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79/239)

84화. 17 – 2

엘리엇이 내게 숨기는 게 있다. 그리고 그건 레이디 데번과 연관이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강렬하게.

“가요, 라넌 경.”

나는 라넌 경에게 앞서가라고 손짓했다. 라넌 경은 좀 흥분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감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엘리엇에게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뽐내는 듯한 표정?

대체 뭘까. 나는 라넌 경의 뒤를 따르다가 엘리엇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깨닫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위험하니까 제가 곁에 있어야죠.”

그 말이 라넌 경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나 보다. 앞서 걷고 있는 사람의 기분을 어떻게 아냐고? 라넌 경이 콧방귀를 뀌었거든.

“레이디 데번. 나 기억해요?”

라넌 경이 밀리를 데려다 놓은 선실은 내가 의사를 만난 선실과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는 문을 살짝 열고 밀리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녀가 날 공격할까 봐 걱정됐는지 두 개의 팔이 내 앞으로 나왔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레이디 데번이 이를 갈며 나를 불렀다. 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도 꿈을 꾼 사람이군요.”

“어떻게….”

반응은 밀리가 아니라 내 앞으로 나온 두 개의 팔 중 하나의 주인인 라넌 경에게서 나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라넌 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선 레이디 데번부터예요. 당신이 두 번째.”

그리고 곧바로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세 번째예요.”

엘리엇은 못마땅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떠나지는 않았다. 그사이, 나는 레이디 데번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볼티고르 경을 공격한 건 기억해요?”

“죽이지 못한 게 한이지!”

밀리의 목소리는 밀리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아주 잠깐 그녀가 사악한 마법사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녀의 눈은 또렷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완곡하게 말할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백작 부인은 당신을 찾아서 공작님의 배에 계실 거예요. 연락이 닿는 대로 여기로 모시고 오라고 했어요.”

데번 백작 부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밀리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나는 잠시 시간을 뒀다가 다시 말했다.

“그 전에 우리가 말을 맞췄으면 해요.”

“뭐?”

레이디 데번의 얼굴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당신이 볼티고르 경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요. 나는 내가 당신을 떼어 냈을 때 쉽게 떨어졌다고 말할 거예요.”

“레이디 비스컨.”

라넌 경이 깜짝 놀라서 끼어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데번 백작 부인의 말대로 레이디 데번이 미친 거라면 요양을 해야 한다. 감옥에 갇히는 게 아니라.

“고작 그런 거로 내가 당신을 용서할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당연하게도 밀리의 반응은 고맙다는 게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밀리가 상처받지 않을지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상처받지 않게 한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레이디 데번, 당신은 꿈을 현실과 혼동해서 사람을 해치려 했어요. 내가 당신한테 용서받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꿈을 현실과 혼동했다는 말에 레이디 데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엘리엇이 나를 자신의 몸으로 가렸다.

“번즈 백작.”

엘리엇을 본 레이디 데번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제야 내 곁에 엘리엇과 라넌 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두 사람을 돌아보더니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날 비난하러 왔나? 반역을 꾀했다고? 아니면, 내 꼴을 보고 비웃으러 왔어?”

다시 레이디 데번의 머릿속은 꿈으로 잠식된 모양이었다. 그보다 반역이라고? 나는 어리둥절해서 레이디 데번을 쳐다보다가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말을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무표정한 채로 내게 팔을 두르고 있는 엘리엇을 보고 나는 다시 레이디 데번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렌은 꿈에서 내가 왕이라고 했다. 왕족이 모두 드래곤의 분노를 사서 사망했다고 했지. 그 말은 내 위로 몇백 명이나 되는 왕위 계승자들이 다 사망했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올리버까지.

“그건 꿈이에요. 레이디 데번, 정신 차려요.”

내가 왕이 되는 꿈이라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로렌과 길더, 레이디 데번까지 같은 꿈을 꾼 것처럼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뭔지는 몰라도 부디 이걸 왕궁에서 내가 반역을 저지를 예지라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말에 다시 밀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괴로운 듯 두 손에 얼굴을 묻더니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면서 소리쳤다.

“꿈이라고? 그게? 그럼 우리 애들은? 에이미는? 로한은?”

맙소사. 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서 레이디 데번이 절망했다는 게 느껴졌다. 고작 꿈이었을 뿐인데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잃은 것을 괴로워하고 있었다.

“로한, 로한!”

밀리는 바닥을 긁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들이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마음이 안 좋았다. 내가 그녀에게 유리하게 말을 맞춰 주려 한 게 이런 이유였다.

어떤 이유로든 레이디 데번은 환자다. 그녀가 감옥에 가는 게 그렇게 옳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용서 못 해.”

다음 순간, 밀리는 다시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우리 쪽을 바라봤지만, 우리를 보지 않았다. 어딘가 먼 곳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꿈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웨스를 용서할 수 없어. 내 아들을 죽이고, 그 자식 때문에 에이미가….”

데번 백작 부인이 말했다. 밀리의 꿈에서 그녀의 남편이 두 사람의 아들을 죽였다고.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했다.

“밀리, 그건 꿈이에요.”

“꿈? 꿈이라고?”

다시 밀리가 분노로 펄펄 뛰기 시작했다. 재빨리 엘리엇과 라넌 경이 내 앞을 막아섰지만, 밀리가 소리 지르는 것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쁜 년! 네가 죽였어! 네가 에이미를 죽였잖아! 너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오, 이제 그녀가 날 왜 그렇게 미워하는지 알았다. 그녀의 꿈에서 내가 그녀의 딸을 죽인 모양이다.

그거, 엄청난 개꿈이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누군가를 죽인다니, 레이디 데번은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때, 라넌 경이 소리쳤다.

“반역을 꾀하고 무사할 줄 알았어요?”

그러자 놀랍게도 레이디 데번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뚝 끊겼다. 나는 엘리엇과 라넌 경 사이에서 그녀가 검에 찔린 것처럼 멈춘 것을 확인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내가 밀리의 딸을 죽였다는 게.

내가 왕이었고 레이디 데번과 남편과 함께 반역을 꾀했다면, 당연히 밀리의 가족은 벌을 받았을 것이다. 보통 반역죄는 사형이고.

“에이미는 두 살이었어.”

문제는 너무 어린애라는 거다.

밀리는 흐느끼며 말했다. 난리를 부리고 바닥을 긁어 댄 탓에 그녀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심지어 볼티고르 경을 공격하느라 여기저기 젖어 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미쳤다기보다는 절망한 거로 보였다. 그 두 가지가 크게 차이가 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두 살이었다고. 잘못한 건 나와 웨스잖아. 그, 그 어린애를, 어린애를 목매달 필요는 없었다고.”

다시 밀리는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를 보고 라넌 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타깝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건 꿈이다. 현실이 아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밀리에게 그건 현실이었고 일어난 일이었다. 로렌이 말하지 않았던가. 바로 어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다고.

반역을 꾀하다 실패하고 남편이 죽인 아들. 반역죄로 잡혀가 죽은 두 살짜리 딸.

그녀는 끔찍한 현실에서 살고 있었다. 그게 아무리 꿈이라 해도 그녀에게는 현실이었다.

“차라리 같이 죽이지 그랬어. 그, 그 어린것을….”

흐느끼던 밀리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말했다. 원망하는 목소리였지만 죄책감이 느껴졌다.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나는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밀리의 아들은 남편이 죽였다. 그리고 딸은 사형을 당했지만, 그녀와 함께 죽은 건 아니다. 밀리는 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나는 도박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나와 밀리가 잃는 건 존재하지도 않는 그녀의 아이들이다.

그래서 나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안 죽었어요.”

“뭐?”

내 말에 바닥에 쓰러져 흐느끼던 레이디 데번이 고개를 들었다.

“레이디 비스컨.”

라넌 경이 놀라서 말을 걸었지만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엘리엇과 라넌 경 앞으로 나섰다. 아주 잠깐 엘리엇의 손이 내 허리를 잡는 것 같았지만 그저 스쳤을 뿐이다.

나는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편 채 말했다.

“안 죽였다고요.”

“하지만, 하지만 죽었다고….”

“시체를 봤나요?”

밀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좋아. 그녀의 꿈에서 딸의 시체는 안 나온 모양이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거짓말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올리버가 그랬다. 당당함이라고.

“빼돌렸어요. 당신 모르는 곳으로. 사람들에게는 죽었다고 했죠.”

“하지만….”

레이디 데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어, 어째서?”

어째서라니?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않나?

“고작 두 살이잖아요. 죄도 없고요.”

“그, 그럼 나한테는 왜….”

왜 딸이 죽었다고 말했냐고 묻는 모양이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가장 큰 벌이 될 테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