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85/239)

90화. 18 – 4

“맙소사.”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마차를 본 젊은 남자 하나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마차에 탄 사람을 확인하고 입을 딱 벌렸다.

번즈 백작과 레이디 비스컨이다.

“번즈 백작이 부유하다더니….”

그의 중얼거림에 같이 걷던 사람들도 고개를 들어 마차에 탄 사람을 확인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번즈 백작이 부유하다는 말은 들었다. 소문으로야 드래곤의 둥지에서 엄청난 보석을 가지고 나왔다고 하니 다들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가 부를 적극적으로 자랑한 적은 없다. 그가 입고 다니는 옷과 타고 다니는 말은 최고급이긴 하지만 사교계의 다른 부유한 사람들과 비슷하다.

그러니 유행이나 재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면 번즈 백작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물놀이 때 번즈 백작이 배를 띄웠다더군요.”

패터슨 부인의 말에 패터슨 양과 데이트 하던 포스터 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물놀이 때 배를 띄우는 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다.

물론 약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긴 하지만 그걸로 엄청나게 부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거마로트 공작가의 배와 크기가 거의 비슷했대요.”

강에 큰 배가 두 대나 떠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다들 두 번째 배는 누구 배냐고 이야기하던 참이다. 패터슨 부인의 말에 포스터 경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정도 배를 소유하고 있다고요?”

마차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저 마차는 굉장히 비싸긴 하지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번즈 백작만 있는 게 아니다.

돈 좀 있는 젊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탐을 낸다. 좀 무리해서 사는 신사도 분명 있다.

하지만 거마로트 공작가의 배와 비슷한 크기의 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마로트 공작가와 재산이 비슷하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그 배에 탄 사람은 없다고 들었는데요?”

거마로트 공작의 배와 마찬가지로 번즈 백작의 배에도 초대받은 사람이 없었다. 아니, 번즈 백작의 배에 타 봤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다.

“듣기론 비스컨 가의 사람들만 초대받았다는군요.”

패터슨 부인의 말에 이번에는 패터슨 양조차 입을 딱 벌렸다. 비스컨 가의 사람들이 번즈 백작의 배에 초대받아서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대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아주 열렬하게 구혼하는 모양이네요.”

패터슨 부인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번즈 백작의 옆에 앉아 있는 레이디 비스컨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레이디 비스컨은 예쁘장하긴 하지만 그렇게 미인은 아니다. 다들 그녀가 비스컨 가에서 가장 외모가 떨어진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워낙 비스컨 백작과 그 아들이 잘생겼으니 상대적인 이유도 있겠지.

“괜찮은 사람이죠.”

“친절하고요.”

놀랍게도 번즈 백작이 열렬하게 구혼한다는 이유만으로 유제니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렌시드 경에게 파혼 선언을 하고 나서 레이디 비스컨의 평가는 떨어졌다. 심지어 그녀가 렌시드 경을 무시했다거나 필요 이상으로 콧대가 높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더 그랬다.

“성미가 까다롭고 콧대만 높다던데요.”

포스터 경의 말에 패터슨 양과 패터슨 부인의 시선이 부딪쳤다.

아주 잠깐, 레이디 비스컨은 제대로 된 집안과 재산을 가진 남자라면 어느 누구도 쳐다보지 않을 여자로 전락했다. 그녀에게 구혼할까 생각한 자들은 작위도 재산도 변변치 못한 자들뿐이었으니까.

그건 렌시드 자작 부인과 렌시드 경이 떠들고 다닌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레이디 비스컨이 큰 이유 없이 렌시드 경에게 파혼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사람들이 레이디 비스컨이 까탈스럽고 콧대 높은 여자라고 생각하기 충분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약혼자를 퇴짜 놓다니,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여자라는 증거다.

“그 반대일 것 같은데요. 저라면 그렇게 입 다물고 있어 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패터슨 양의 말에 포스터 경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나? 다시 그녀와 패터슨 부인의 시선이 부딪쳤다. 패터슨 부인은 딸을 대신해서 말했다.

“그녀의 약혼자요. 남자 애인이 있었대요.”

“허.”

포스터 경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사교계에서 가십거리가 되긴 하지만 그게 범죄는 아니다. 물론 많은 여자가 결혼을 기피하긴 하겠지. 문제는.

“레이디 비스컨은 몰랐나 보군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던 포스터 경은 가까스로 예의에서 어긋나지 않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패터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걸로 레이디 비스컨이 매우 화를 냈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커피 하우스에서요.”

그 이야기라면 포스터 경도 알았다. 레이디 비스컨이 커피 하우스에 쳐들어왔다고 들었다. 그걸로 행동이 방정맞다는 말도 잠깐 돌았고.

“몰랐습니다.”

“자기가 비난을 받으면서 입을 꾹 닫고 있었다죠.”

“대단한 사람이에요.”

패터슨 양은 그렇게 말하며 점으로 보이는 레이디 비스컨을 감탄스럽게 쳐다봤다. 그녀라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거다.

약혼자가 자신을 속였으니까. 심지어 비스컨 가의 집안사람들까지 우롱한 사건이다.

“순진한 걸 수도 있지. 융통성이 없다니까.”

그렇게 말한 패터슨 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사건으로 비스컨 남작이 펄펄 뛰면서 렌시드 경을 찾아다녔다고 하더군요. 안타깝게도 그가 먼저 도망친 모양이지만요.”

진심으로 렌시드 경이 비스컨 남작의 손에 혼쭐이 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는 패터슨 부인의 말에 포스터 경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단 말이야? 전혀 몰랐다.

그 정도로 렌시드 경의 스캔들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였다.

“저기서 차를 마실까요?”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자 엘리엇이 살짝 벗어난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나무 밑에 가져온 담요를 깔고 차를 마시면 될 것 같다.

마차가 멈추자 엘리엇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가 유제니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마차가 너무 높아서 누군가가 손을 잡아 줘야 한다.

하지만 엘리엇은 두 팔을 뻗고 있었고 그 행동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유제니는 약간 짜증을 내며 말했다.

“혼자 내려갈 수 있어요.”

“압니다.”

엘리엇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는 계속 유제니에게 두 팔을 내민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움직이면 어지러울 수 있으니까요. 마차에서 추락하는 건 그리 즐거운 경험이 아닐 테고요.”

올리버도 이렇게까지 그녀를 과보호하지 않는다. 아니, 올리버가 아니라 어머니겠구나.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엇의 어깨를 짚었다.

짜증 나지만 그의 말이 옳다. 그녀는 오늘 온종일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다. 제대로 걷지도 않았으니 갑자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이면 어지러울 수 있다.

엘리엇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힘들이지도 않고 그녀를 들었다. 문득, 유제니의 머릿속에 클레어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꿈에서 내가 크게 혼냈을 때, 정말 화 안 났어요?”

유제니를 바닥에 내려놓으려던 엘리엇의 행동이 멈췄다. 그는 그녀를 든 채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질문을 하기엔 그리 적절하지 않은 타이밍이었나? 유제니가 잠깐 후회했을 때 엘리엇이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거짓말하고 있네. 유제니의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라넌 경과 이야기할 때 그랬잖아요. 화나서 그런 게 아니라고.”

젠장. 엘리엇의 입술이 작게 욕을 그렸다. 어허. 유제니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그의 입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미소로 변했다.

덕분에 유제니는 엘리엇의 손이 아직 자신의 허리에 닿아 있는 것에 감사했다. 그 미소 때문에 아주 잠깐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과 라넌 경의 꿈이 비슷한 게 아니라 같은 꿈인 거네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꿈도 같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이 같은 꿈을 꿨다면 뭔가의 예지 같은 거일 수도 있고.

“그건 꿈입니다. 지금의 당신과 아무 상관 없는 일이고요.”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고 마차에서 비스컨 가의 집사가 준비해 준 피크닉 바구니와 담요를 꺼냈다. 간단하게 다과를 즐길 도구가 들어 있다. 찻잔과 음료가 든 유리병. 비스킷까지.

유제니는 엘리엇이 피크닉 바구니를 들지 않는 반대편 팔을 내밀자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담요는 내가 들게요.”

“절 모욕하시는 겁니까?”

“네?”

당황하는 유제니에게 엘리엇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것도 못 들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손이 부족한 것 같아서….”

한 손으로도 엘리엇은 피크닉 바구니와 담요까지 들 수 있다. 이 남자는 손도 크네. 유제니는 그의 손을 확인하고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저도 도와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녀를 마차에서 들어서 내려 주는 걸 말하는 거다. 하지만 꿈에서 유제니에게 호되게 혼이 난 뒤로는 한 번도 그녀를 들어 옮기지 않았다고 들었다.

유제니는 풀밭에 담요를 까는 엘리엇에게 말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아니었을 거예요.”

담요를 정리하던 엘리엇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는 유제니를 힐끔 보더니 두 번째 담요를 접었다. 그리고 먼저 펼친 담요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아니요. 제 잘못이었습니다.”

그건 그의 잘못이었다. 상대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다. 감히 그녀의 몸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서는 안 됐다.

엘리엇은 유제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를 접은 담요 위로 안내했다.

풀밭에 담요 하나만 깐 거라 유제니가 앉기는 좀 불편할 것이다. 그는 다음에는 그녀가 앉을 수 있도록 쿠션도 하나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도 엉덩이가 아플 텐데요.”

유제니는 엘리엇이 자신을 배려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담요가 두 장이라면 두 장 다 넓게 깔아야 한다. 그녀만 좋은 자리에 앉는 건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엘리엇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녀는 엘리엇이 제공하는 모든 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허락하지 않은 건 단 하나뿐이었다.

“당연하죠. 그녀는 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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