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1/239)

86화. 17 – 4

어, 없다. 나는 이미 한 번 물에 빠져서 엘리엇의 옷을 빌려 입고 있고 여기에는 수영장이 있다. 게다가 배가 커서 다른 작은 배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영장에 있는 우리 모습이 보이지 않을 거고.

“무서우시다면 괜찮습니다.”

이 남자는 나를 꽤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가 응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했으니까.

나는 엘리엇을 노려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 남자랑 있으면 미친 짓을 꽤 여러 번 하는 것 같은데.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엘리엇이 먼저 수영장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니, 당신도 들어가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젖을 텐데요?”

“물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수영을 배우죠?”

“배우는 건 나지 당신이 아니잖아요?”

“가르치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할 말이 없네. 나는 일부러 씩씩하게 걸었다. 물속에서 걷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엄마야!”

갑자기 바닥이 깊어지는 바람에 발을 헛디뎠다. 넘어지려는 순간, 내 팔을 잡고 있던 엘리엇의 힘이 강해졌다.

“괜찮습니다.”

이상한 일이지. 나는 그 순간 놀라서 벌렁거리던 가슴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을 깨닫고 엘리엇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꿈에서 내가 당신과 연인이었나요?”

생각하기도 전에 질문이 흘러나왔다. 아까부터 생각한 거긴 하다. 그는 내 기사가 아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는 건 우리가 연인이었기 때문인 게 아닐까.

엘리엇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그건 이상한데. 그럼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는지 모르겠다. 나는 물끄러미 엘리엇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꿈을 꿨다.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나는 그가 꿈을 꿨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다.

심지어 그게 진짜 꿈이었는지 의심스러워지고 있다. 라넌 경이 꾼 꿈과 로렌, 레이디 데번이 꾼 꿈이 비슷한 꿈이었으니까.

“당신의 꿈에서 내가 어닝과 결혼했나요?”

결혼했다면 엘리엇과 내가 연인이 아니었다는 게 납득이 된다. 어닝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내가 배우자를 두고 연인을 두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엘리엇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나를 바로 세워 주며 말했다.

“하늘에 감사하게도, 아닙니다.”

“오.”

그럼 난 대체 누구와 결혼한 거지? 어리둥절해하는데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로렌과 줄리아가 수영장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이미 수영장에 들어가 있는 나와 엘리엇을 보고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

“들어가도 되나요?”

“어, 음. 들어와.”

나는 엘리엇을 밀어 로렌과 줄리아가 수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내 팔을 잡은 채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하면 로렌과 줄리아가 엘리엇의 등 뒤로 가게 된다. 두 사람이 엘리엇의 시야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다정하네.

나는 다정한 엘리엇의 행동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다정함이 내게만 향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혼란스러운데요.”

나한테 잘해 주는 건지 모든 사람에게 잘해 주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전자라면 좀 무섭고 후자라면, 아, 그것도 무섭네.

“어지럽습니까?”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재빨리 내 몸을 안아 들 것처럼 팔을 내밀었다. 어어, 이 사람이?

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물러나며 손바닥을 들었다. 자꾸 사람을 들어서 옮기려고 하는데, 그거 나쁜 버릇이다.

하지만 곧바로 엘리엇이 나를 잡아당겼다.

“잠깐….”

“죄송해요!”

뒤에서 줄리아가 소리쳤다. 아, 부딪칠 뻔했구나. 좀 민망하네. 나는 엘리엇의 팔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시면 그만할까요?”

피곤하지 않다. 아니, 피곤한가? 나는 엘리엇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배울 기회가 지금밖에 없잖아요. 조금이라도 배워야죠.”

“지금이요?”

내 말에 엘리엇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더니 금세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배를 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와서 연습하세요.”

“뭐라고요?”

뭘 줘? 나는 깜짝 놀라서 그에게서 떨어지려다가 허우적댔다. 아, 참. 여기 물속이었지?

재빨리 엘리엇이 내 등을 받쳐 주었다. 그는 손바닥을 내 등허리에 대더니 나를 좀 더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러니까 어린애가 된 기분인데.

나는 그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싫어요.”

책이나 꽃다발, 차나 초콜릿 같은 거라면 모를까, 이런 커다란 배를 주고받는 건 부적절하다. 엘리엇은 내 거절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당신의 친구들도 여기서 수영을 배울 수 있겠죠.”

엘리엇의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이 남자가?

“그러면 다음 물놀이 때는 사고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른다. 정말로.

내 눈에 엘리엇의 뒤로 로렌에게 수영을 배우는 줄리아가 보였다. 재미있어 보였다. 어쩌면 어머니도 수영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말도 안 되지. 어머니는 수영을 배울 리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물에 발을 담그는 정도는 하실 수 있겠지.

“당신은 뭘 얻는데요?”

내가 이 배를 얻는다면 엘리엇은 무엇을 얻을까. 사람이 사람에게 뭔가를 줄 때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남의 집에 가서 얻어먹었을 때 탈이 없는 건 차와 케이크 정도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당신의 행복이죠.”

“아뇨. 내가 얻는 거 말고요. 엘리엇. 당신은 뭘 얻냐고요. 내가 당신에게 뭘 주길 바라나요?”

“당신의 행복이요. 그거면 됐습니다.”

뭐라고?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어닝과 약혼하기 전에 구혼자들은 내게 선물을 주곤 했다. 대부분 구혼하는 사람들이 주기에 적절한 것들이었다. 작은 브로치나 머리핀.

반지나 팔찌 같은 보석을 주는 경우에는 이렇게 말했다. 이걸 받고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그런데, 뭐? 내 행복? 그거면 된다고? 나는 반사적으로 엘리엇에게서 떨어지려 하며 물었다.

“당신 박애주의자 같은 거예요?”

그 순간, 엘리엇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나 웃는지 나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을 정도였다. 줄리아와 로렌이 무슨 일인가 하고 우리를 쳐다봤다.

“아뇨. 아뇨, 유제니. 굳이 따지면 전 그 반대에 가까울 겁니다.”

박애주의자의 반대가 뭐지? 내가 인상을 쓰고 생각하는 사이, 엘리엇은 나를 이끌고 수영장 밖으로 나왔다. 그는 먼저 내가 벗어 둔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 주더니 나를 앉히고 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 주기 시작했다.

“당신도 젖어 있는 거 알죠?”

이걸 박애주의의 반대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나는 엘리엇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지적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줄리아와 로렌이 신나게 물장구를 치는 수영장을 쳐다봤다. 나한테 이 배를 주겠다고?

탐나긴 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걸 받는 게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나는 엘리엇이 조, 좋긴 하지만.

“유제니?”

얼굴이 붉어졌는지 엘리엇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내 이마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덕분에 다시 눈이 가려졌다.

“고맙긴 한데 안 되겠어요.”

눈앞이 어두워진 덕에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배가 탐이 나긴 한다. 이게 있으면 물놀이를 더 즐길 수 있겠지. 수영장도 탐이 나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부적절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좀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관리할 여유가 없거든요.”

배를 관리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강에 정박해 두는 것도 비용을 내야 하는 거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 쓸 때 넣어 둘 창고도 필요하지만, 수도의 비스컨 저택에는 이렇게 큰 창고가 없다.

곧이어 눈앞이 환해졌다. 엘리엇은 내 이마에서 손을 떼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열은 없군요.”

과연 내가 열이 없는지 알 수 있을까? 엘리엇의 체온은 나보다 더 높은 것 같은데. 나는 그에게 내 이마에 열이 없는 것을 확신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어쩐지 일이 커질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배가 싫으신 건 아닌 거죠?”

이어서 엘리엇이 물었다. 싫은 건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젓고 로렌과 줄리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관대한 제안, 고마워요. 수영장이라는 걸 경험하게 해 준 것도요. 수영을 배울 필요성은 있지만 여의치가 않네요.”

내가 좀 더 조심하면 된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물가에서 조심하라고 일러 주면 된다.

그래도 좀 아쉽긴 하다. 나는 엘리엇에게 들키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가 다시 말했다.

“빌려드리는 건 어떨까요.”

“뭐라고요?”

“빌려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마음껏 쓰세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사람을 모두 데려오세요.”

“왜….”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엘리엇이 먼저 알아차리고 말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거든요.”

배를 쓰는 게 왜 나를 행복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나는 좋다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엘리엇은 꿈에서 내 연인도, 내 기사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럼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엘리엇의 꿈에서 내가 굉장히 불쌍했나?

문득 내가 그들의 꿈에서 왕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나라의 모든 왕족과 내 위의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다 죽고 내가 왕이 되었다면, 나는 불행했겠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심지어 레이디 데번은 남편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 내가 그리 인정받는 왕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뭐든지요.”

다정한 엘리엇의 말에 오히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당신의 꿈에서 내가 그렇게 했나요? 레이디 데번의 딸을, 살렸나요?”

아까 물어봤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라넌 경은 내 말벗이었다니 알 수도 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꿈에 나오는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는 거다.

“네.”

약간 긴장한 채 대답을 기다리는 내게 엘리엇이 말했다. 그랬다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상을 쓴 채 엘리엇에게 물었다.

“그럼 왜 레이디 데번에게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어요?”

내가 그녀의 꿈속에 등장하는 딸을 살려 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가 말해 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모르는 내가 거짓말하는 위험을 부담하는 것보다 말이다.

엘리엇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꿈이니까요.”

“하지만….”

“유제니. 그건 꿈입니다. 지금의 당신과 상관없는, 이뤄질 리 없는 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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