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0/239)

85화. 17 – 3

레이디 데번의 남편인 볼티고르 경은 두 사람의 아들을 죽였다. 역모죄를 저지르고 죽였으니 아마 볼티고르 경 역시 죽었겠지. 아니면 죽음을 선택했거나.

그렇다면 남은 건 레이디 데번뿐이다. 그녀 역시 역모죄를 저질렀고 내가 왕이라면 벌을 주고 싶었을 거다. 그 벌이 고작 두 살짜리 아이를 죽이는 거라면 레이디 데번의 꿈은 개꿈이겠지.

“그럼….”

다시 레이디 데번이 무너져 내렸다. 아니, 안도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걸로 그녀가 좀 안정을 찾게 되면 좋겠다. 내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엘리엇의 하인이 다가왔다.

“데번 백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레이디 데번이 엘리엇의 배에 있다는 이야기가 이제야 그녀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엘리엇은 마치 허락을 구하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섰다.

그녀가 나를 왜 공격했는지 알았으니 됐다.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공격했는지가 궁금했다.

“어떻게….”

레이디 데번의 선실에서 멀어지는데 라넌 경이 물었다. 뭐가 어떻게야?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는데 반대편에서 데번 백작 부인이 하인들과 함께 뛰어오는 게 보였다.

“밀리!”

이크. 그녀의 눈에 나와 라넌 경이 안 보이는 모양이다. 좁은 통로라 그녀와 하인들을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때, 엘리엇이 바로 옆에 있던 선실 문을 열더니 나를 잡아당겼다.

아슬아슬하게 라넌 경도 우리가 들어온 선실로 몸을 날린 덕에 데번 백작 부인과 그 하인들은 곧바로 밀리가 있는 선실로 달려갈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번 백작 부인과 하인들이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선실 안에 우리 셋만 남자 라넌 경이 다시 물었다. 방금 전, 레이디 데번과 있었던 일을 묻는 거겠지.

나는 엘리엇을 보고 그의 얼굴이 무표정한 것을 확인했다.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방금 전 같은 일을 겪고 나니 더더욱.

“꿈을 말하는 거라면 몰라요.”

나는 선실에 있는 작은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엘리엇이 선실 문을 닫아 주었다. 아 참, 나 아직도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지. 이 꼴을 데번 백작 부인과 그녀의 하인들이 보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럼 어떻게, 아니, 왜 그런 말을….”

그러게.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나는 침대에 앉은 채 잠시 생각했다. 그냥, 안타까웠다.

“꿈이라 해도 그건 레이디 데번에게는 현실이었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현실과 꿈을 혼동한 거겠지. 나는 라넌 경과 엘리엇을 보고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둘 다 키가 큰 편이라 좁은 선실이 더 비좁게 느껴진다. 아, 물론 엘리엇을 두고 키가 큰 편이라고 하면 좀 모욕일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앉지 않았다. 라넌 경은 문에 기대고 섰고 엘리엇은 내 맞은편 벽에 삐딱하게 기댔다. 이 사람들아, 좀 앉으라고.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레이디 데번은 남편이 아들을 죽인 것도 죽인 거지만, 자기 때문에 딸이 죽었다는 죄책감이 더 강해 보였거든요.”

“그래서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라넌 경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그건 꿈이다.

“내가 거짓말해서 피해를 볼 사람도 없잖아요. 운이 좋으면 레이디 데번은 진정할 테고 아니면….”

그대로겠지. 결국, 잃을 게 없는 도박이었다.

“그럼, 그렇다면 어떻게 레이디 데번의 딸을 빼돌렸다고 거짓말하신 겁니까?”

이어진 라넌 경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나라면 그랬을 테니까요.”

라넌 경은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엘리엇의 표정을 확인하고 말했다.

“그 애는 고작 두 살이라면서요. 아무 죄가 없죠.”

반역죄를 저지른 부모를 뒀다는 게 죄라면 죄겠지만 그건 너무 가혹하다.

“내가 왕이라면, 두 살짜리 아이를 죽여서 무슨 득이 있겠어요? 그 부모에게 네 죄로 자식이 죽었다고 알려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죠.”

좀 잔인한가? 잔인한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벌이다. 벌은 잔인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이 배제되는 게 가장 좋고.

네 명이 죽는 것보다는 세 명이 죽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을까.

“그럼 아이는요? 어떻게 했을까요?”

드디어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우, 목 아파.

“아이가 없는 부모에게 기르게 했을 거예요. 어떤 아이인지 알려 주지 않고.”

“어째서요?”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가족들이 역모죄로 사형당했어요. 뭐, 오라버니는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거지만요. 그 사실이, 그 애의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요.”

엘리엇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가 다시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때요? 당신들 꿈에서 나온 내가 그렇게 했나요?”

라넌 경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라넌 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당신이 내 기사였나요?”

내가 왕이었다면 호위 기사가 있었겠지. 보통 검은 늑대 기사단이고. 라넌 경은 검은 늑대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에스컬레 경의 반대로 흰 사자 기사단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그 말은, 꿈에서 에스컬레 경은 라넌 경의 입단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에스컬레 경이 반대하지 않았을 가장 큰 가능성은 그가 사망했거나 기사단에 있지 않은 거겠지.

끔찍한 꿈이다. 내가 왕이 되었다는 건 내 위로 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올리버까지.

왕족이 사망했다는 건 에스컬레 경도 사망했다는 뜻이다. 내가 아는 에스컬레 경은 자신이 지켜야 할 상대를 두고 도망치지 않는 분이니까.

“아니요.”

라넌 경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요, 전하. 저는 당신의 말벗이었습니다.”

“오.”

당연히 기사였을 줄 알았다. 처음 보자마자 나를 과보호했으니까. 그럼 내 기사는 엘리엇이었나 보네. 그도 나를 과보호했으니까.

나는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의 기사였는지를 묻는 거냐면, 아니요. 저는 당신의 기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이해가 안 된다. 엘리엇은 내 기사도 아니었다면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그 순간 꽤 그럴듯한 이유가 떠올랐다. 어라.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에 엘리엇을 쳐다봤을 때였다. 그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더니 말했다.

“슬슬 비스컨 남작의 경기가 시작될 때가 됐군요. 올라가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놀랍게도 엘리엇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라넌 경을 쳐다봤지만, 그녀 역시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유제니! 어서 오렴!”

갑판으로 올라가자 엘리엇의 말대로 경기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뱃전으로 달려가기 전에 그만 가야겠다는 라넌 경과 약속을 잡았다.

“꼭 와 줘요. 우리 집에.”

라넌 경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찾아뵙겠습니다. 레이디 비스컨.”

아까 그녀가 나를 전하라고 불렀던 게 생각났다. 그건 꿈일 뿐이다. 하지만 밀리에게와 마찬가지로 라넌 경에게는 현실이었겠지.

올리버의 실력은 대단했다. 정확히는 그와 선수들의 실력이 대단한 거겠지만.

하지만 더 대단한 팀이 있어서 우승은 그쪽 팀으로 돌아갔다. 아쉽게 두 번째로 들어온 올리버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노를 바닥에 내팽개치는 게 보였다.

“올리버에게 가 봐야겠다.”

어머니는 올리버가 좌절하는 것을 보고 내게 말했다. 나도 가 보고 싶지만 나는 아직 담요를 뒤집어쓴 채다. 올리버의 경기를 보는 도중에 집에서 내 옷이 도착했지만 입을 새가 없었다.

“집에서 만나요,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로렌과 줄리아는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선실로 내려가려다가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멈췄다.

“뭐 해?”

“아쉬워서요.”

뭐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두 사람은 아까 강에 발을 담가 본다며 나갔다 왔다. 내 표정을 본 로렌이 웃으며 말했다.

“수영이요. 줄리아는 할 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너는 할 줄 알아?”

수영을 할 줄 안다고?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러자 로렌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그, 꿈에서….”

“그게 가능할까?”

꿈에서 배운 게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걸까? 그건 꿈에서 하늘에 나는 것과 비슷할 것 같은데.

“저도 궁금해요. 가능한지.”

가능할까? 나는 어느새 내 옆에 서 있는 엘리엇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받은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수영장은 얼마든지 사용하셔도 됩니다.”

된다. 허락을 받자마자 로렌과 줄리아는 옷을 갈아입겠다며 선실로 내려갔다. 적어도 겉옷은 벗어 둬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줄리아와 로렌을 위해 하인들에게 선실 아래로 내려가라고 명령한 엘리엇이 물었다. 벌써 저녁이다. 여름이라 해가 긴 게 다행이었다. 나는 주홍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구경하다가 물었다.

“뭐가요?”

“물에 들어가는 건 아직 좀 무서울까요?”

무섭냐니. 반사적으로 반발심이 튀어나왔지만 나는 누르는 데 성공했다. 안 무섭다. 워낙 짧은 시간이기도 했고 엘리엇이 금방 구해 줬으니까.

“그 반대예요.”

물에 빠져 보니 알겠다. 물놀이가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엘리엇에게 말을 이었다.

“오히려 수영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대답에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며 고개를 기울였다.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만.”

“지금요? 여기서?”

“지금 여기보다 더 좋은 시간과 장소가 있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