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15 – 9
어닝이 힐난했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데가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네.
커피 하우스는 어두컴컴하고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이거 그냥 남성 클럽이잖아? 안쪽에서 남자들이 나를 힐끔거리면서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여기서 여자를 본 게 퍽이나 놀라웠던 모양이다.
“어떻게 들어온, 아니, 제정신이냐고!”
“수치심을 안다면 조용히 해, 어닝 렌시드. 경고만 하고 갈 테니까.”
내 지적에 어닝이 금붕어처럼 뻐끔대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내 옆에 서 있는 직원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매우 사적이고 예민한 개인 이야기를 할 건데, 듣고 있을 건가요?”
“아, 아닙니다.”
다행히 직원은 내 경고에 허둥지둥 물러났다. 좋아. 나는 어닝에게 경고를 하러 온 거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창피를 주러 온 게 아니다.
우리는 일 년 정도의 기간 동안 약혼 관계였고, 친구로서는 더 길게 알고 지냈다. 그러니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싶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 유제니 비스컨. 여자가 감히 커피 하우스에 들어오다니.”
뭐라고, 이 자식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진정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어닝의 앞에 놓인 커피잔을 잡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커피 뒤집어쓰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어닝.”
그러자 어닝이 움찔했다. 그가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의자가 끌리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자작 부인이 오늘 집에 와서 우리 어머니를 협박하시더라.”
내가 커피잔을 집어 들까 봐 겁을 먹었던 어닝의 얼굴에 여유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까딱하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하는 거라면….”
“조용히 하라고 했어.”
나는 다시 말했고 어닝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아직 안 끝났잖니?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서로 못 볼 꼴 보기 전에 이쯤에서 끝내자고 하는 거야. 여기까지 와서 내가 너랑 결혼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 아냐.”
놀랍게도 어닝은 내 말에 입술을 씰룩거렸다. 설마?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내가 이 상황까지 와서 너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니?
“어닝, 파혼이 뭔지는 알지?”
내 질문에 어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더니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왜? 파혼하고 달려가면 번즈 백작이 받아 준대?”
어휴. 나를 화나게 하려는 게 너무 빤히 보여서 오히려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나랑 결혼하겠다는 남자는 많거든. 그중에서 고르면 되는데 뭐 하러?”
“거짓말하지 마!”
내 생각대로 어닝은 벌컥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컥 하고 테이블이 흔들리고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다시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귀는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게 보인다. 나는 어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앉아. 너도 우리가 왜 파혼했는지 사람들이 다 알게 하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우리가 왜 파혼했는지는 사람들 다 알아! 네가 번즈 백작과….”
“네 애인이 찾아왔더라.”
순식간에 어닝의 입이 닫혔다. 젠장.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습게도 나는 허드슨 경과 이야기를 하고도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애, 애인이라니?”
당황했는지 어닝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막더니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이쪽을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고 자리에 앉았다.
“거, 거짓말하지 마.”
“허드슨 경한테 다 들었어.”
이제 어닝의 얼굴색은 흰색이 아니라 파란색에 가까워졌다. 그는 가볍게 몸을 떨며 나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다니. 나는 내가 한때 결혼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이렇게 단순하다는 사실에 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 의외로 사람 보는 눈이 별로 안 좋구나.
커피를 주문할걸.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서 뭔가를 마시고 싶었다. 동시에, 여기서는 아무것도 입에 넣고 싶지 않기도 했다.
“허드슨 경한테 나 때문에 헤어져야겠다고 했다며. 너 정말 비열하다.”
나는 허드슨 경과 어닝이 그런 사이인 줄도 몰랐다. 그러니 내 핑계를 댄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내 지적에 어닝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몸을 낮췄다. 그리고 그제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잘못했다고 빌면 마르셀과 헤어지고 너와 결혼해 줄 수도 있어.”
뭐라는 거야. 결국, 나는 참다못한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너랑 결혼 안 한다니까?”
“왜? 마르셀이 내 연인이라?”
“당연한 거 아냐?”
내 대답에 어닝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우리 결혼은 집안끼리의 계약이고 난 여자한테는 관심 없으니 더 좋은 거 아니냐고.”
대체 뭘 먹고 이런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머릿속에 감히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를 협박하던 렌시드 자작 부인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렌시드 가에서 먹는 음식이 문제인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닝에게 말했다.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는 건 나한테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지.”
“허. 유제니, 설마 남편한테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아, 이건 좀 아팠다. 나는 어닝의 말에 상처받지 않은 척하려 했다. 하지만 상처받았다.
“어닝, 몇 년 안에 죽을 거니?”
“뭐?”
내 질문에 어닝은 마치 살해 위협이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나는 손을 저어 그런 뜻이 아니라는 표현을 해 주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야 어닝을 죽여 버리고 싶지.
“부부는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 난 나와 평생을 함께할 존재가 날 사랑하길 바라는 게 그렇게 촌스럽고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도 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를 좀 촌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하지만 난 아니다.
“너도 정부를 두면….”
“싫다고!”
결국, 나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난 그런 거 두기 싫어. 정부니 바람이니 불륜이니. 그런 거 싫다고.
나는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는 어닝에게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난 남편이 날 사랑했으면 좋겠어. 나도 남편을 사랑할 거고. 그래서 너랑 결혼 안 한다는 거야.”
어닝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금세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는 내게 몸을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사랑하는 사람과 절대 결혼 못 해. 그런 내 앞에서 이러는 거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
“지금 네가 불행하니까 나도 불행해야 한다는 거니?”
그래 놓고 내게 이기적이라고 말해? 내 지적에 어닝은 태도를 바꿔 말했다.
“생각해 봐. 나쁜 거래는 아니잖아. 나는 어디 가서 사생아를 만들어 오지도 않을 거고, 너는 우리 집안 돈으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돼. 우리 어머니처럼.”
이제 어닝은 나를 설득하려는 모양이다. 그게 통할 사람도 있겠지. 배우자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 돈과 자신의 안위만 보장해 준다면 밖에서 사생아를 만들어 와도 아무 상관 없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어닝과 내 사이의 문제는 내가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어닝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런 사람을 찾아, 어닝 렌시드. 난 그런 사람 아니니까.”
“유제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사람들한테 내가 여자한테 관심 없다고 말하고 다녀?”
그건 이해된다. 그렇게 말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그건 어닝의 문제다. 내 문제는 어닝이 나를 속이려 했다는 거고.
어닝이 가여워졌다. 나는 조금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감히 날 속여도 되는 건 아냐.”
“번즈 백작과 절대 결혼 못 하게 할 거야. 다른 어떤 남자와도. 그때 가서 후회해 봐.”
이를 악문 어닝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닝이 가엽다고 그에게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디 그래 봐, 어닝 렌시드. 네가 죽을 때까지 발시안 전체에서 너와 네 애인들에 대해 떠들게 만들어 줄 테니까.”
놀랍게도 어닝은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의 눈이 커지는 걸 보며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슬프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서로 좋게 헤어졌으면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닝에게 말했다.
“말 안 할 거야. 그래도 우린 친구였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이쯤에서 물러나. 네 어머니와 함께.”
어닝이 내 말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우리를 돌아보며 수군거리는 남자들을 한 번 쳐다보고 커피 하우스에서 나왔다. 직원이 내가 정말 나가는 게 맞는지 확인하러 쫓아 나왔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앤이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내 표정이 별로 안 좋았던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그러게 저도 데려가셨어야죠.”
앤의 가벼운 잔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어닝과의 대화로 무너졌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앤이 따라 들어오려고 했지만 말렸다. 커피 하우스는 여자의 출입을 반기지 않고 어닝과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듣길 바라지 않았거든.
“별일 없었어. 집에 가자.”
나는 고개를 들고 그렇게 말했다. 이걸로 끝났으면 좋겠다. 렌시드 가문은 유서 깊은 가문이고 얽힌 가문도 많다. 그건 비스컨 가문도 마찬가지고.
파혼은 서로의 자존심이 걸린 이야기지만 이걸로 두 가문이 싸우면 결국 사교계가 시끄러워진다. 거기서 상처 입는 건 나와 어닝,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일 테고.
피해는 적을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