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75/239)

80화. 16 – 3

전 약혼자. 맞다. 레이디 데번도 파혼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파혼이 많네요.”

다들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줄리아의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저런. 나는 어머니의 눈빛을 받고 어깨를 움츠리는 줄리아에게 고개를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엘리엇에 내게 속삭였다.

“백작 부인께선 당신이 파혼한 게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당연하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가 멈칫했다. 세상에. 이거 차가운 차네.

“여기.”

그때, 엘리엇이 하인을 불렀다. 그는 내 손에서 찻잔을 가져가더니 하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께는 따듯한 차로 다시 내오게. 백작 부인께도.”

내가 멈칫한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 물론 어머니께는 그래야 한다.

어머니는 찻잔이 차가운 것을 느끼고 인상을 쓰고 있다가 하인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거봐, 어머니는 싫어하신다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엘리엇의 사과에 기분이 풀어지신 모양이었다. 그는 괜찮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 우리 대화 중이었지. 나는 어머니께 들리지 않도록 그에게 속삭였다.

“자식이 파혼하는 걸 반길 사람이 있을까요?”

“렌시드 경 같은 작자라 해도 말입니까?”

“어머니는 어닝과 파혼한 게 싫으신 게 아니라 파혼 자체가 싫으신 거니까요.”

가능하면 조용히 파혼하길 바라셨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내 설명에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인에게 찻잔을 받아 내게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따듯한 차다.

여름이긴 하지만 오전이라 약간 서늘했다. 나는 따듯한 차를 홀짝이며 숄을 가져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녁이 되면 조금 서늘할 것 같다.

“출발!”

심판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깃발이 올라갔다. “와아아” 하는 함성이 이어지고, 길고 폭이 좁은 배에 탄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빠르네요.”

뱃전에 서서 경기를 구경하던 줄리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게. 나는 물살을 가르고 쭉쭉 나가는 배를 구경했다.

올리버가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어 보인다. 나란히 앉은 남자들이 노를 젓는 모습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비슷하게 보였다.

“저렇게 소리를 질러 대니 목이 쉬었지.”

어머니는 구령을 외치는 올리버를 보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올리버는 다른 선수들과 반대 방향으로 앉아 배가 이동하는 쪽을 보고 있었다. 그 말은, 우리에게는 올리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올리버는 노를 안 젓네요.”

줄리아의 말대로 올리버는 다른 선수들과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을 뿐 아니라 노도 젓지 않고 있었다. 자기가 대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대장이라 그런가?

“콕스라 그렇습니다.”

그때, 엘리엇이 말했다. 콕스? 내가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설명했다.

“쉽게 말하면 조정의 우두머리죠.”

우두머리. 올리버도 자신이 대장이라고 했다. 나는 내 오라버니를 새삼스럽게 쳐다봤다. 맨날 집에서 뒹굴거리거나 클럽에 처박혀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정에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올리버! 힘내!”

“비스컨 남작님, 파이팅!”

우리뿐 아니라 여기저기에서도 올리버를 응원하는 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왔다. 물론 다른 선수들을 응원하는 소리도 있었고.

하지만 올리버를 응원하는 사람 중에는 여자도 꽤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고.

“허.”

나는 다시 한번 올리버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이건 좀 놀랍다.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는 건 안다. 하지만 기껏 해 봐야 올리버를 잘 모르는 어린 아가씨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기서 올리버를 응원하는 여자들은 수도 상당했고 나이도 다양했다.

“왜요?”

내 표정을 본 로렌이 물었다.

“나 지금 좀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기분이야.”

“새로운 세상이요?”

문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세상이었다는 거다. 나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올리버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꽤 있네?”

“꽤?”

줄리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강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과 뱃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다 올리버를 응원하고 있잖아.”

“아뇨. 제 말은 올리버가 꽤 인기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는데요.”

“꽤 인기 있는 게 아니야?”

“엄청 인기 있죠.”

세상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말했다.

“세상이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람?”

“유제니!”

재빨리 어머니께서 혼내시긴 했지만 이미 줄리아와 로렌에게서 웃음이 터진 뒤였다. 믿을 수가 없네. 어떻게 올리버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수가 있어?

“비스컨 남작님은 잘생겼으니까요.”

로렌까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말을 잃었다. 그 말, 전에 줄리아도 한 적이 있다. 내가 복에 겨워 있다고도 했지.

문제는 그 잘생긴 남자가 나랑 같이 자란 내 오라버니라는 거고.

“비스컨 남작이 잘생겼다는 말을 못 믿으시는 눈치인데요.”

할 말을 잃고 자리에 앉자 엘리엇이 내 옆에 앉아서 물었다. 올리버가 잘생겼다는 건 믿는다. 살면서 몇 번 올리버에게 반한 친구들을 본 적이 있으니까.

이 정도로 인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거지.

나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피로감에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올리버가 화장실 가기 무섭다고 우는 걸 봤거든요.”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언제요?”

“아마 다섯 살 때였을걸요.”

그러자 이번에는 엘리엇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설마 이 나이에 올리버가 화장실 가기 무섭다고 울었겠니. 나는 그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깨닫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당신도 일곱 살 때는 화장실 가기 무섭다고 울었을걸요?”

“안 그랬습니다.”

“해가 진 다음에 화장실 가는 게 안 무서웠다고요?”

“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고 엘리엇 역시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젠장, 잘생겼네.

나는 엘리엇의 짙은 눈썹과 깎은 듯한 코, 날렵한 턱선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엘리엇에게 품는 이 감정을 사교계의 여자들이 올리버를 두고 품는단 말이지. 윽, 괜히 생각했어.

“백작님.”

그때, 엘리엇의 하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더니 엘리엇에게 말했다.

“어떤 여자분이 배를 살펴봐도 되냐고 물어보시는데요.”

“그런데?”

엘리엇은 싸늘하게 물었다. 방금 전 나와 웃으며 이야기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하인은 그런 그의 태도에 익숙한 것처럼 말했다.

“데번 백작 부인이라고 하시는데 거절할까요?”

“잠시만요.”

아는 사람이다.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엘리엇과 하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데번 백작 부인이 배를 살펴보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왜요?”

하인은 허락을 구하듯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리고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게 말해 주었다.

“들어온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답니다.”

이 배에 탄 사람은 우리뿐이다. 나와 어머니, 줄리아와 로렌. 배 주인인 엘리엇은 제외해도 되겠지.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초대한 적 없는 사람이야.”

“엘리엇.”

나는 재빨리 그를 불렀다. 들어온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니 이유가 너무 이상했다. 배에 타 보고 싶은 거라면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는 편이 더 낫다는 걸 백작 부인도 알 것이다.

“끼어들어서 미안한데요.”

나는 재빨리 사과했다. 여기는 엘리엇의 배고 하인 역시 엘리엇의 하인이다. 내가 끼어드는 건 무례한 행동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나와서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엘리엇이 말했다. 그는 내게 몸을 돌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끼어들어도 됩니다.”

말투만큼이나 다정한 말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하인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그는 굉장히 고약한 냄새를 맡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엘리엇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하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은 아니네.”

“잠깐만요.”

데번 백작 부인이 여기까지 와서 부탁을 한다는 건 분명히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거다. 나는 엘리엇의 주의를 내게로 돌리기 위해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는 분이잖아요. 도와주면 안 돼요?”

엘리엇의 시선이 그의 팔에 얹은 내 손으로 향했다. 엇, 불쾌했나. 내가 손을 떼려 하자 그는 자신의 손으로 내 손 위를 덮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백작 부인을 도와준다면 저는 무엇을 얻습니까?”

무엇을 얻냐니. 배를 좀 보게 한다고 해서 엘리엇이 손해를 보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엘리엇이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저는 그만큼 당신과 단둘이 대화할 시간을 빼앗기는 거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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