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4/239)

89화. 18 – 3

“엘리엇은, 아니, 번즈 백작은….”

그걸 알았느냐고 물어보려던 유제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처음부터 어닝에게 적대적으로 굴었던 게 이것 때문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어닝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를 싫어했던 거다. 올리버도 그랬다. 어닝과 허드슨 경의 사이를 알게 된 올리버는 기겁하며 싫어했다.

“번즈 백작도 알았을걸요?”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번즈 백작이 몰랐을 리 없다는 클레어의 말에 유제니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 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저와 번즈 백작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는 말이죠?”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클레어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과 클레어가 그랬듯, 그녀와 번즈 백작의 관계도 좀 복잡했다.

“연인 관계였냐는 질문이라면, 네. 그런 쪽으로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어요. 전하께선 그….”

“남자를 싫어했다고요.”

유제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클레어의 말을 받았다. 그래도 납득이 가진 않는다. 남자를 싫어한다고? 내가? 역시 꿈이라 좀 다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클레어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두 분의 사이가 안 좋다고 생각했어요.”

“번즈 백작이 날 안 좋아했나 보죠?”

“오, 아뇨. 굳이 따지면 그 반대에 가까운데….”

그렇다고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번즈 백작을 싫어한 건 아닌데. 클레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한 번은 사신이 전하를 암살하려 한 적이 있어요.”

그건 비열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발시안은 망하기 직전의 나라였고 새로운 왕 비스컨이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었으니까.

마녀 비스컨만 죽으면 발시안은 멸망한다. 그게 이웃 나라들의 생각이었다. 설령 마녀 비스컨을 죽이지 못한다 해도 암살을 시도한 이는 사신이다. 비스컨은 당연히 사신을 죽일 테고 그걸 빌미로 전쟁을 걸 수 있다.

“오.”

유제니는 신음을 내뱉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레이디 데번도 역모를 꾀했다고 했다. 이웃 나라에서는 암살자를 보냈고.

사람들의 꿈에서 그녀는 꽤 힘든 생활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번즈 백작은 당신을 번쩍 들어서 왕좌 뒤로 숨겼거든요.”

다행히 사신은 생포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사신의 처분을 두고 사람들이 다투기 시작했다. 살려 보내야 한다는 것과 죽여야 한다는 것.

감히 왕을 암살하려 했으니 살려 보낼 수 없다는 쪽이 훨씬 우세하긴 했다. 한심하지만 어쩔 수 없는 반응이기도 했다.

발시안은 몰락하는 나라였으니까. 남은 건 자존심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전하께서 번즈 백작을 엄하게 꾸짖으셨죠. 감히 자신의 몸에 손을 댔다고요.”

벌로 번즈 백작은 일주일 근신형에 처해졌다. 암살자에게서 구해 준 생명의 은인에게 벌이라니, 말도 안 된다.

“번즈 백작이 화가 났겠네요.”

유제니의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같은 입장이라면 그녀는 화가 났을 테니까.

하지만 번즈 백작은 반발하지 않고 얌전히 근신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그 일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다른 귀족이 그때 전하께서 너무하셨다고 말했을 때도 번즈 백작은 무표정하게 귀족을 쳐다봤을 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레어는 유제니의 성격이 못됐다고 생각했다. 남들 말대로 진짜 마녀 같다고도 생각했고.

“그랬을지도요. 진짜로 그 뒤로 한 번도 전하를 들어서 옮긴 적이 없거든요.”

그건 그냥 명령에 따른 거 아닌가? 유제니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 앞에서 엘리엇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엄마야. 깜짝 놀라는 유제니와 클레어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쳐다보고 문틈으로 집사와 엘리엇을 발견했다.

막 문을 두드리려던 참이었다. 빅스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그가 차를 내간 하인에게 문을 닫고 오라고 지시했는데.

동성 손님이 찾아오면 문을 닫게 한다. 그래야 지나가면서 대화를 엿듣지 못할 테니까. 그의 지시대로 하인은 문을 제대로 닫고 나왔다. 문이 열린 건 올리버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는데….”

집사의 사과에 유제니는 체면을 차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사를 위로했다.

“아니에요. 아까 올리버가 들어왔거든요. 문을 제대로 안 닫고 나간 모양이에요.”

맙소사. 빅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련님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제니도 한 소리 할 생각이다. 그녀는 빅스에게 괜찮으니 그만 나가 봐도 된다고 말한 뒤 엘리엇에게 물었다.

“일찍 왔네요.”

오늘 그도 온다고 했다. 어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점심 식사 후에 잠깐 들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집사가 그를 바로 응접실로 안내한 것이다.

엘리엇은 일찍 왔다는 말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다지 일찍 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유제니가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금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몸이 괜찮으신지 걱정이 돼서요.”

괜찮다.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어. 유제니뿐 아니라 클레어도 놀랐다. 엘리엇은 클레어를 무시하고 유제니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주춤 물러나는 그녀의 뒤에서 소파에 떨어진 숄을 들어 올렸다.

“이걸 걸치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은데.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숄을 어깨에 덮어 주는 엘리엇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클레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꿈과 똑같았다. 번즈 백작은 꿈에서도 이랬다. 이런데 어떻게 꿈과 현실을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고정을 하는 게 좋겠군요.”

유제니의 어깨에 숄을 둘러 준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뭘 하는 거지? 어리둥절해하는 두 여자의 시선을 받으며 그는 작은 상자를 열어 작은 브로치를 꺼냈다. 그리고 유제니의 숄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했다.

“꿈에서도 이랬어요?”

남에게 선물을 주는 게 능숙하다. 유제니의 어이없다는 질문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배제한 대화에 엘리엇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더 있고 싶은데….”

시계를 확인한 클레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훈련이 있다.

그만 떠나야 한다는 말에 유제니의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클레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와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유제니의 환대에 클레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녀는 유제니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또 방문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엘리엇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현관까지 나가서 클레어를 배웅해 주는 유제니 곁에 서 있다가 팔을 내밀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는 태도에 유제니는 엘리엇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산책하고 싶은데요.”

“바람이 차서….”

“맙소사, 엘리엇. 지금 여름이에요.”

그렇긴 하다. 하지만 유제니는 어제 물에 빠졌다. 엘리엇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마차를 타고 공원을 도는 건 어떨까요?”

“걷고 싶어요.”

오늘 아침부터 계속 집 안에만 있었다. 신선한 공기와 햇빛이 필요했다. 유제니의 고집에 엘리엇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지치시면 제가 안고 올 수 있으니까요.”

“빅스, 마차 준비해 줘요.”

유제니의 바람대로 공원은 신선한 공기와 햇빛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점심시간이 지나서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도 한풀 꺾인 뒤였다.

“레이디 비스컨과 번즈 백작 아닌가요?”

한창 산책을 즐기던 사람들은 반짝이는 사륜 오픈 마차가 지나가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요새 유행하는 차체가 높은 마차였다.

공원 안에 있던 모든 남자가 넋을 잃고 마차를 쳐다보는 것을 깨달은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에게 마차를 준비해 달라고 하자 엘리엇은 자신의 마차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처음부터 유제니가 산책하고 싶다고 할 줄 알았다는 거다.

어째 엘리엇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느낌이다. 유제니는 마차가 얼마나 높은지 확인하고 엘리엇에게 물었다.

“마차가 이거 말고 또 있지 않나요?”

그녀는 전에 엘리엇의 마차를 탄 적이 있다. 그때도 사륜마차였지만 지붕이 있었다. 심지어 사두마차였으니 적어도 엘리엇은 말 네 마리에 마차 두 대가 있다는 말이다.

“네. 이 마차는 오늘 도착한 겁니다.”

“높은 마차를 좋아하는 줄 몰랐어요.”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피식 웃었다. 높은 곳을 좋아하냐는 의미냐면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에게 높고 낮음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사실 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럼 왜 샀어요?”

지나갈 때마다 엘리엇의 마차를 발견한 사람들이 넋을 잃고 쳐다본다.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조차도.

유제니는 이런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워서 어깨를 움츠렸다. 비싼 마차를 타면 즐거워하는 올리버와 달리 그녀는 이런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올리버가 보면 부러워 미치려고 하겠군.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에게 엘리엇이 말했다.

“당신이 타는 걸 보고 싶었거든요.”

뭐라고? 생각도 못 한 말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확실히 이 마차로 전속력으로 달리면 얼마나 빠를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이런 마차가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다.

“농담이죠?”

그녀가 타는 걸 보기 위해서 마차를 샀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냥 사는 김에 그녀를 태워 주는 거겠지. 유제니는 엘리엇이 말없이 씩 웃자 역시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웃으며 말했다.

“기분 좋은 농담이긴 하네요.”

그러고 보니 클레어가 그랬다. 엘리엇은 그녀의 꿈에서도 지금과 똑같이 굴었다고.

두 사람의 꿈이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같은 게 아닐까. 미친 생각이지만 유제니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아까 클레어와의 대화에 끼어든 엘리엇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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