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2/239)

77화. 15 – 11

올리버가 그랬다. 매린 경이 사과하러 올 거라고. 문제는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다는 거지. 그 뒤로 바로 연락이 없길래 오라버니가 허세를 부린 줄 알았는데 설마 너무 심하게 맞아서였나.

좀 미안하다.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차를 내와도 마실 수 있나 모르겠네. 입술이 저렇게 터졌는데.

“부탁 좀 하러 왔습니다.”

응? 나는 느닷없는 매린 경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올리버를 때려 달라는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없다. 평소에도 때리고 싶은 오라버니지만 날 위해 행동했다는 이유로 때릴 수는 없잖아.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매린 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에스마 양과 이야기 좀 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이야기요?”

나는 에스마 양과 그리 친하지 않다. 서로 얼굴도 알고 인사를 하기는 하지만 대화를 해 본 적이 별로 없거든.

매린 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왜 에스마 양이 나오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지난번 제 실수로 에스마 양이 파혼하겠다고 해서요. 그녀에게 가서 제가 사과를 했고 레이디 비스컨이 사과를 받아들였다고 해 주시면….”

“매린 경.”

무슨 말인지 알겠다. 더 듣기 싫어서 나는 재빨리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나한테 사과하러 온 건 에스마 양이 파혼하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급한 불을 끄러 왔다는 말이다. 나를 두고 저질스러운 농담을 한 걸 잘못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올리버에게 맞은 그의 흔적을 다시 한번 살폈다.

이제 보니 멍이 보라색으로 변한 게 보였다. 올리버는 매린 경을 때린 날 내게 사과하러 올 거라고 말했을 거다. 매린 경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오라버니에게 맞고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하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하녀가 가져다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생각대로 매린 경은 입술이 아파서 차를 마시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는 인상을 쓰려다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스마 양에게 레이디 비스컨이 뭐라고 말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녀가 파혼하겠다고 한 거겠죠.”

“내 의견에 그 정도 힘이 있다고 생각해 줘서 고마운데요.”

내 말 한마디에 인륜지대사 중 하나인 결혼이 무산될 거라 생각하다니. 매린 경이 날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줄은 몰랐다.

물론 비꼬는 거다. 정말 날 높게 평가했다면 감히 나에 대한 저질스러운 소문을 입에 담지 못했겠지.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난 에스마 양에게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런 일로 남의 혼담에 이래라저래라할 수도 없고요.”

매린 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이미 일그러져 있으니 더 일그러질 것도 없구나. 하지만 그는 좌절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금세 다시 내게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레이디 비스컨이 설득해 주실 순 있겠죠?”

“제가 왜요?”

나는 에스마 양과 잘 알지도 못한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잠깐. 에스마 경의 딸이었나? 흰 사자 기사단의 단장 말이다.

기사단장의 가족이라면 예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법이다. 줄리아를 보면 과연 그럴지 의심스럽지만, 그녀도 스무 살이 넘으면 훨씬 더 좋아질 거다.

“제, 제가 사과하면 되잖습니까.”

매린 경의 말에 에스마 양을 떠올리던 나는 가볍게 인상을 썼다. 왜 에스마 양이 매린 경과 파혼하려 하는지 알겠다.

“매린 경.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군요.”

에스마 양은 본인의 판단으로 매린 경과의 파혼을 결정한 거다. 그걸 내가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당신의 사과가 뭐 그리 대단해서 내가 에스마 양에게 무례를 저질러야 하나요?”

“무례요?”

“그녀는 스스로 판단해서 당신 같은 남자와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내가 어닝에게 그러하듯이요. 나는 그걸 존중하고 싶은데요.”

매린 경의 입이 딱 벌어졌다. 벌어진 거 같다. 중간에 아파서 멈칫했거든.

하지만 그는 금세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렇게 남의 인생을 망쳐도 되는 겁니까?”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네. 나는 매린 경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내가 망쳤나요?”

“당신이 에스마 양에게 말만 해 주면….”

“해 주면요?”

내가 뭐라고 에스마 양이 내 말을 듣는단 말인가. 나는 뭔가 변명하려는 매린 경의 말을 막기 위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 집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최소한의 지능은 가지고 있기를 바라요. 그건 에스마 가문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이해가 안 되나? 나는 매린 경을 위해 다시 말했다.

“할 말과 못 할 말을 구분하는 데는 최소한의 지능이 필요하죠.”

“그건 실수였다고요!”

뭐,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 실수했다면 적어도 피해자의 오라버니에게 두들겨 맞기 전에 사과해야겠다는 지능은 가지고 있었어야죠.”

매린 경의 입이 딱 벌어졌다. 잠깐. 나는 그의 놀란 표정을 보고 의심스러워서 물었다.

“설마 남에게 그런 저질스러운 소리를 하고도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에스마 가에서 파혼하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요.”

내가 에스마 양이라 해도 파혼했을 거다. 그렇게 할 말 못 할 말도 구분 못 하는 멍청이와 결혼해야 한다니, 끔찍하다.

다시 매린 경이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때, 집사가 열린 문틈으로 말했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로렌이다. 일부러 이 시간에 오라고 했다. 먼저 온 손님은 다른 손님이 오면 돌아가는 게 예의다. 내가 붙잡지 않는다면 말이지.

나는 매린 경에게 고개를 돌리고 친절하게 말했다.

“도와줄 수 없어서 유감이네요.”

매린 경은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집사가 들어오자 포기했다. 나는 그에게 조심해서 돌아가라고 인사를 한 뒤 응접실에서 나왔다.

그 뒤로 매린 경은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에스마 양을 좀 귀찮게 군다고는 들었다. 그건 놀랍지 않다. 어닝도 그랬으니까.

어닝은 놀랍게도 나와 만나고 난 다음 날부터 조용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도.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말이 들리는가 싶더니 싹 가라앉았다.

“올리버가 무서웠나 보지.”

응접실에서 신문을 읽던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아침 식사도 거르고 조정 연습을 하러 간 올리버를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올리버가 어닝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고 들었다. 동생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죽여 버려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그런 예의를 따졌다고.

“쫓아가서 결투하는 건 아니겠죠?”

내 질문에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결투는 불법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불법이라서가 아니라 결투하다가 올리버가 다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아, 물론 나도 걱정이 되긴 한다. 올리버의 검술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거든. 그렇다고 어닝은 훌륭하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설마. 그렇게 책임감 없는 녀석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어머니의 말에 나는 매린 경의 얼굴을 봤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얼굴이 엉망인 데에 비해 몸은 다친 곳이 적다고 들었다. 뼈에 약간 금이 간 정도라고.

올리버에게 왜 그렇게 얼굴만 엉망으로 만든 거냐고 물어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다른 데는 숨길 수 있잖아. 본보기를 보여 줘야지.

자기 동생을 건드리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라는 뜻이겠지. 그 본보기의 효과가 꽤 훌륭했던지 나와 번즈 백작에 대한 불유쾌한 소문은 싹 사라졌다.

“유제니! 유제니!”

그때, 현관 쪽에서 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집사의 잔소리가 이어지는 걸 보니 줄리아가 들이닥친 모양이다.

나와 어머니의 시선이 부딪쳤다. 줄리아가 좀 발랄하긴 하지만 남의 집에서 소리를 치면서 뛰어올 정도는 아니다. 우리가 무슨 일인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줄리아가 응접실로 뛰어들며 말했다.

“어닝이 싸웠대요!”

뭐라고? 머릿속에 제일 먼저 결국 올리버가 어닝과 결투를 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줄리아에게 물었다.

“올리버는? 다쳤대?”

“올리버요?”

줄리아는 어머니의 질문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올리버가 어닝과 싸웠어?”

아무래도 올리버가 어닝과 결투를 한 게 아닌 모양인데? 나는 어머니를 한 번 쳐다보고 줄리아에게 물었다.

“어닝이 누구와 싸운 건데?”

“친구랑. 그거 때문에 난리가 났다던데요?”

친구?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를 쳐다봤다. 그 친구가 설마 올리버는 아니겠지?

“친구 누구?”

“그 왜, 맨날 어닝하고 같이 다니던 사람 말이에요. 이름이 뭐더라, 말, 멀….”

“마르셀 허드슨?”

혹시나 하고 던져 본 거였는데 줄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내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어어, 그 사람!”

마르셀과 어닝이 싸웠다고? 나는 어리둥절해서 입을 딱 벌렸고 어머니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친구랑 싸운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니?”

“다쳤대요.”

“응?”

다쳤다니? 싸우다가 다쳤다고?

싸웠으면 당연히 다치지 않나? 나는 올리버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올리버가 친구와 싸우면 최소한 얼굴 어디 한 군데는 멍이 들어 오곤 했다. 그리고 올리버의 얼굴에 멍이 들었다면 상대방은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진 거였고.

물론 어닝이 상대방을 다치게 할 정도로 싸웠다는 건 놀랍다. 그것도 최근 그의 행동을 떠올려 보면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의사가 오고 난리였나 봐요.”

심각했던 모양이다. 불현듯,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닝과 파혼했다. 우리는 이제 남남이고 렌시드 자작 부인의 행동으로 보건대, 우리 집과 렌시드 자작가의 관계도 박살이 났다.

어머니를 쳐다보자 어머니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다시 소파에 앉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앉았던 소파에 다시 앉으며 줄리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거니?”

아직 신문에도 안 난 이야기다. 소문이 빠른 어머니도 못 들었고.

줄리아는 내 질문에 씩 웃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거기 하녀가 내 친구랑 아는 사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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