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16 – 5
레이디 데번은 딸은커녕 결혼도 안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자신이 이미 결혼했고 딸이 있다고 믿고 있는 표정이었다.
일그러진 밀리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나는 그녀가 정말 분노에 차 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미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전하!”
몸이 주르륵 미끄러진 순간, 레이디 데번의 뒤로 낯익은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가 곧바로 밀리의 목덜미를 낚아챘지만 나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몸이 그대로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유제니!”
눈앞에서 여자가 레이디 데번을 끌어당기는 것과 엘리엇이 내게 손을 뻗는 게 아주 천천히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실제로 ‘풍덩’ 하는 소리가 나는지는 모르겠다. 내 몸은 그대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고 간헐적으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으니까.
맙소사.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우적댔다. 수영을 배워 뒀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나를 잡았다.
“유제니, 숨 쉬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엘리엇의 목을 끌어안았다. 세상에. 세상에.
“괜찮아요.”
천천히 엘리엇의 손이 내 등을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물이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어 있던 손끝이 엘리엇의 뜨거운 체온에 닿자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새삼 느껴졌다.
“괜찮습니까?”
뱃전으로 향하자 여자가 물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우리가 만난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인데 그녀는 나를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라, 라넌 경.”
기억난다. 나는 그녀가 뻗은 손을 잡았다. 아래에서 올려 주는 엘리엇 덕분에 나는 생각보다 쉬이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담요! 담요 가져와!”
“누구, 볼티고르 자작가에….”
배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내가 물에 빠지는 걸 보고 사람들이 몰려든 모양이다.
맙소사. 아무래도 이번 시즌에 소문의 주인공 자리를 내려놓는 건 포기해야 할 모양인데. 나는 라넌 경이 억지로 덮어 주는 담요를 끌어안고 뱃전으로 향했다. 아직 엘리엇이 안 올라왔다.
“누가 여기 좀 도와….”
엘리엇이 올라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할 때였다. 손이 쑥 올라오더니 뱃전을 짚었다. 동시에 라넌 경이 나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엘리엇의 상체가 쑥 올라왔다.
세상에.
나는 쏘아져 나오듯 물 밖으로 나와 배에 올라타는 엘리엇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어릴 때 동화책으로만 본 인어의 모습이 이러할까.
“괜찮습니까?”
엘리엇은 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그는 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는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내가 덮은 담요를 잡아당기더니 내 머리까지 감싸 버렸다.
“유제니, 괜찮습니까?”
맙소사. 그가 다시 물어본 다음에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나는 멍하니 엘리엇을 쳐다보다가 그도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유제니?”
“괘, 괜찮아요.”
이상하다. 엘리엇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차가운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헉.”
깜짝이야. 엘리엇의 손 때문에 눈까지 가려졌다. 덕분에 나는 엘리엇과 라넌 경이 무슨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열 있어요?”
“아직은 없군.”
“‘아직은’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항의하려는데 엘리엇이 내 이마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뭐라고요?”
여긴 충분히 안전하다. 흔들거리는 배 위고 배 밖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빼면 말이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도 전에 엘리엇은 나를 안아 들었다.
오, 제발.
“많이 다쳤어요?”
“누구예요?”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내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엘리엇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에 내일 발간될 발시안 일보의 기사 머리말이 떠올랐다. 위험한 물놀이! 결국, 부주의한 피해자 양산!
돌아 버리겠네.
“어디로 가는 거죠?”
몸이 흔들리는 거로 보아 엘리엇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라넌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둘 다 날 따라오면 안 되지!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라넌 경과 그녀의 뒤를 쳐다봤다. 당연하게도 배 위에는 레이디 데번과 볼티고르 경, 단둘이 남아 있었다.
“저 두 사람, 같이 두면 안 돼요!”
레이디 데번은 볼티고르 경을 미워하고 볼티고르 경은 그녀를 걷어차려 했다. 아마 후자는 자기를 공격한 것에 대한 분노 표출이었겠지만 어쨌든 둘은 같이 있어선 안 된다.
라넌 경은 잠시 당황하더니 곧바로 볼티고르 경과 레이디 데번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엘리엇을 쳐다보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데번 백작가와 볼티고르 자작가에 연락해서….”
“번즈 백작? 무슨 일이오? 잠깐, 그 여자분은….”
아악. 나는 그대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창피해 죽겠다. 물에 빠진 거로도 모자라서 아기처럼 누군가에게 안겨서 옮겨지다니.
잠시 뒤에 엘리엇이 나직하게 웃기 시작했다. 물론 소리가 들린 건 아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엘리엇을 노려봤다. 그러자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픈 곳은 없습니까?”
“내가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요.”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무엇을 말했냐는 표정에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를 짐짝처럼 옮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제가 감히 당신을 짐짝처럼 옮길까요.”
뭐라고? 내가 입을 딱 벌린 순간 나를 발견한 어머니와 줄리아, 로렌이 달려왔다.
“세상에, 유제니!”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맙소사. 너무 창피하다. 어머니는 완전히 겁에 질려 계셨다. 그야 당연하지! 홀딱 젖은 데다 담요로 둘둘 감겨서 엘리엇에게 짐짝처럼 옮겨졌으니까!
“난로를 가져오게.”
나를 들고 선실로 들어온 엘리엇이 지시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난로가 필요 없었다. 수치심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거든.
“유제니, 어떻게 된 일이니? 팔은 괜찮고?”
오, 팔.
잊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께 얼마 전에 다쳤던 팔이 사고에서 무사하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 담요 밖으로 팔을 뺐다. 신께 맹세컨대, 그건 진짜 힘들었다.
나는 홀딱 젖어 있었고 담요는 나를 칭칭 감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물을 흡수해서 달라붙어 있었거든.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번즈 백작.”
엘리엇이 그렇게 말하고 선실 에서 나가려 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레이디 비스컨답게 그를 불렀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먹힐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엘리엇은 내가 부르자마자 우뚝 섰고 그대로 몸을 돌려 내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네, 레이디 비스컨.”
맙소사.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싼 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인생에 이렇게 수치스러웠던 적은 없다. 강에 빠졌고 홀딱 젖었으며 담요로 칭칭 감긴 거로 모자라 엘리엇이 나를 들고 옮겼지.
하지만 그런 모든 수치스러움을 뒤로하고 나는 엘리엇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고마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느껴진다. 하지만 엘리엇이 나를 구했다. 그러니 나는 반드시 감사 인사를 해야 했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어요. 그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고마워요, 엘리엇.”
볼티고르 경이 레이디 데번을 걷어차려 했을 때, 하마터면 내가 다칠 뻔했다. 엘리엇은 볼티고르 경을 진압함으로써 레이디 데번뿐 아니라 나도 구해 줬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엘리엇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담요에서 꺼낸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압니다.”
빌어먹을.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잘난 걸까. 나는 다시 의사를 불러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리엇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똑같이 홀딱 젖었는데 이쪽은 비 맞은 생쥐 같은 꼴이라면 저쪽은 끝내주게 잘생긴 인어 같았다. 아니면 끝내주게 섹시한 물의 요정이거나.
“저 남자는 뭘 뒤집어써도 잘생겼구나.”
엘리엇이 선실에서 나가자마자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세상에. 내 생각을 읽으신 줄 알았다.
“어, 어머니도 번즈 백작이 잘생겼다고 생각하세요?”
내 질문에 어머니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흘겨봤다. 그리고 내 몸을 감싼 담요를 벗겨 내려 애쓰며 말했다.
“넌 내가 네 아버지와 왜 결혼했다고 생각하니?”
그건 그렇지. 줄리아의 말대로 내가 복에 겨워서 고마운 줄 모르고 있다면 그건 어머니 탓일 거다. 올리버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 초상화와 똑같거든. 아버지 쪽이 좀 더 호리호리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젠장. 자꾸만 생각이 올리버가 잘생겼다는 쪽으로 흐르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어머니가 담요를 떼어 내기 쉽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은 괜찮은 거지?”
오늘 아침에 붕대를 푼 탓인지 어머니는 계속해서 내 팔 걱정을 하셨다. 진짜 괜찮다. 의사가 이제 붕대는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물론 충격을 조심하라고 하긴 했지.
하지만 이 팔은 물 외에는 부딪친 곳이 없다.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를 위해 팔을 흔들었고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