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4/239)

79화. 16 – 2

운이 좋다고? 왜? 내가 물어보려는 순간, 길 쪽에서 누군가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유제니!”

그런트 양이었다. 나는 리사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갑판의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그러자 재빨리 엘리엇이 내 뒤를 따랐다.

“가방이 아주 멋지네요!”

놀랍게도 리사는 짐 가방을 칭찬했다. 아니, 물론 세련되긴 했지만 리사가 칭찬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고마워요.”

“누구 배예요?”

자연스럽게 리사의 관심은 내가 올라탄 배로 향했다. 나는 내 뒤로 다가온 엘리엇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번즈 백작님이요.”

“어머.”

리사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입을 막고 나와 엘리엇을 바라보더니 곧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겠군요. 다음에 집에 방문해도 될까요?”

“그럼요.”

생각해 보니 리사와 막 친해졌는데 이런저런 사건이 생겨서 몇 번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나는 꼭 놀러 오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리사를 보냈다. 그리고 엘리엇을 돌아보려는데 또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레이디 비스컨.”

잠깐. 로렌이 왜 내게 여기 잠시 서 있으라고 했는지 좀 알 것 같은데? 내가 여기 서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심지어 내 옆에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하는 엘리엇이 서 있다.

우리 뒤에는 처음 보는 짐 가방이 쌓여 있고.

아주 잠깐, 나는 내게 인사를 건넨 사람을 찾지 못했다. 데번 백작 부인이 마차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차 창문으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는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별일 없으시죠?”

내 인사에 백작 부인은 내 옆에 선 엘리엇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은 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레이디 데번과 같이 왔나 봐요.”

데번 백작 부인이 다시 손을 흔들고 떠나자마자 나는 재빨리 엘리엇에게 속삭였다. 레이디 데번에 대한 소문은 들었다. 미쳤다고 하던가.

왜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갑자기 약혼자에게 파혼해 달라고 요구했으며 사교계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레이디 데번이면 데번 백작 부인의 따님입니까?”

데번 백작의 여자 형제도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레이디 데번이다. 나는 엘리엇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밀리 데번일 거예요. 몸이 안 좋다던데 여기 올 정도면 좀 나아졌나 보네요.”

그렇게 말하며 엘리엇을 쳐다보자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응? 내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

“몸이 안 좋단 말이죠?”

엘리엇도 그 소문을 들었나 보다. 나는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꼬리 잡지 말아요.”

굳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정신이 어쩌고 할 필요는 없잖아. 몸이 안 좋다는 거로 충분하다.

엘리엇은 내게 혼났음에도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그는 나를 향해 팔을 내밀며 말했다.

“리즈 양의 요구대로 해 줄까요?”

그도 나처럼 로렌이 뭘 노렸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그의 팔 안쪽에 손을 올려놓으며 사과했다.

“이런 일에 엮이게 해서 미안해요.”

하릴없이 뱃전을 걸어 다니는 건 엘리엇에게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귀찮은 일일 거다. 그것도 사람들이 짐 가방을 볼 수 있도록 짐 가방 주위를 도는 건 더 그렇겠지.

하지만 엘리엇은 다정하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과 단둘이 있을 수 있으니 제가 운이 좋은 거죠.”

그건 엘리엇이 내게 구혼 중이라 그렇겠지. 전에 왕대비 전하도 내게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번즈 백작과 결혼하라고. 그와 결혼하는 게 가장 좋다고.

조금 혼란스러워져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엘리엇을 쳐다봤다. 이 남자는 왜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걸까.

“엘리엇,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무엇이든지요.”

흔쾌한 대답에도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왜 나와 결혼하고 싶은 거죠?”

그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닝과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렇다면 엘리엇은 나를 사랑하는 건가? 하지만 왜?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내 어디가 좋아서?

그 순간 무서워졌다. 왕대비 전하의 말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걸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면? 엘리엇이 필요한 걸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와 결혼하고 싶은 거라면 어쩌지?

“미안해요. 실언이었어요.”

나는 재빨리 사과하며 그에게 물러났다. 그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줄리아가 소리쳤다.

“세상에!”

뭔데? 나는 재빨리 줄리아에게 다가갔다. 엘리엇 역시 약간 시간 차를 두고 내 뒤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엘리엇이 내가 그가 원하는 유서 깊은 집안의 아가씨라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아주 많이 상처받을 것 같거든.

“어머.”

줄리아와 로렌 곁으로 다가간 나는 두 사람이 본 것을 보고 똑같이 놀랐다. 거기에는 작은 인조 호수가 있었다. 잠깐, 이걸 호수라고 해도 되나?

“이게….”

“수영장입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엘리엇이 말했다. 그게 뭐지?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그게 뭐냐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로렌이 말했다.

“수영하는 곳이요.”

“수영하는 곳이 필요해?”

수영은 강이나 호수에서 하면 되잖아? 아니면 바다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로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엘리엇의 개인 수영장인가? 아니, 하지만 여긴 강이잖아? 배 주변에 있는 게 다 물이다. 물 위에 띄워 둔 배에 또 수영할 곳을 만든다니, 그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네.

“제가 꾼 꿈에서는요.”

그때, 로렌이 입을 열었다. 꿈? 그녀는 꿈에서 자신의 인생을 미리 살아 봤다고 했다. 거기서 내가 왕이라고 했지.

나는 자연스럽게 로렌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내가 왕이라니, 터무니없는 꿈이지만 흥미롭긴 하다.

“지금은 아니고 좀 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 개인 수영장이 유행하거든요.”

“개인 수영장?”

수영장이 개인이라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이 배는 엘리엇의 것이니 이 수영장 역시 엘리엇, 개인의 수영장이다. 그런데 개인 수영장이라니?

어리둥절해하는 나와 어머니, 줄리아에게 로렌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아마 제 기억에 몇 년쯤 뒤에 뉴커크에 수영장이라는 게 생겨요.”

굉장히 혼란스러운 말이군. 로렌의 기억인데 시제는 미래다. 나는 입을 딱 벌렸고 로렌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너무 더러워서 폐쇄되고요.”

“어, 음….”

무슨 소린지 알겠다. 이렇게 물을 계속 가둬 두면 당연히 더러워지겠지. 게다가 많은 사람이 이용하면 더 더러울 테고.

로렌은 내 끔찍하다는 신음에 어깨를 으쓱했다.

“돈 있는 사람들이 개인 수영장을 만든대요. 그게 여기, 발시안에서도 퍼졌는데….”

퍼졌는데?

계속 이야기하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로렌은 멈칫하더니 대충 얼버무렸다.

“금방 사라지더라고요.”

“그야 금방 사라지겠지.”

왜 금방 사라졌는지 묻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로렌에게 재미있는 꿈이라고 하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개인 수영장이라니. 수영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만들겠지. 당연히 보통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을 테고.”

그 수영장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여기 있다. 엘리엇 번즈. 나는 수영을 좋아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고 엘리엇은 어머니에게 웃으며 말했다.

“네. 수영을 좋아합니다.”

그렇겠지. 어머니는 엘리엇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안쪽도 보고 싶은데.”

“이쪽입니다.”

우리는 엘리엇을 따라 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 말하면 배 아래쪽으로.

“이게 번즈 백작의 배라고?”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와 어머니를 만나러 온 올리버는 엘리엇의 커다란 배를 보고 감탄했다. 그는 갑판에 차려진 음식과 다과를 보고 입맛을 다시더니 갑판에 있는 수영장을 보고는 경망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올리버.”

즉각적으로 어머니의 지적이 날아왔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나는 사람들 앞에서 올리버가 혼나지 않도록 재빨리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는 친구의 배를 탄다며?”

누군지 몰라도 이 배보다 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물놀이를 위해 강에는 수많은 배가 떠 있었다. 그중에서 엘리엇의 배보다 큰 배는 별로 없었고.

국왕 전하의 배와 조정 클럽의 후원자인 거마로트 공작가의 배가 가장 컸다. 하지만 거마로트 공작가의 배는 텅 비어 있다고 들었다. 공작가에서 배를 띄워 두기만 할 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아마 아들이 여행 중이라 그럴 거다. 거마로트 경도 조정 클럽이었다고 들었거든. 올리버가 조정 클럽에 들어간 데는 거마로트 경의 영향이 있었다.

“어, 조금 있다가 가 보려고.”

“친구 누구?”

“아, 볼티고르 경이요.”

어머니의 질문에 올리버가 대답했다. 볼티고르 경? 아는 사람이다. 친한 건 아니고 그냥 인사를 하고 안면이 있었던 정도.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를 아느냐가 아니었다. 나는 엘리엇의 하인이 가져다주는 찻잔을 받아 들며 물었다.

“볼티고르 경이면 레이디 데번의 약혼자 아냐?”

“전 약혼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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