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78/239)

83화. 17 – 1

“팔은 괜찮습니다. 체온은, 갈아입을 옷은 없습니까?”

다행히 안전을 위해 의사가 주변에 있었다. 젊은 의사는 내 상태를 확인하더니 어머니께 물었다.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가져온 건 담요뿐이었다. 어머니는 내 팔이 괜찮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져오라고 사람을 보냈네.”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옷을 가져올 걸 그랬네. 약간 정도야 젖을 줄 알았지만, 아예 강에 빠질 줄은 몰랐다.

문득 이 배에 있는 수영장이 생각났다. 어차피 이렇게 홀딱 젖었는데 수영장에 들어가면 안 되나?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어머니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볼 것 같다.

“괜찮으시면 제 옷을 드릴까요?”

그때, 엘리엇이 문밖에서 물었다. 계속 거기 서 있었나? 어머니는 엘리엇의 제안에 잠시 놀라더니 나를 쳐다봤다. 그러자 마치 우리가 왜 망설이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새 셔츠가 있습니다.”

안 입은 거라는 말에 어머니의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물었다.

“바지도 빌릴 수 있을까요?”

아주 잠깐, 엘리엇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지까지 빌려달라는 건 좀 무례했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가 말했다.

“그것도 새것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입으셔도 됩니다.”

“고맙게 받을게요, 번즈 백작.”

어머니의 인사에 엘리엇이 하인에게 자신의 옷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그가 말한 원하신다면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유제니, 괜찮아요?”

“뭘 입은 거예요?”

내가 엘리엇의 셔츠만 입고 그 위에 담요를 뒤집어쓴 채 갑판으로 나가자 로렌과 줄리아가 물었다. 보이나? 나는 담요 밑으로 내 맨다리가 보이는지 확인했다. 하도 둘둘 감아서 안 보일 줄 알았는데?

“응, 괜찮대. 바지가 너무 크더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엇을 쳐다봤다. 바지도 빌려줄 수 있냐는 말에 왜 망설였는지 이제 이해한다. 그의 셔츠만으로도 내가 입으니 원피스가 되어 버렸다. 물론 종아리가 훤히 드러나서 어머니는 기겁하셨지만.

“백작님이 바지도 찾으시던데요?”

줄리아의 질문에 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 바지, 너무 커서 못 입는다. 밑단을 접다가 무거워져서 벗어 버렸다. 접힌 부분이 내 발보다도 무거웠단 말이지.

내 표정을 본 줄리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는 킬킬대며 물었다.

“너무 컸군요?”

“으, 말하지 마.”

빌려달라고 요청해 놓고 ‘이건 너무 커서 못 입겠네요’ 하고 돌려줄 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뱃전으로 다가가며 로렌과 줄리아에게 물었다.

“경기는 어떻게 됐어?”

아까 올리버가 예선을 통과하는 걸 봤으니 이번에는 결승전일 거다. 다행히 내가 놓친 건 없었는지 로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쉬는 시간이에요. 누가 물에 빠져서 잠깐 쉰다더라고요.”

“으으.”

나 때문에 연기된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돌아섰다. 그러자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아래에 있자니까.”

“그랬다간 오늘 저녁으로 잘 익은 유제니 고기를 드시게 될걸요?”

사람들의 관심으로 인한 수치심에 아주 활활 타올라서 나는 잘 익은 고기가 될 게 뻔하다.

“유제니!”

“유제니!”

나를 부르는 두 개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나는 예상한 어머니의 목소리인데 다른 하나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될 목소리였다.

“올리버?”

진짜 올리버잖아? 올리버는 어느새 엘리엇의 배에 올라타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허어. 나는 재빨리 담요가 내 몸을 제대로 감싸고 있는지 확인했다.

“누가 강에 빠졌다던데? 설마 너 아니지? 너, 너….”

가까이 다가온 다음에야 그는 내 젖은 머리카락과 칭칭 감은 담요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올리버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그가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아니, 어떤 새끼야? 어떤 개….”

“올리버.”

나는 재빨리 올리버를 불러 그가 어머니 앞에서 큰 실수를 하는 걸 막았다. 다행히 올리버는 내 옆에 어머니뿐 아니라 로렌과 줄리아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너.”

하지만 올리버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내 옆에 있는 엘리엇에게 분노를 돌렸다.

“네가 유제니를 잘 돌봤어야지!”

“올리버!”

미친 거 아냐? 나는 깜짝 놀라서 올리버와 엘리엇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건 이 사람 의무가 아니야!”

“의무지! 네 구혼자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내가 화를 내려는 순간, 나와 올리버 사이에 라넌 경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올리버를 밀어 내며 말했다.

“책임 전가하지 마시죠, 비스컨 백작.”

올리버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가 자신을 백작이라고 불러서인지, 모르는 사람이 끼어들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인상을 쓰며 물러나자 라넌 경이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은 레이디 비스컨의 오라버니죠. 여기서 그녀를 누구보다 보호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고요.”

“나, 나는 경기 중이라….”

“늘 그렇게 핑계만 대는군요. 뻔뻔하게도.”

늘이라고?

나는 라넌 경이 올리버를 잘 아는 것처럼 구는 것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아니, 잘 아는 게 아니라 철천지원수처럼 보고 있다.

“아는, 아니, 누굽니까?”

올리버도 라넌 경을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려다 그녀에게 직접 물었다. 그러자 라넌 경이 싸늘하게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의 기사, 클레어 라넌입니다.”

“네?”

“뭐?”

나와 올리버의 입에서 똑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누구의 뭐라고? 올리버는 그게 진짜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기사라고? 내 기사?

잠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엘리엇을 쳐다보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뭐 아는 거 있어요?”

나는 슬그머니 엘리엇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더니 손을 뻗어 담요를 잡아당겼다. 뭐, 뭐 하는 거야?

반사적으로 담요를 꽉 잡는 내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머리까지 덮는 편이 좋겠습니다. 젖어 있으니까요.”

그렇긴 한데 그건 너무 답답하다. 내가 고개를 젓자 엘리엇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너 괜찮은 거 봤으니 난 그만 가 봐야겠다.”

엘리엇이 대답을 피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올리버가 돌아가 봐야겠다고 말했을 때였다.

“경기가 연기됐다며?”

“시간이 났으니 더 연습해야지.”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고 인상을 쓰며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이 나지 않는지 확인하는 모양이다.

어휴. 나는 올리버의 손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얼른 가. 열도 없고 다친 데도 없어.”

나도 할 일이 있다. 레이디 데번과 볼티고르 경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

“레이디 데번은 데번 백작 부인과 함께 있나요?”

올리버가 하선하고 나서 나는 라넌 경에게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원수를 보는 눈으로 올리버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올리버를 미워하는지 모르겠네.

“아니요. 여기 있습니다.”

내 질문에 라넌 경은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여기 있다고? 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볼티고르 경과 분리하라고 하셔서 레이디 데번은 이 배로 데려왔습니다.”

뭐라고? 여기로 데려왔다고? 왜?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라넌 경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데번 백작 부인께는 알렸어요?”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백작 부인이 아직 레이디 데번을 데리러 안 왔다고? 어째서?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거마로트 공작가의 배를 확인하러 갔다. 거마로트 공작가에서는 아무도 안 왔고.

승선 허락을 받기 위해 공작가까지 사람을 보냈겠지. 허락을 받은 뒤 승선했을 테니 아직도 백작 부인은 배 안에 있을 거다.

“맙소사.”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레이디 데번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 딸 살려 내라고 했지. 꿈속에서 그녀의 아들은 그녀의 남편, 볼티고르 경이 죽였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 있어요?”

아주 잠깐, 라넌 경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세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쪽입니다.”

“안 됩니다.”

안내하려는 라넌 경을 막은 건 엘리엇이었다. 그는 나와 라넌 경의 사이로 팔을 뻗으며 말했다. 마치 나와 라넌 경을 떨어트려 놓으려는 것처럼.

“안 돼요?”

나는 느닷없는 엘리엇의 반대에 물었다. 최근 만난 꿈을 꾼 사람들. 레이디 데번의 행동. 그리고 나를 과보호하는 엘리엇.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엇은 뭔가를 알고 있다. 내게 일어난 일들. 내게 했던 이상한 말과 행동들.

“위험합니다.”

엘리엇은 떨어지라는 듯 라넌 경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레이디 데번이? 물론 위험하겠지. 그녀는 미쳤으니까.

하지만 라넌 경이 여기로 데려왔다. 밀리가 정말 위험하다면 엘리엇이 이 배에 그녀를 가두는 것을 허락했을까?

“괜찮아요. 라넌 경과 함께 갈 거니까.”

나는 라넌 경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러자 엘리엇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