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3/239)

78화. 16 – 1

“약간 잘렸다는군요.”

라이언 경의 말에 나는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테드 라이언. 올리버의 친구다. 서로 얼굴도 알고 인사도 나눈 사이지만 내가 지금 그와 마주 앉아 있는 이유는 그가 내게 구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가요?”

나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 하지만 속은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네.

나와 어닝의 파혼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뒤 우리 집에는 남자들과 그들이 보낸 선물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막 사교계에 나갔을 때보다 더 많은 남자와 선물이었다.

“렌시드 경 말입니다. 허드슨 경에게 신체 일부가 다쳤답니다.”

뭐라고? 나는 테드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 전 약혼자가 친구와 다투다 다친 이야기를 가십으로 소비하는 걸 기분 나빠해야 할지, 너무 잔인하다고 기분이 나빠져야 할지 모르겠다.

아, 어쨌든 기분 나빠하면 되는 거군.

하지만 테드는 내가 기분 나빠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재미있다는 투로 계속해서 말했다.

“기사에도 났잖습니까? 심지어 커런트의 속삭임에서는, 실례. 레이디께서 그런 가십지를 보실 리가 없지요.”

그런 가십지, 아주 열심히 본다. 어머니와 올리버와 셋이 나눠 보느라 두 부나 구독하고 있지.

물론 그런 걸 테드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 가십지에서 허드슨 경이 렌시드 경의 신체 일부를 잘랐다고 주장했거든요.”

알고 있다. 아주 자극적이고 저속한 기사였지. 어머니는 매우 불쾌해하셨지만, 신문을 태우라고 명령하지는 않으셨다.

“그게 어딘지 다들 궁금해했는데 얼마 전에 렌시드 경을 본 사람이 있답니다.”

허어. 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마르셀이 어닝을 다치게 했다니.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군.

문득, 마르셀이 진짜로 어닝을 사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신당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도 화가 나기는 했지만 어닝의 어디 한 군데를 잘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하지만 마르셀은 그 정도로 화가 났고, 그건 그 사랑의 크기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레이디 비스컨께 하기는 너무 잔인한 이야기 같습니다만.”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나와 테드는 물론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또 다른 구혼자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엘리엇 번즈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뒤이어 집사가 말했다. 나는 약간 지친 표정의 빅스를 보고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근 우리 집에 오는 방문자들은 다 저 모양이다. 집사가 소개를 하기도 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려 버린다.

“번즈 백작님.”

나는 엘리엇에게 눈을 흘기며 인사를 건넸다. 빅스가 소개해 줄 때까지 기다렸어야지. 하지만 엘리엇은 나를 보고 씩 웃더니 금세 테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렌시드 경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굳이 레이디 비스컨께 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어차피 곧 떠날 사람 아닙니까.”

“떠난다고요?”

처음 듣는 소식에 나는 놀라서 물었다. 어닝이? 어디로?

엘리엇은 나를 쳐다보더니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짐마차가 그 집 앞에 서 있더군요. 아마 영지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오는 길에 본 모양이다. 그렇구나. 나는 최근 어닝과 렌시드 가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떠올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우리 집에 오는 구혼자마다 신이 나서 어닝과 렌시드 가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전해 주고 있다. 덕분에 나는 어닝과 마르셀 사이가 의심스럽다는 소문까지 도는 것도 안다.

물론, 나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이야기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거든.

“하긴, 허드슨 경에게 호되게 혼났으니 영지로 돌아가서 쉬는 편이 좋겠군요.”

또 다른 구혼자, 제임스가 말했다. 엘리엇은 그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몰랐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허드슨 경에게 호되게 혼났다고요?”

그도 몰랐나 보다. 커런트의 속삭임을 안 보나 보군. 어쩌면 발시안 일보만 보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드슨 경이 공격했다네요.”

“그 뒤에 렌시드 경의 손가락이 짧, 아니, 붕대를 감고 있는 걸 본 사람이 있고요.”

이어진 테드의 부연 설명에 엘리엇은 “아” 하고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거 참 안됐군요.”

전혀 안된 표정이 아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다행히 그 소리는 엘리엇의 차를 내온 하인 덕분에 묻혔다.

“이번 조정 경기는 관람하시겠죠?”

주제는 올리버가 참여하는 조정 경기로 옮겨졌다. 이제 곧이다.

오늘 아침에도 올리버는 아침 일찍 훈련하러 나갔다고 들었다. 올리버의 아침 식사를 걱정한 어머니께 집사가 샌드위치를 싸 줬다고 했으니 아침도 먹었겠지.

“네. 번즈 백작님께서 배를 준비하겠다고 하셔서요.”

이번에는 강가가 아니라 강 위에서 구경한다. 물놀이용 배는 몇 명 정도만 탈 수 있는 작은 배다. 친한 친구나 가족 몇 명만 불러서 차를 마시는 용인데 엘리엇은 나와 줄리아, 로렌까지 문제없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냥 강가에서 보겠다고 하셨다. 종종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나거든. 몇 년 전에는 드레스에 휘말려 결국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걱정하는 어머니를 설득한 건 올리버였다. 조정 클럽이 모여 여는 경기다. 후견인은 공작님이고. 안전을 위해 강에 구조용 작은 배를 몇 개나 띄워 놓고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포진해 둘 거라고 했다.

“아, 전에 부탁하신 건 처리해 뒀습니다.”

“고마워요.”

엘리엇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테드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부탁이요?”

“아, 제가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 부탁했거든요.”

지난번에 매린 경과 대화할 때 찾아온 로렌이 부탁을 하나 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지만 엘리엇에게도 부탁하고 싶다고 해서 대신 부탁해 줬다.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테드뿐 아니라 제임스도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는 엘리엇을 한 번 쳐다본 뒤 말했다.

“가방에 자기가 가진 천을 덧대도 되냐고 묻더라고요.”

별거 아니었다. 물놀이를 갈 때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갈아입을 옷이나 이런저런 걸 가져가게 마련이다. 그런 걸 담는 짐 가방에 그녀가 가진 천을 덧대도 되냐고 물어본 거다.

“뭐하러 그런 걸….”

역시나 테드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멈췄다. 올리버도 똑같이 말했다. 멀쩡한 짐 가방을 천으로 감싼다고? 왜?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요, 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천은 로렌이 가지고 있는 거고 짐 가방을 감싸는 것도 그녀가 한다고 했다.

이왕 할 거면 내 짐 가방뿐 아니라 엘리엇의 짐 가방도 덧대고 싶다고 하길래 이야기를 전달해 준 것뿐이다.

* * *

“세상에.”

조정 경기 날이 밝았다. 먼저 올리버가 출발하고 나서 마차를 타고 경기가 열리는 강으로 온 나는 엘리엇이 안내한 곳에 정박한 배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돌아보자 어머니와 로렌, 줄리아까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자, 작은 배인 줄 알았는데?”

어찌나 놀랐던지 어머니는 약간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엘리엇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배 크기는 말씀드린 적이 없었는데요.”

그랬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와 올리버가 작은 배일 거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이렇게 큰 배는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올라가시죠.”

엘리엇의 말에 우리는 승선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경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우리와 엘리엇의 배를 구경하는 게 보였다.

“가방은 어디에 둘까요?”

우리 집 하인이 물었다. 아, 맞다. 짐 가방.

혹시 몰라서 약간의 음식과 담요를 가져왔다. 여름이긴 하지만 강이라 바람이 찰 수도 있거든. 그리고 이렇게 큰 배일지 몰라서 깔고 앉을 푹신한 쿠션도 몇 개 챙겨 왔다.

“안쪽에….”

“가장자리에 놔 주세요.”

여차하면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안쪽에 놓아 달라고 말하려는데 로렌이 나섰다. 그녀는 하인에게 가방을 최대한 배 가장자리에 놓아 달라고 부탁하더니 하인들이 짐을 두는 것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저 애, 뭐 하는 거니?”

어머니가 물었다. 그러게. 나는 로렌이 뭘 하는지 몰라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밖에서 가방이 잘 보이게 하려나 본데요.”

“가방을 자랑해서 뭐하게?”

나도 로렌이 뭘 하려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지난번에 찾아온 로렌은 사 둔 체크무늬 천을 팔아치울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천은 언제나 필요한 거니까 가격을 많이 내리면 팔 수는 있다. 하지만 로렌은 그걸로 이익을 보고 싶어 했고 옷으로 비싸게 팔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한 걸 거다.

그게 짐 가방을 체크무늬 천으로 감싸는 거다. 하지만 그게 천을 어떻게 비싸게 판다는 건지 모르겠네.

어리둥절해하며 로렌과 그녀가 지시하는 대로 진열된 짐 가방을 보던 나는 낡고 투박한 우리 집 짐 가방이 꽤 세련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나무와 가죽으로 된 평범한 짐 가방이었는데?

“어머.”

어머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모양이다. 로렌이 가방 진열을 끝마치고 뒤로 물러나자 가볍게 감탄을 내뱉었다.

“세련돼 보이네.”

“그러게요.”

“레이디 비스컨, 이쪽으로 와 주실래요?”

깜짝이야. 로렌은 꼭 내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며 부탁했다. 나는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갔고 로렌이 내게 속삭였다.

“혹시 번즈 백작님도 와 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렵진 않지만 왜 직접 부르지 않고? 나는 의문을 품었지만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려 그를 불렀다.

엘리엇은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우리만 이쪽으로 불린 이유를 알기 위해 로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가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있어 주세요.”

“응?”

여기? 짐 가방 앞에서? 왜?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로렌은 이미 어머니와 줄리아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 버린 뒤였다. 엘리엇과 단둘이 짐 가방 앞에 남은 나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에 우리 둘이 잠깐만 있어 달라네요.”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로렌을 돌아보더니 나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제가 오늘 운이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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