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2/239)

87화. 18 – 1

조경 경기가 끝난 뒤, 사교계는 자잘한 사건과 소문으로 저마다 분주해졌다. 그중에는 물놀이에서 누가 입고 나온 옷이 아주 멋지더라는 이야기부터 누구와 누구가 가까워진 듯하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물론 새로운 짐 가방에 대한 유행도 있었다. 번즈 백작의 배에 놓아둔 레이디 비스컨의 짐 가방은 퍽 세련돼 보였고 새로운 유행 거리를 찾아 헤매던 사람들에게 필요한 거였다.

금세 유제니에게 어디서 그런 짐 가방을 샀는지 물어보는 편지가 날아 들어왔다.

“아가씨, 라넌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오전 내내 편지를 쓰던 유제니는 집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로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최대한 빨리 답장을 쓰느라 손과 팔은 물론 목도 아팠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빅스, 그분은 라넌 영애가 아니라 라넌 경이에요.”

라넌 영애가 라넌 경보다 더 높은 호칭이니 빅스가 라넌 영애라 말한 것도 당연하다. 유제니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혼란스럽겠지만 라넌 경은 라넌 경이라 불리길 원해요.”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빅스의 얼굴에 알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잖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렇지 않아도 빅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차였다. 명함에는 분명 라넌 남작가의 장녀, 클레어 라넌이라 적혀 있었는데 방문객은 기사단 정복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여자 기사가 있다던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빅스는 유제니가 숄을 걸치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그녀를 손님에게 안내하기 시작했다.

어제 물놀이에 갔다가 강에 빠졌다고 들었다. 의사는 별문제 없다고 했지만 비스컨 가의 모든 사람은 유제니 아가씨가 감기에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고, 레이디 비스컨.”

유제니가 응접실에 나타나자 긴장한 채 앉아 있던 클레어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다. 하마터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라고 인사를 할 뻔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라넌 경.”

유제니는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클레어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역시 다르다. 꿈에서 본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과 지금 눈앞에 있는 레이디 비스컨은 전혀 달랐다. 역시 꿈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혹독한 세월이 그녀를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으로 만든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클레어는 문득 번즈 백작이 이해가 됐다.

“앉아요. 혹시 케이크 좋아해요? 오늘 아침에 그런트 양이 케이크를 보내왔거든요.”

제일 먼저 짐 가방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는 편지를 보낸 그런트 양은 케이크도 같이 보내왔다. 물론 그 편지에는 언제 방문할지에 대한 질문도 들어 있었고.

유제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스컨 가의 하인이 다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클레어의 앞에서 유제니는 직접 주전자를 들어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케이크 한 조각이 담긴 접시를 클레어에게 밀며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카페의 케이크거든요.”

“혹시, 케이크를 좋아하십니까?”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이 유제니의 얼굴에 떠올랐다. 세상에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나? 그녀의 어머니조차도 살이 찐다는 이유로 조금 거리를 두기는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유명해진 디저트가 있으면 맛보곤 한다.

유제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걸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단걸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들. 솔직히 말하면 유제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했지만, 취향 차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요, 아니요. 좋아합니다.”

클레어는 재빨리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케이크 접시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전하께서 케이크를 드시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전하라면 유제니를 말하는 거다. 정확히는 클레어의 꿈에 나온 유제니.

유제니는 역시 꿈이라 그런 모양이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레이디 데번에게는 꿈이 현실이었다. 그건 클레어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땠어요? 라넌 경의 꿈에 나온 저요.”

어땠냐고? 클레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한 사람이기도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강한 사람이요.”

“강한 사람이요? 내가?”

클레어의 말에 유제니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강하다고? 힘으로 따지자면 그녀는 이 집에서 가장 약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클레어가 말하는 강함도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그녀는 유제니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무서운 사람이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클레어는 그녀와 처음 대화하고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제 남편은, 꿈에서 제 남편은 역모죄에 가담했습니다.”

꿈에서 클레어 라넌은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결혼했다. 기사였던 아버지는 드래곤에게서 수도를 지키려다 사망했기 때문이다.

밑에 있는 두 동생을 건사하기 위해서 클레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라넌 남작가는 귀족이었지만 단승 작위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녀에게 남은 건 남작의 딸이라는 것뿐이었다.

작위도 영지도 없는 라넌 가의 장년 클레어가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선택한 건 결혼이었다. 그녀는 그녀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돈은 많은 기사 출신의 상인과 결혼했고 그는 비스컨이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반기지 않는 자였다.

“운이 좋았던 건 아니, 운이 좋다는 건 좀 우습네요.”

선택의 선택이 전부 나쁜 선택이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클레어는 감옥에서 자신의 지난날 선택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필이면 동생들이 어렸다. 하필이면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하필이면 결혼을 선택했다. 하필이면 나이 많은 상인과 결혼했다. 하필이면 그가 그녀에게 바란 건 남작의 딸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뿐이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는 클레어를 무시했고 밖으로 돌았다. 그녀는 남편을 어려워했고 그가 동생들을 건사해 준다는 사실에 감사하느라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때문에 역모에 가담했다는 것도 몰랐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감옥에 갇힌 뒤였다.

“전하께서는 저를 살려 주셨지요.”

뿐만 아니라 그녀를 말동무로 삼았다. 지금이야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꿈의 자리지만 그녀의 꿈에서 마녀 비스컨의 말동무라는 건 수명을 보장할 수 없는 자리였다.

클레어는 겁에 떨었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으며 마녀 비스컨을 원망했다. 이미 그 자리는 다섯 명이 죽어 나간 자리였으니까.

그녀가 말동무가 되기 전까지 삼 개월가량 비어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비어 있었다고요?”

믿을 수 없어 하는 유제니의 질문에 클레어는 쓰게 웃었다. 다섯 명이 죽은 자리였다. 전부 기분이 상한 마녀 비스컨이 죽여 버렸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헛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클레어가 마녀 비스컨의 말동무가 된 지 삼 개월쯤 지난 뒤였다.

“세 명은 전하를 해치려던 자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고 두 명은 전하를 해치려다 사망했습니다.”

잔혹한 이야기에 유제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섯 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유는 달랐지만 죽었다는 건 똑같았으니 그건 결국 죽음의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아니, 당신의 꿈에 나온 나는 용케도 당신을 말동무로 삼았네요?”

유제니의 질문에 클레어는 입술을 깨물고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랬다. 용케도 그녀를 말동무로 삼았다. 자기 주위에서 그렇게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도.

클레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런 자리에 가게 됐다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마녀의 말동무가 되었다고.

“왜냐면 저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까요.”

어쩌면 마녀 비스컨이 자신을 살려 준 건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건 클레어가 그녀의 말동무가 된 지 한 달쯤 된 다음의 일이었다.

클레어의 남편은 역모를 꾸민 무리의 가장 말단이었고 제일 먼저 사형을 당했다. 당연히 부인인 클레어가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사람들은 클레어의 사형을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그 사형 요구는 클레어의 동생들에게까지 이어졌고.

“절 살리기 위해 전하께선 저를 말동무로 삼으신 거죠.”

클레어뿐만이 아니다. 힘이 없는 라넌 남작가는 멸문지화를 당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목숨이 위험한 자리에 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라넌 남작가의 멸문지화가 아니라 클레어가 얼마나 버티느냐로 옮겨 갔다.

“힘들었겠네요.”

클레어의 이야기를 들은 유제니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목숨이 위험한 자리다. 하지만 적어도 클레어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의 동생들은 무사할 수 있다.

유제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요.”

좋은 사람이다. 클레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곧이어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두 개가 뭐가 다를까. 좋은 사람이려면 강해야 한다. 약한 자만이 비열하게 사는 법이다. 클레어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기 위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강한, 강한 분이셨죠.”

딱 한 번, 클레어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자신을 왜 말동무로 삼았냐고. 멸문지화를 막아 주기엔 라넌 가는 비스컨 가와 큰 친분이 없었다. 지난번에 왕궁에서 우연히 만나기 전까지 유제니가 클레어를 몰랐던 것처럼 꿈에서도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다.

“제가 당신을 미워하는 걸 알고 계셨어요.”

클레어의 대답에 유제니는 멈칫했다. 여기서 당신이란 그녀가 아니다. 클레어의 꿈에 나온 유제니다. 그녀가 그 사실을 떠올리고 긴장을 풀었을 때 클레어가 말을 이었다.

“왕궁 밖은 자신을 미워한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하셨죠.”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클레어의 질문을 어이없어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한심해하지도 않았다. 평소와 똑같이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 왕궁 밖에 날 미워하는 자들이 많다는 걸 아네. 하지만 왕궁 안은 정반대지.

왕궁 안의 사람들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아부해 한자리 얻으려는 자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잘 보이려 애썼고 무의미한 칭찬과 감탄을 남발했다.

왕궁 안에서 머물면 칭찬에 잠식되어 버린다.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이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큰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그건 자기 합리화를 불러온다. 동시에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 어느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 자네는 저 밖에 날 미워하고 증오하다 못해 죽이려 하는 자들이 있다는 증거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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