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1/239)

76화. 15 – 10

피해는 클수록 좋다. 그날 저녁, 소니아는 렌시드 저택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감히 그녀의 아들을 거절한 유제니 비스컨과 비스컨 가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응?”

집 안으로 들어온 소니아는 그제야 아무도 자신을 마중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문을 열어 주던 집사는 물론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모자를 받아 들기 위해 달려오던 하녀도 없었다.

“아무도 없나?”

소니아는 그렇게 소리치며 이 층으로 향했다. 조금 늦기는 했다. 친하게 지내는 귀족 부인의 살롱에 가서 레이디 비스컨이 번즈 백작과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 게 분명하다고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집사는 남아서 그녀의 귀환을 기다렸어야 한다. 소니아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불도 안 켜 놓고, 뭘 하는 거야?”

그녀의 침실은 어두웠다. 자작 부인이 아직 침실에 들지 않았으니 침실의 불은 켜 놨어야 한다.

소니아는 집사고 하인들이고 하는 일도 없이 돈만 받아먹는다고 투덜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램프에 불을 붙이기 위해 테이블에 다가가다가 우뚝 멈췄다.

검고 커다란 그림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누, 누구….”

“소니아 렌시드 자작 부인.”

어둠 속에서 푸른 눈동자 두 개가 떠올랐다.

소니아의 눈에는 엘리엇의 눈동자와 얼굴 윤곽만 가까스로 보일 뿐이었지만 엘리엇에게는 그녀가 아주 잘 보였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대로 앉아 겁에 질린 소니아에게 말했다.

“렌시드 자작 부인. 기회를 주지.”

“뭐?”

소니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의 침실에 외간 남자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 기절할 노릇인데 그 남자가 느닷없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니.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에게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어차피 이 집안은 누더기야. 알잖아. 아들은 자식을 볼 수 있을지조차 모르지.”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비난에 소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그녀의 표정을 본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렌시드 자작가에 아무 감정도 없다. 굳이 고르자면 경멸에 가까운 거겠지.

어차피 어닝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 렌시드 자작 부인이라는 이름을 원하는 여자에게서 자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엘리엇은 어닝이 어떤 작자인지 알았고 이대로 간다면 그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엘리엇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안됐다고 해야 할지,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자작도 어닝이 자기 자식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겠어.”

말과 달리 엘리엇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게 소니아에게는 경멸로 들렸다.

그가 하는 말은 한 박자 늦게 소니아의 머릿속에 흡수됐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렌시드 자작이 여성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아주 오래전에 사교계에 잠깐 퍼졌던 소문이다. 덕분에 자작 부인은 어닝이 자작의 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어디나 그렇듯 소문은 사그라들기 마련이고, 지금 그 소문을 입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최근에 사교계에 들어온 번즈 백작은 그 소문을 몰라야 한다.

하지만 엘리엇은 알고 있었다. 렌시드 자작의 성향과 자작 부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렇다고 그녀에게 동정심 같은 걸 갖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엘리엇은 약간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어닝이나 렌시드 자작 부부나 모두 없애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건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어닝과 렌시드 자작가를 손대지 않을 셈이었다. 자작가에서 유제니를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유, 유제니 때문인가?”

번즈 백작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소니아는 그가 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던 소문을 떠올리며 물었다.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마음이 있는 듯하다는 소문은 들었다. 레이디 비스컨도 번즈 백작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소니아는 유제니가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니는 게 싫었다. 그녀는 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들의 비밀이 들켰을 때 이쪽에서도 휘두를 무기가 생기는 거니까.

번즈 백작과 레이디 비스컨의 관계를 의심한 건 소니아의 계획이었다. 어머니의 빛나는 계획을 들은 어닝은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맞아.”

엘리엇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를 건드리는 건 괜찮다. 하지만 유제니를 건드린다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역시 너희는….”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엘리엇은 재빨리 소니아의 말을 끊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내 일방적인 짝사랑이거든.”

“뭐?”

“그래서 렌시드 자작가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당신과 당신의 멍청한 아들이 가만히 있었으면 나한테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

유제니 성격상, 어닝이 얌전하고 조용하게 결혼했다면 그의 비밀을 알게 됐다고 해도 묻어 줬을 것이다. 그게 그녀를 속부터 문드러지게 만들겠지만, 자신만 포기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건 엘리엇이 가장 바라지 않는 결과였다. 그래서 그는 어닝을 자극했고 고맙게도 어닝과 렌시드 자작가는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줬다.

“고마움의 표시로 기회를 주지.”

아까도 그랬다. 기회를 주겠다고. 소니아는 당장 사람을 불러야 할지 번즈 백작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할지 갈등했다.

그녀가 계속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한 건 번즈 백작이 그녀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엇은 씩 웃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 당장 너와 네 멍청한 아들이 착각한 거라고 발표해 줬으면 해. 레이디 비스컨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그리고….”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소니아가 반응했다. 엘리엇은 재빨리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자신을 손짓으로 부리는 태도에 소니아가 당황하는 사이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비스컨 가와 엮이지 않는 거야.”

미친놈이다. 소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엘리엇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래야 네 아들이 무사할 테니까.”

어닝의 안전을 위협하는 말에 소니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감히 내 아들을 두고 협박해? 그녀는 렌시드 자작 부인이고 살면서 못 볼 꼴은 무수히 많이 봤다. 남편의 남자 애인에게 위협을 받은 적도 있다.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게 그런 협박이 먹힐 거라 생각했나?”

협박이 아니다.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큰 남자가 일어나자 소니아는 위협을 느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엘리엇은 소니아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렌시드 자작 부인을 가엽게 여겼고, 엘리엇은 그녀에게 아무 관심도 없지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의견을 존중했다.

“협박이라.”

엘리엇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소니아에게 내밀었다. 겉보기에는 보석 상자처럼 보인다. 이게 뭐냐고 표정으로 묻는 그녀에게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앞으로 비스컨 가에 접근할 때마다 하나씩 보내 주지. 잘 생각해 봐. 앞으로 몇 번의 기회가 있는지.”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소니아는 엘리엇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깜짝 놀라서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에 작은 상자를 쥐여 줬을 뿐이다.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엘리엇은 떠나 버렸다. 왔을 때처럼 그는 떠날 때도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뭐 저런 미친 사람이….”

소니아는 사라진 엘리엇의 뒤에 대고 욕을 내뱉었다. 그건 무서워서였다. 미친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고 그녀를 협박하려 했다.

그 공포심 때문에 소니아는 엘리엇이 주고 간 상자를 열 수가 없었다. 팔찌가 들어갈 만한 손바닥 만한 작은 보석 상자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팔찌를 줄 리가 없다.

사람을 불러 확인하게 시키고 싶은 마음과 아무에게도 번즈 백작에게 협박당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목했다. 결국, 소니아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남자의 신체 일부가 들어 있었다.

* * *

“아가씨,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지 안다. 미리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응접실로 향했다. 오늘 방문하기로 한 사람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매린 경이라고 높은 모자 클럽에 갔을 때 어닝과 질 낮은 농담을 하던 남자다.

그때의 일을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

응접실에 들어가 매린 경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라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매린 경의 얼굴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한쪽 눈은 보라색으로 멍이 들어 있었고 코는 전에 봤을 때보다 약간 삐딱했으며 입술을 두 배 정도로 부어 있었다.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건 딴 한 군데, 멀쩡한 오른쪽 눈뿐이었다. 나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려 애쓰는 매린 경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올리버 짓인가요?”

매린 경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다 멈췄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손을 들어 입술을 만지더니 말했다.

“이 정도면 대가를 과하게 치른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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