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15 – 8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반사적으로 응접실 안으로 뛰어 들어갈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건 여전히 내 손을 엘리엇이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다. 나는 엘리엇의 손을 놓기 위해 내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니아, 내 딸은 어닝이 입에 담기도 추잡스러운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모른 척해 줬답니다. 렌시드 가의 사람들이 인두겁을 쓰고 있다면 감히 이 집에 올 생각도 못 했을 텐데요.”
나는 어머니의 말에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무엇을 더 놀라야 할까. 어닝이 돌아다닌 거리가 어딘지 어머니께서 아신다는 거? 아니면 렌시드 자작 부인에게 저렇게 거칠게 이야기하시는 거?
그때, 엘리엇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뭐?
눈 깜빡할 사이에 엘리엇은 나를 안아 들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뭐 한 거야?
“이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려는 데 그가 다시 손가락을 입에 댔다.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복도를 확인했다.
그제야 이쪽으로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헉, 큰일 날 뻔했다. 문틈 사이로 복도를 지나가는 렌시드 자작 부인이 보였다. 집사의 배웅도 받지 않고 가는 걸 보니 화가 난 모양이군.
혹시 자작 부인이 돌아봤다가 우리를 발견할지 몰라서 나는 숨도 멈춘 채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뭔가가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 보니 엘리엇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엘리엇은 종종 이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때가 있다. 어닝이나 내가 아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본 적 없는 표정이다.
다음 순간, 나는 내가 그의 가슴에 기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자 나는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심지어 그의 발 위에 올라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엘리엇이 신은 신발 위였지만.
“내 구두!”
아까 어머니와 렌시드 자작 부인의 대화를 몰래 들으러 가느라 구두를 벗고 걸었다. 구두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당황하는 내게 엘리엇이 다가왔다. 그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다시 나를 안아 들더니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거기 계십시오.”
뭘 먼저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을 이렇게 마음대로 옮기지 말라고 해야 할지, 내게 이래라저래라하지 말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지적하기도 전에 엘리엇은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 남자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고 그가 나간 문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닥을 내려다봤다.
내가 구두를 어디에 놨을까? 복도에서는 분명 들고 있었다. 문득, 그가 나를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는 게 생각났다.
그때 놀라서 떨어트린 게 분명하다. 막 찾으려고 일어나는데 엘리엇이 내 구두를 가지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엇은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서 있는 것을 보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 표정, 마음에 안 든다. 아주 잘생긴 표정이긴 한데 지금 이 상황에서 짓는 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제니.”
엘리엇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구두를 신겨 줄 것처럼 내 발을 잡았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거절했다.
“구두 정도는 스스로 신을 수 있어요.”
“압니다.”
거절을 거절할 줄은 몰랐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앉았고 내게 구두를 신겨 주는 엘리엇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꽤 따가웠을 텐데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니 지금 여기에 아무도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구두를 다 신겨 준 뒤 엘리엇이 물었다. 꼭 하인처럼 말한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다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무 문제 없다. 애초에 저 구두는 내가 전부터 신던 거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나는 일어나려다 엘리엇이 여전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멈췄다. 그리고 그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말했다.
“엘리엇, 도와준 건 고맙지만 다시는 날 짐짝처럼 옮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의견과 상관없이 내 몸이 옮겨진다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다. 물론 엘리엇에게는 그게 훨씬 쉬웠다는 건 이해한다.
짧은 시간에 내게 설명하고 식당으로 나와 함께 가는 것보다 나를 들어 옮기는 편이 더 빨랐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 급해서 그랬다는 건 이해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엘리엇은 웃고 있었다. 아주 활짝.
본가에는 커다란 개가 한 마리 있다. 정원사가 기르는 개인데 나를 아주 좋아한다. 아마도 내가 어머니를 설득해서 정원사가 기를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일 것이다.
색도 검고 크기도 거의 나만 해서 어머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 나는 정원사가 바쁠 때면 믹과 놀아 줬고 간식을 나눠 줬다.
그래서 나는 사교 시즌이 끝나고 본가로 돌아가는 게 기다려질 때가 있다. 믹은 내가 탄 마차가 보이면 나를 반기기 위해 뛰어오거든. 그리고 지금 엘리엇과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반겨 준다.
“왜요?”
문제는 엘리엇은 믹이 아니라는 거다. 아, 물론 개도 아니고. 검고 크다는 점에선 좀 비슷하겠지만.
그리고 믹은 나를 오래 못 봤다가 다시 봤을 때만 이런 표정을 짓는다. 나는 엘리엇이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몰라서 물었고 다음 순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경험상 믹은 이런 표정으로 달려들어서 내 얼굴을 엄청나게 핥아 댄다. 설마 엘리엇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요.”
다행히 엘리엇은 내게 달려들어서 핥아 대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분 좋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좋아서요.”
진짜 믹인 거 아냐? 나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믹이 사람으로 변신한 거라면 이렇게 젊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다음 순간, 엘리엇이 미소를 지우고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차가운 바닥에 서 있는 게 싫거든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사적으로 내 시선이 엘리엇의 구두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 들어왔을 때도 나는 그의 발 위에 올라가 있었다.
“오.”
어, 진짜 뭐라고 하지? 나는 생각도 못 한 엘리엇의 말에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다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말했다.
“다음부터는 짐짝처럼 느끼시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어, 그, 그래요.”
“그리고 차는 다음에 마시겠습니다.”
맙소사, 차!
나는 깜짝 놀라서 엘리엇의 어깨를 잡았다. 미안해라.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니 차 대접을 해야 했다. 하지만 렌시드 자작 부인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완전히 잊어버렸다.
엘리엇은 당황한 내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잡은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얹더니 말했다.
“아니면 제집 구경도 하실 겸 식사를 하러 오시는 것도 괜찮고요.”
“세상에, 미안해요. 그래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야겠다. 나는 집사와 함께 엘리엇을 배웅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내가 엘리엇과 함께 집에 돌아왔다는 걸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빅스, 마차 좀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어머니께는 제가 들어왔다는 거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어요.”
엘리엇이 떠나자마자 나는 집사에게 부탁했다. 그는 먼저 내 첫 번째 부탁에 집중해서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요.”
집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재빨리 덧붙였다.
“셜리를 데려갈게요.”
최근에 내가 팔을 다쳐서 돌아온 것 때문에 어머니와 빅스는 내가 혼자 시내로 나가는 걸 반대하고 있었다.
동반자를 데리고 다니는 건 미성년이거나 도움이 필요한 분들 정도다. 하지만 어머니와 빅스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면 동반자를 데리고 가는 게 좋겠지.
내 생각대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준비를 마친 앤이 나왔다.
“어디로 가시게요?”
“커피 하우스. 셜리랑 같이 가도 되는데.”
최근 앤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나와 함께 다니는 걸 꺼릴 것 같다. 그래서 셜리와 함께 가겠다고 한 거였는데.
나는 셜리가 바쁘냐고 물었고 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가씨를 돌보는 건 제 일이에요.”
“나랑 같이 나가서 안 좋은 일이 많았잖아.”
그래서 앤을 데리고 다니기 좀 미안하다. 죄책감 어린 내 말에 앤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전 아가씨가 어딜 가시든지 따라갈 거예요.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혼자 도망치지 않을 거고요.”
그제야 나는 전에 앤과 함께 납치당했을 때 그녀를 혼자 도피시켰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때의 내가 잘했다고 생각한다.
앤은 부수적인 피해자였고 내 곁에 없었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앤을 먼저 도피시킬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녕, 어닝.”
커피 하우스에 도착한 나는 어닝이 늘 앉는 자리로 걸어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 등장에 어닝이 화들짝 놀랐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쫓아온 직원에게 말했다.
“금방 나갈 거예요.”
애초에 그는 내 주문을 받으려고 쫓아온 게 아니었다. 커피 하우스는 남성들의 전유물이거든. 그러니 어닝도 여기서 날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거고.
“너, 너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