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86/239)

91화. 18 – 5

유제니는 엘리엇이 접어 둔 담요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레이디 비스컨이고요. 그러니까 나는 우리 둘 다 엉덩이가 덜 아팠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어떤 레이디인지는 상관없습니다, 유제니.”

엘리엇은 유제니가 펼친 담요를 빼앗아 다시 접기 시작했다. 아, 진짜.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에 좋은 거니까요.”

그건 반칙이다. 유제니는 다시 그녀의 앞에 접은 담요를 내려놓고 앉으라고 손짓하는 엘리엇을 노려봤다.

“그리고 전 당신보다 튼튼하거든요.”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조금 전까지의 무뚝뚝한 태도와 달리 엘리엇의 얼굴이 순식간에 장난꾸러기처럼 변했다. 유제니는 그의 얼굴에 홀려 저도 모르게 담요 위에 앉아 버렸다.

어휴. 넘어갔네.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좋아한 건 꿈에 나온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겠죠.”

“오, 아닙니다.”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피크닉 바구니에서 병을 꺼내며 부인했다. 그는 코르크 마개를 뽑으며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솜씨 좋게 잔을 꺼내 음료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건 당신입니다. 유제니. 비스컨 양도 레이디 비스컨도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도 아닌 그냥 유제니요.”

덤덤한 고백이었지만 유제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엘리엇은 음료를 따른 잔을 유제니의 손에 건네주었다. 차라고 생각했는데 레모네이드였다.

“어닝이요.”

잔을 받아 든 유제니가 입을 열었다. 그리 반가운 이름이 아니다. 엘리엇은 인상을 썼지만, 유제니를 쳐다볼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당신은 이미 알았던 거죠? 그에게 남자 애인이 있다는 거요.”

아주 잠깐 엘리엇은 유제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렌시드 경의 사망 소식은 처음에는 그리 큰 사건이 아니었다. 그 일을 사교계 사람들이 크게 떠들어 대기 시작한 건 렌시드 경과 동석한 남자의 존재가 알려진 다음이었다.

“누구나 마차 옆자리에 매춘부를 태운 채 사망하면 소문이 크게 나죠.”

알았다는 말이다. 유제니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전부터 궁금했다. 엘리엇이 어닝에게 유독 무례하게 구는 이유가.

처음엔 어닝이 엘리엇에게 예민하게 구니까 받아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예민하게 구는 것 이상으로 엘리엇의 태도가 무례했다.

“그럼, 그러면요.”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걸까.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유제니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를 힐끔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어닝을 싫어한 건 그의 그, 성향 때문이었나요?”

생각도 못 한 질문에 엘리엇은 잠시 멈춰 버렸다. 그는 유제니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런 반응에 유제니가 재빨리 덧붙였다.

“올리버가, 오라버니는 엄청 싫어했거든요. 전부터 궁금했어요. 당신이 왜 그렇게 어닝을 싫어했는지요.”

올리버는 아주 질색했다. 물론 어닝의 성향보다는 그가 비스컨 가를 속였다는 부분에 더 화를 내긴 했지만. 그런 오라버니의 모습에 유제니는 어쩌면 엘리엇이 어닝을 경멸한 것도 그의 성향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엘리엇은 유제니가 벗어 놓은 구두를 정리하며 깔끔하게 말했다. 그가 어닝을 싫어한 것과 그의 성향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의 부하 중에도 어닝처럼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 있다. 하지만 그는 별 관심 없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누가 무슨 짓을 하는지 그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게 범죄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 물론 범죄도 관심 없다. 그가 범죄는 안 된다고 제한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와 그의 회사는 범죄와 얽혀서는 안 된다. 그래야 유제니의 옆에 있을 때 그녀에게 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왜 그렇게 싫어한 거예요?”

호기심 어린 유제니의 표정을 보고 엘리엇은 약간 허탈해져서 몸을 뒤로 기댔다.

“진심으로 물어보시는 겁니까?”

진심으로 묻는 게 아니면 뭔데? 유제니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엘리엇은 “허”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마치 대단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제니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그가 당신의 약혼자였으니까요.”

“헉” 하고 유제니의 입이 딱 벌어졌다. 당연한 사실이 그녀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한동안 유제니는 자신이 몰랐던 사실에 놀라 그대로 멍하니 엘리엇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퍽 귀여워서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진짜로 몰랐을 줄은 몰랐다. 그는 유제니의 명예를 위해 그녀에게서 살짝 떨어지며 말했다.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오, 아니, 아니….”

유제니는 당황한 나머지 손을 흔들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녀가 당황하는 것을 본 엘리엇은 결국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워 죽겠다.

엘리엇이 웃는 모습을 본 유제니는 그가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깨닫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마음에 안 든다. 안 드는데 너무 소년처럼 웃어서 화낼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짓궂네요, 번즈 백작.”

한참을 웃은 엘리엇이 큭큭대기 시작하자 유제니는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쭉 유제니에게 애정을 표시해 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고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엇이 어닝을 질투하는 줄은 몰랐다.

“그럼 당신 꿈에서도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결혼하지 않았나요?”

유제니의 질문에 음료를 마시던 엘리엇이 멈칫했다. 그는 찻잔을 든 채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알고 싶으십니까?”

당연하다. 유제니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라넌 경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남자를 싫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고? 누군가와 결혼하는 게 꿈이었던 적은 없지만, 그녀는 귀족가의 아가씨다. 귀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그 가문을 다스려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다.

그런데 아예 결혼하지 않았다니. 심지어 남자를 싫어했다니.

“당신 말이 맞아요. 모르는 게 낫겠네요.”

어쩌면 엘리엇의 꿈과 라넌 경의 꿈은 좀 다른지도 모른다. 몇 명의 꿈이 완전히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거부감이 느껴졌다.

모르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유제니를 보고 엘리엇은 빙그레 웃었다. 비스컨 전하도 그랬다. 물론 그녀는 레이디 비스컨과 달리 모르는 게 나은 경우가 극히 드물었지만.

“전하의 몸에 손을 댔으니 혼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당연한 일로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그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구했다던 꿈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유제니는 잠시 그게 무슨 소린가 하다가 곧 알아듣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꿈속의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정말 그녀라면 몸에 손을 댔다고 근신형을 주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번즈 백작은 왕을 구했다. 당연히 감사 인사와 함께 상을 받아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거다.

“나는 그게 당신을 벌준 게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유제니는 재빨리 덧붙였다.

“아, 물론 당신이 벌을 받은 건 맞지만요. 내 말은 당신에게 경고를 한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엘리엇은 바람이 조금 불자 자신의 재킷을 벗어 유제니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덕분에 이제 그녀는 재킷에 숄을 두르고 엘리엇의 재킷까지 덮은 꼴이 되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겠군.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하지만 재킷에 밴 엘리엇의 냄새가 꽤 근사해서 기분이 풀어졌다.

“왕이라면서요. 왕이라는 건 존엄해야 하잖아요. 감히 손댈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만만한 왕은 누구나 처리해 버리려 할 수 있다.

감히 손댈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암살하려다가도 멈칫할 수 있으니까.

찰나의 순간으로 목숨을 구한 사람은 많다. 유제니는 엘리엇과 클레어의 꿈에 등장한 자신이 엘리엇을 호되게 혼을 낸 이유가 그거라고 생각했다.

“코끼리의 말뚝처럼 말이죠?”

엘리엇의 말에 유제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게 뭐야? 그녀의 표정을 본 엘리엇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코끼리라는 동물은 어릴 때 말뚝에 묶어 두면 성체가 된 다음에는 도망칠 수 있음에도 어릴 때의 기억으로 도망치지 못한다더군요.”

그의 설명에도 일그러진 유제니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코끼리가 뭔지 모르나? 엘리엇은 다시 입을 열었다.

“코끼리는 코가 긴 동물인데….”

“코끼리가 뭔지는 알아요.”

책에서 봤다. 그녀의 표정이 이상했던 건 코끼리가 어떤 동물인지 몰라서도, 엘리엇의 설명이 놀라워서도 아니었다.

물론 코끼리가 그런 줄은 몰랐지만.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굉장히 끔찍하게 들려서요.”

그다지 끔찍하게 들리지 않았는데.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재빨리 사과했다.

“비유가 잘못됐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당신의 비유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그저.”

그저?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유제니는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당신을 이용한 거잖아요. 도와준 사람인데. 마녀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었네요.”

“유제니.”

엘리엇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잔을 놓고 유제니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건 이용이 아니었다. 그가 도와준 것도 아니었고.

번즈 백작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검이자 방패였다. 그는 그 사실을 뿌듯하게 여겼다. 그녀를 구한 것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도와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걸 모른다. 엘리엇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마녀라고 불린 건 그래서가 아니었습니다.”

마녀 비스컨. 많은 사람이 그렇게 불렀다. 마녀라고. 물론 어느 정도는 그녀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벌을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녀 비스컨이라 불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신 주변에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시무룩해 있던 유제니는 엘리엇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적이라고?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기적인데 왜 마녀예요?”

기적을 일으켰으면 보통 성녀가 아닌가? 어리둥절해하는 유제니에게 엘리엇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두려워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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