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76/239)

81화. 16 – 4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는 조금 새삼스럽게 엘리엇을 쳐다봤다. 오늘 내 주변에 있는 남자들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게 되네.

나는 잠시 갑판을 둘러봤다. 넓고 음식도 많다. 좀 쌀쌀하겠지만 숄이나 담요도 많이 준비돼 있고.

“여기서 보는 야경도 근사하겠죠?”

그럴 거다. 조정 경기는 늦은 오후까지 이어진다. 사람들은 물놀이를 즐기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곤 한다.

내 질문에 엘리엇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갑판 위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춤을 출 수 있을까요?”

“악단을 불러오죠.”

그렇게 말한 엘리엇은 곧바로 하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에서 데번 백작 부인의 승선 허가가 떨어졌다.

“비스컨 백작 부인.”

배에 올라탄 데번 백작 부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엘리엇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마자 어머니의 손을 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사이, 백작 부인을 따라 승선한 하인들이 배 안을 살폈다.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나는 백작 부인의 옆에 레이디 데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레이디 데번이 사라진 건가요?”

내 예상이 맞았는지 백작 부인은 흐느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데번이 사라졌다 해도 왜 저렇게 당황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백작 부인이 왜 우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 데번은 성인이다. 아마 나랑 비슷한 나이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마, 맞아. 그 애는….”

백작 부인이 머뭇거리며 설명하기 시작하자 레이디 데번이 제정신이 아니라던 소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하지만 백작 부인은 그녀를 데리고 조정 경기를 구경하러 왔다. 정확하게는 물놀이겠지만. 그렇다면 레이디 데번의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는 뜻 아닌가?

“심신이 많이 지쳐 있어서….”

백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많이 좋아져서 데리고 나오신 게 아니었어요?”

“많이 좋아졌어. 좋아졌는데….”

거기까지 말한 백작 부인이 흠칫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내가 그 소문을 알고 있을 줄 몰랐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진 줄 알았어. 꿈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더라고.”

꿈?

또다시 들은 익숙한 소리에 나는 멈칫했다. 꿈이라고? 내 표정을 본 백작 부인이 물었다.

“왜요?”

“어, 무슨 꿈인데요?”

“바보 같은 꿈이야.”

손을 저은 백작 부인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재빨리 로렌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그녀가 곁으로 오자마자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무슨 꿈인데요? 그 꿈이 뭔가가 있으니 레이디 데번이 꿈에 집착한 거겠죠?”

“그 애 말로 굉장히 진짜 같았다고 하더군. 한동안은 아이를 찾으러 다녔으니까.”

아이? 레이디 데번에게 아이가 있나? 놀라는 내게 백작 부인이 재빨리 말했다.

“꿈에서. 꿈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았는데….”

“죽었다고 하죠?”

그때, 로렌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와 데번 백작 부인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봤다. 로렌은 자신이 끼어들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백작 부인의 말에 로렌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나와 백작 부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찍었어요.”

“이 아가씨 말대로야. 남편이 아들을 죽였다고 하더군.”

다시 내 시선은 로렌을 향했다. 그녀와 비슷하다. 로렌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보였다.

“마님, 이 배에는 없습니다.”

그때, 데번 백작가의 하인들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녀가 이 배를 찾아봐야겠다고 한 이유를 알겠다. 누군가가 숨을 정도로 큰 배가 그리 많지 않다. 경기의 후원자인 거마로트 공작의 배 정도겠지.

“실례가 많았어요, 비스컨 백작 부인. 도와줘서 고마워요, 번즈 백작.”

백작 부인은 금세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어머니와 엘리엇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무슨 심정일까. 제정신이 아닌 딸을 데리고 물놀이를 나왔는데 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의 심정이.

나는 저도 모르게 강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강에 누군가가 빠졌다면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거마로트 공작님의 배는 확인해 보셨나요?”

나는 데번 백작 부인을 배웅하며 물었다.

거마로트 공작의 배가 여기서 가장 크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딸을 찾기 위해 배를 수색하겠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대이기도 하다.

내 생각대로 백작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가 보려고.”

확실히 부탁하기엔 좀 어려운 상대다. 나는 그녀를 동정한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애써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볼티고르 경은요?”

하선하는 백작 부인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갑판을 걷는데 볼티고르 경이 생각났다. 밀리의 전 약혼자. 그를 만나러 가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백작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걱정에 고맙다는 듯 내 손을 잡고 다독이며 말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밀리는 웨스를 아주, 싫어하더구나.”

싫어한다고? 꿈 때문에?

그러고 보니 밀리가 꾼 꿈에서 남편이 아들을 죽였다고 했다. 파혼하지 않았다면 볼티고르 경이 밀리의 남편일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밀리가 웨스를 보러 가지는 않았을 거야. 아주, 끔찍해했으니까.”

문득 내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나도 엘리엇이 나오는 꿈을 꿨다. 설마 이거 무슨 예지몽 같은 건가? 로렌과 밀리가 꾼 것과 비슷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아주 이상했다. 나는 백작 부인이 하선하는 것을 본 뒤 로렌을 불러 물었다.

“로렌, 네 꿈에서 레이디 데번도 나왔니?”

로렌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 질문에 입술을 깨물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온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야기는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였는지 들려줘.”

“내 꿈을 믿는 거예요?”

믿는 건 아니다. 아니, 믿나? 나는 로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로렌과 밀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꿈에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봤고 미래를 바꾸겠다고 결심했다.

두 사람의 꿈이 같다면, 그러니까 같은 시간 대라면 믿지 못할 것도 없다.

“믿으려고 노력 중이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로렌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기억에, 이렇게 말하니까 우습지만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은 기억이라고 칭하는 게 우습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흔들었고 로렌은 진지하게 말했다.

“볼티고르 경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했다고 들었어요. 잡힐 것 같으니 아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대요.”

그렇군. 밀리가 남편이 아들을 죽였다고 말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리고 밀리가 볼티고르 경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그 꿈 말이야.”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디 데번이 미쳤다고 소문이 난 건 몇 주 전이다. 정확하게는 엘리엇이 수도에 나타나기 직전의 일이다.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여전히 밀리는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현실감이 있어? 꿈에서 깼는데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보통 꿈이라는 건 일어난 순간부터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내 질문에 로렌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내쉰 뒤 말했다.

“네. 몇몇 부분은 희미해지긴 했어요. 그런데 어떤 부분은 어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해요.”

데번 백작 부인은 밀리가 웨스를 끔찍해했으니 찾아갈 리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생한 꿈에서 웨스는 밀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죽였다.

과연 밀리가 웨스를 원망하지 않을까?

나는 벌떡 일어나서 볼티고르 경의 배를 찾기 시작했다. 웨스 볼티고르의 배는 조금 뒤에 있었다. 나는 배 위에서 남자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확인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밀리가 웨스를 공격할 거라고? 그녀가 꿈에 얽매여서 현실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밀리가 정말 웨스를 공격할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내 억측인지도 모른다.

“어?”

그때, 볼티고르 경과 이야기하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일어나더니 배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배 밖에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레이디 데번.”

나는 흠칫 놀라 볼티고르 경의 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볼티고르 경의 배에 올라탄 레이디 데번이 볼티고르 경에게 달려드는 게 보였다.

“밀리! 그만둬요!”

갑자기 달려든 탓에 볼티고르 경은 속수무책으로 밀리에게 당해 배 바깥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는 흔들거리는 배에 올라타 밀리를 잡았다.

“이거 놔!”

내가 붙잡은 탓에 밀리의 몸이 흔들리면서 틈이 생겼다. 볼티고르 경은 그사이에 그녀를 뿌리치고 물러났다.

“미쳤어?”

다음 순간, 볼티고르 경이 밀리를 걷어차려는 것처럼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안 돼! 나는 반사적으로 레이디 데번을 끌어안았다.

“미친 건 댁이겠지.”

곧이어 엘리엇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가 배 위에 올라탄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엘리엇은 내 뒤를 따라와서 볼티고르 경을 밟고 있었다.

“당신!”

그때, 내 얼굴을 본 밀리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녀는 내게 덤벼들며 소리쳤다.

“내 딸 살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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