알현실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번즈 백작이 귀족의 편을 들 줄은 몰랐군.”

“전하.”

순식간에 엘리엇이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는 감히 유제니를 붙잡지도 막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굳이 미움받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백작과 그 친구들만 벌을 주고 백작가가 존속되도록 한다면 저들은 전하께 감사할 수도 있잖습니까.”

천천히 걷던 유제니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메마른 눈으로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모든 것에 지치고 신물이 난 표정에 엘리엇의 가슴이 미어졌다.

“이즈의 번즈 백작은 낙관주의자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걸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으냐는 엘리엇의 표정에도 유제니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방금 그 일로 저 사람들의 증오는 전하를 향했을 겁니다. 지금쯤 당신을 독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독살당할 것이 두렵나?”

그건 아니다. 엘리엇은 그렇지 않다고 하려다 그녀의 표정에 어린, 아주 약간의 재미있어하는 감정에 마음이 풀어졌다. 그가 그녀의 색다른 모습에 흔들린 것처럼 그녀 역시 그의 색다른 질문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개죽음이니까요.”

“그런가?”

다시, 유제니의 질문이 이어졌다. 엘리엇은 그녀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꼿꼿하게 서서 말했다.

“먼저 질문한 건 저였을 텐데요.”

아주 잠깐,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눈동자에 감정이 차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을 버티게 하는 게 뭘까?”

“지금 같은 상황이요?”

“자네는 수많은 전투와 길고 긴 전쟁을 겪고 있으니 알겠지. 끝나는 날이 요원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사람들이 살아남고야 말겠다고 이를 악물고 버티게 하는 것. 그게 무엇일까.”

당연히 엘리엇은 알았다. 그는 그의 부하들이, 병사들이, 그가 길고 잔인한 밤을 어떻게 버티는지 봐 왔다.

“희망이죠.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유제니는 단칼에 부인했다.

“아닐세.”

“그럼 무엇입니까?”

“강렬한 감정이지. 희망, 사랑, 증오. 언젠가 저년을 죽여 버리고야 말겠다는 복수심.”

그제야 엘리엇은 유제니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의 공적이 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원망을 꿋꿋이 받아 내, 그들이 살아남고야 말겠다고 할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엘리엇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잠시 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전하의 말씀대로 사랑을 받아도 되잖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성녀가 되는 게 더 나았을 텐데요.”

그러자 유제니는 엘리엇을 아주, 아주 한심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그 잔인하고 짧은 감정조차 달콤하게 느껴져서 엘리엇은 잠시 당황했다.

“번즈 백작,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 미워하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하다네. 그게….”

“백작님, 아침입니다.”

다음 순간, 엘리엇은 눈을 떴다. 꿈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집사의 얼굴에 그는 반사적으로 베개 밑에 넣어 둔 검을 찾았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번즈 백작이 집사가 깨울 때까지 자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집사는 혹시 그의 몸이 좋지 않은가 싶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마터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는 것도 모르고.

배게 밑에 넣어 둔 검 손잡이에 손이 닿자 엘리엇은 지금 여기가 어딘지 생각났다. 그는 검을 놓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

그냥 꿈을 꿨을 뿐이다. 그리 좋은 꿈은 아닌.

“옷은 준비해 놨습니다.”

집사는 그렇게 말하며 옷걸이에 건 옷을 들어 보였다. 오늘은 번즈 백작이 입궐하는 날이다. 왕실에서 미혼인 남성 귀족들만 식사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그냥 친목을 위한 초대였지만 엘리엇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알았다. 빨리 결혼하라는 압박을 주기 위한 초대라는 것을.

예전의 엘리엇이라면 무시했을 것이다. 왕궁의 얼간이들과 어울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번의 엘리엇은 왕궁의 얼간이들에게 얼굴을 비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새로 생긴 커피 하우스에 갈까 하는데.”

식사가 끝나자 최근 커피 하우스에 투자했다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왕궁에서도 차를 마실 자리를 제공해 줬지만, 지금은 최대한 왕궁에서 멀어지고 싶다.

물론 자신이 투자한 커피 하우스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자네가 투자한 거기?”

누군가가 알아주자 남자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는 최근 미혼 귀족 남성들에게 공공의 적이 된 번즈 백작을 돌아보았다.

커피 하우스에도 투자하는 판단력과 센스, 재력이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거기 없었다.

“번즈 백작?”

그가 엘리엇을 찾자 다른 사람들도 엘리엇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이 사람 어디 갔어? 다들 두리번거리며 번즈 백작을 찾기 시작했다.

공공의 적이지만 동시에 제각각의 목표기도 하다. 부유하고 젊으며 잘생긴 귀족이라면 누구에게나 훌륭한 사윗감이기 때문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를 둔 남자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번즈 백작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번즈 백작.”

그런 엘리엇의 뒤를 따라온 건 비스컨 남작이었다. 올리버는 그가 다른 귀족들에게서 꽤 떨어진 다음에야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식사 시간 중에도 엘리엇은 가장 많은 질문을 받는 참석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바쁜가? 커피 한잔하러 가지.”

다른 남자들처럼 올리버도 엘리엇에게 커피를 권했다. 최근 남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음료였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능숙하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커피를 별로 안 좋아해서.”

“안 좋아한다고?”

예상치 못한 엘리엇의 대답에 올리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장 인기 있는 음료라는 건 차마 싫다고 말하기 어려운 음료라는 말이기도 하다. 커피를 즐기는 건 유행이었고 대놓고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촌스럽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엘리엇은 거리낌이 없었다. 올리버는 엘리엇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그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점이 올리버에게는 더 괜찮게 다가왔다. 오, 좀 멋있는데?

“뭐, 그럼 맥주 한잔하던가. 나도 커피는 별로야.”

쓰고 텁텁해서 영 별로였다. 그럼에도 커피 하우스에 드나드는 건 그게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술도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안 좋아하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는 즐기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끝이 없을 것 같다.

“제게 할 이야기가 있다면 그냥 하시죠.”

이 녀석 봐라. 엘리엇의 건방진 말에 올리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이쪽이 더 낫다. 술과 커피를 앞에 두고 날씨가 어떠니 주변 사람이 어떠니 이야기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물론 재산이나 능력을 자랑하는 건 좋아하지만 비스컨 백작가는 자랑할 정도의 재산이 없다. 심지어 사교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그의 외모조차 엘리엇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올리버가 엘리엣에게 내세울 점이라고는 비스컨 백작가가 유서 깊은 집안이라는 것뿐이다.

“유제니 말이야.”

아, 하나 더 있군. 올리버는 동생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표정이 변하는 엘리엇을 보고 떠올렸다. 그에게 엘리엇보다 나은 게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번즈 백작이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여자를 동생으로 뒀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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