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3/239)

88화. 18 – 2

클레어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튀어나온 핀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긴장을 풀면 찔러 버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클레어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쓸모도 없는 남편에게 휘둘리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혹시라도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만나게 되면 이번에는 반드시 그녀의 도움이 되겠다고.

“제가 기사단에 들어간 건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그녀는 늘 번즈 백작이 부러웠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검이 되어 주는 그가. 무슨 일이든 자신이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엘리엇 번즈가.

“제가 왕족이 아닌 건 알죠?”

유제니는 클레어의 말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그녀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꿈인 걸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클레어의 모습에 레이디 데번이 겹쳐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차마 그렇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클레어는 흰 사자 기사단이다. 검은 늑대 기사단이 왕을 지키는 기사단이라면 흰 사자 기사단은 왕족을 지킨다. 그러니 어느 쪽이건 기사단에 들어갔다면 유제니를 지킨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클레어도 그걸 알았다.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갑자기 두 사람이 있는 응접실의 문을 누군가가 노크하더니 허락도 없이 벌컥 열고 들어왔다.

“유제니, 혹시 너한테 내 편지 간 거 아냐?”

올리버였다. 오라버니의 등장에 유제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손님과 함께 있는 응접실에 허락도 없이 벌컥 들어와서 용건을 말하는 건 무례한 행동이다.

그런 무례한 행동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혈육이 한다는 점이 유제니는 창피했다. 하지만 올리버는 그녀의 오라버니다. 좀 모자라긴 하지만 혈육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올리버와 클레어를 소개해 주었다.

“클레어, 알고 있겠지만 이쪽은 제 오라버니 올리버 비스컨 남작이에요. 올리버. 이쪽은 내 친구 클레어 라넌 경이야.”

친구라는 말에 클레어의 얼굴이 밝아졌다. 친구.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자리였다. 비록 그녀가 말동무라고 해도 실제로 동무였던 건 아니었으니까.

“어, 손님이 있는 줄은 몰랐어.”

생각이 짧았을 뿐이지 무례할 생각은 없었던 올리버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사과했다. 그리고 뒤늦게 유제니의 라넌 경이라는 소개에 반응했다.

“라넌 경이라고?”

“흰 사자 기사단이야.”

유제니의 설명에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클레어를 빤히 쳐다봤다. 흰 사자 기사단이라면 발시안의 양대 기사단 중 하나다.

“오, 대단하네. 마이너인가?”

올리버의 질문에 클레어의 얼굴에 삐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경멸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가십에 관심이 많으신 거로 아는데 순진한 척하시는 겁니까, 아둔하신 겁니까?”

올리버도 무례했지만, 클레어는 더 무례하다. 유제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딱 벌렸다.

당황한 건 올리버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유제니가 그 머리에 지식을 넣으려는 노력이라도 좀 하라고 타박한 적은 있지만 생판 남에게 아둔하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다.

덕분에 그는 그가 가십에 관심이 많다는 비밀을 클레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 버렸다. 면전에서 뺨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 탓에 올리버는 얼굴을 붉히며 클레어를 을러 댔다.

“여자인 걸 고맙게 여겨. 남자였으면 한 대 맞았을 테니까.”

“올리버!”

놀란 유제니가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클레어는 올리버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댁이야말로 여자가 아닌 걸 고맙게 여기는 게 좋아. 여자였다면 그 예쁜 눈을 못 뜨고 다니게 만들었을 테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유제니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둘 다 그만두지 못해?”

여기가 어디라고 싸움질을 하는지 모르겠다. 유제니는 제일 먼저 올리버에게 말했다.

“사과해, 올리버.”

“뭐? 내가 뭘….”

뭘 잘못했냐고 투덜거리려는 올리버에게 유제니가 눈을 부라렸다. 그녀의 손님이다. 여기는 비스컨 저택이고. 비스컨 백작의 후계자라는 사람이 동생의 손님을 협박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미안.”

올리버가 사과하자마자 유제니가 클레어를 쳐다봤다. 클레어는 그녀가 자신에게 말하기도 전에 재빨리 말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라넌 경.”

유제니의 지적에 올리버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클레어의 사과가 그를 향한 게 아닌 유제니를 향했음을 깨닫고 클레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올리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유제니의 지적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정말로 이 남자가 싫었다. 올리버 비스컨. 처음 꿈에서 눈을 떴을 때는 반드시 이 남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라넌 경, 내 오라버니에게 사과했으면 좋겠어요.”

유제니는 클레어가 왜 이렇게 올리버를 싫어하는지 궁금해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어제도 올리버를 경계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요, 레이디 비스컨.”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올리버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를 씹어 먹어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실례.”

“이게 사과야?”

울컥한 올리버가 어이없다는 듯 유제니에게 물었다. 아, 왜 나한테 이래?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는 두통이 오는 것 같아서 머리를 짚으며 오라버니에게 말했다.

“오라버니도 똑같이 말했잖아.”

“난 미안이라고 했고. 이 여자는 실례라고 했거든?”

유제니는 대체 그 두 개가 뭐가 다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그녀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라넌 경에게 지금 이 여자라고 했으니 그걸로 퉁쳐.”

“뭐라고?”

어이없다는 올리버와 달리 클레어는 웃으면서 유제니를 보고 있었다. 이런 점은 그녀의 꿈과 똑같았다. 두 귀족이 싸워서 유제니에게 쫓아온 적이 있다.

그녀는 나이가 몇인데 애들처럼 싸우고 쫓아오냐고 일갈했고 대충 사과하고 끝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때도 귀족들은 서로의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꼬투리 잡았다.

“사과하죠, 비스컨 남작.”

클레어가 깔끔하게 사과하자 씩씩대던 올리버도 더는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유제니는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쳐다봤고 그가 다시 사과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클레어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저는 마이너가 아니고 메이저입니다.”

모든 기사단에는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다. 기본적으로 둘 다 기사단이긴 하지만 마이너는 메이저의 대체 병력이다. 당연히 메이저는 현역에서 실력이 가장 좋은 사람들로만 구성된다.

“음, 어. 무례를 사과하겠습니다. 라넌 영애. 아니, 라넌 경.”

올리버는 우물우물 사과하고 재빨리 나가 버렸다. 괜히 창피만 당했다. 그는 다시는 응접실에 벌컥 들어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의 수많은 다짐처럼 며칠 뒤면 잊어버릴 다짐이기도 했다.

“미안해요, 라넌 경.”

올리버가 떠나자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며 클레어에게 사과했다. 올리버가 바보 같은 짓을 많이 하고 실제로 바보 같긴 하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실례했으니까요.”

클레어의 사과에도 유제니는 고개를 저었다. 클레어는 화낼 만했다. 그녀가 흰 사자 기사단의 메이저 그룹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가 됐다.

유제니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재빨리 질문했다.

“번즈 백작 말이 그의 꿈에서 저는 어닝과 결혼하지 않았다던데요. 당신 꿈에서도 그랬나요?”

그랬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어닝에 대해 잘 몰랐다. 꿈에서도 그녀가 유제니와 만난 건 유제니가 왕이 되고 조금 지난 뒤였기 때문이다.

“네. 렌시드 경은, 어, 그러니까….”

망설이는 클레어에게 유제니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 렌시드 경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 사망했어요.”

“뭐라고요?”

죽었다고? 어닝이? 뜻밖의 사실에 유제니는 입을 딱 벌렸다. 설마 허드슨 경이 죽였나? 그녀의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어, 어쩌다….”

“마차 사고로 알고 있어요.”

다행히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제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클레어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결혼식 일주일 전이었던 거로 알아요. 그래서, 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어요.”

그건 좀 신기한 이야기다. 유제니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 꿈에서는 내가 어닝을 무척 사랑한 모양이네요.”

그건 잘 모르겠다. 클레어는 다시 망설였고 유제니의 재촉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말도 있고요. 반대로 남자를 싫어한다는 말도 있었어요.”

“제가요?”

남자를 싫어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클레어는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눈을 딱 감고 빠르게 이야기했다.

“렌시드 경이 사망했을 때 동석한 남자가, 좀 유명한 사람이었거든요.”

“유명해요?”

“그, 매춘부였데요.”

뭐라고? 유제니는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가? 아니, 남자도 그럴 수 있지.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그제야 왜 레이디 데번이 미쳤는지 아주 조금 이해했다. 클레어의 꿈은 현실과 매우 닮아 있었다.

“물론 소문일 뿐이긴 해요. 당신은, 그러니까 전하께선 다시는 렌시드 자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딱 자르셨고요.”

그건 오히려 렌시드 자작가를 위한 배려였다. 피해자인 유제니 비스컨이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버렸으니 적어도 그녀의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왕이 된 다음에도.

하지만 뒤로는 무수히 많은 소문이 돌았다. 약혼자의 배신으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남자를 싫어하게 됐다는 소문도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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