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68/239)

73화. 15 – 7

“여기 계셨군요.”

엘리엇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기사를 무시하고 내게 말했다. 설마 나를 찾았나? 그때, 기사가 엘리엇에게 호통쳤다.

“뭐 하는 겁니까! 왜 이분을 혼자 두는 거죠?”

어엇. 나는 갑작스러운 기사의 태도에 놀라 멈칫했다. 엘리엇은 그제야 기사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절 아십니까?”

기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게 그랬던 것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네. 아닌가? 나는 그녀가 나를 뭐라고 불렀는지 떠올렸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그 호칭이 실수라 해도 그녀는 내 성을 안다. 나를 안다는 뜻이다.

“유제니 비스컨이에요. 고귀한 레이디가 아니라 레이디 비스컨이죠.”

나는 기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재빨리 엘리엇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나와 기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엇의 표정 변화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기사는 부끄러워서인지 당황스러워서인지 얼굴이 붉어진 채 말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클레어 라넌입니다.”

라넌이면 남작가였나? 나는 그녀의 차림새를 다시 확인했다. 남작가의 딸이라면 라넌 영애라 불러야 할 것이다.

백작의 딸인 내 호칭이 레이디 비스컨인 것처럼 귀족의 딸은 부르는 호칭이 각각 정해져 있다.

공주와 공작의 딸에게는 고귀한 레이디를, 후작과 백작의 딸에게는 성 앞에 레이디를 붙인다. 자작과 남작의 딸에게는 성 뒤에 영애를 붙이고. 그 밖에는 모두 성 뒤에 양을 붙인다.

“만나서 반가워요, 라넌 영애.”

클레어의 얼굴에 실망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아니면 라넌 경이라 부르는 게 나을까요?”

그러자 클레어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라넌 경이 좋습니다.”

라넌 경보다는 라넌 영애가 더 높다. 기사보다 남작이 더 높으니까. 기본적으로 호칭은 가지고 있는 가장 높은 작위로 불러 준다.

예를 들면 올리버는 아직 아버지께 작위를 물려받지 않았으니 비스컨 경으로 불려야 하지만 아버지의 작위 중 하나인 비스컨 남작으로 불러 주는 것처럼.

하지만 예의범절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활하게 만들어 주는 거다. 상대방이 불리고 싶은 호칭으로 불러 주는 게 맞다.

“좋아요, 라넌 경.”

나는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 손을 잡자 불쑥 물었다.

“당신도 꿈을 꿨나요?”

분위기가 확 굳는 게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엘리엇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클레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클레어가 더듬거리며 말하는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가 클레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클레어는 재빨리 내 손을 놓더니 인사를 하고 떠나 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까워라. 나는 동료를 향해 달려가는 클레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다.

최근 꿈을 꿨다는 사람들이 꾼 꿈이 정말 같은 꿈인지 궁금했다. 내가 왕으로 나온다는 꿈. 말도 안 되는 꿈이지만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이 세 명이나 된다.

“가시죠. 댁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엘리엇에게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 남자는 정말로 표정으로 생각을 읽기가 힘들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가 잘 웃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왜 고귀한 레이디예요?”

나는 불쑥 물었다. 그게 궁금했다. 길더가 그랬다. 내가 왕이었다고. 그렇다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아니라 비스컨 전하가 되어야 한다.

엘리엇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날 고귀한 레이디라고 불렀잖아요.”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기억하고 계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어떻게 잊을까. 그렇게 충격적인 등장이었는데. 아마도 엘리엇이 왕궁에 나타난 장면은 내가 늙어서도 이야깃거리가 될 거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그렇게 불렀고요.”

내가 지적했다. 나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아니라 그냥 레이디 비스컨이라고. 엘리엇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말했다.

“몰랐으니까요.”

“그냥 호칭을 몰라서 그랬다는 거예요?”

“네.”

거짓말이다.

놀랍게도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다. 표정이나 태도에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그냥, 그냥 알았다.

하지만 거짓말이라는 증거가 없다.

“가실까요?”

다시 한번 엘리엇이 권했다. 자신의 마차로 데려다준다는 말에 불쑥 거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뒀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자. 나는 고맙다고 인사한 뒤 그와 함께 그의 마차를 향해 걸었다.

“아가씨.”

엘리엇의 마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집 안에서 집사가 뛰어나왔다. 응? 빅스가 저렇게 당황한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는 마차에서 막 내리려는 내게 재빨리 말했다.

“렌시드 자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어닝의 어머니가? 깜짝 놀라는 바람에 발을 헛디뎠다. 다행히 재빨리 엘리엇이 내 몸을 잡아 주었다.

“고, 고마워요.”

엘리엇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나를 마차 밖에 내려 주었다. 힘 좋네. 나는 내 발이 땅에 닿자마자 그가 내 몸에서 손을 떼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날 만나러 온 건가요?”

어닝과의 파혼 때문에 찾아온 게 분명하다. 이미 자작 부인은 어머니께 어제 거센 항의의 편지를 보냈다고 들었다. 무슨 내용인지 말씀해 주지 않으셨지만, 어머니의 표정으로 보건대, 상당히 거센 어조였을 것이다.

“네. 하지만 마님께서 이야기 중이십니다. 아가씨께서 들어오실 필요는 없다고 하셨고요.”

그러니 조용히 들어와서 조용히 이 층으로 올라가라는 말이리라.

하지만 걱정된다. 나는 신경이 쓰여서 신발을 벗고 살금살금 응접실로 향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파혼이면 배상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렌시드 자작 부인의 목소리가 복도까지 들린다. 복도에서 기웃거리던 하녀들이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흩어졌다. 아니, 나를 보고 놀란 게 아니라 엘리엇을 보고 놀란 건가?

그는 어느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따라오는 줄도 몰랐는데. 나는 엘리엇이 심지어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 남자, 어떻게 이렇게 아무 소리도 없이 걷는 거지?

나를 내려다본 엘리엇이 왜 그러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으, 그러고 보니 그만 가라는 말을 잊었다.

하긴, 원래라면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하려고 했지. 왕궁에서 집까지 데려다줬으니 그래야 한다.

나는 그만 가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엘리엇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자기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댁이 왜 그러는 거야? 좀 어이가 없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서 나는 몸을 돌렸다.

“소니아, 배상을 입에 올린다는 건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말인가요?”

배상이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자 기분이 씁쓸해졌다. 나와 어닝의 약혼이 집안끼리의 약속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배상이라니. 완전히 사업상의 이야기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것에 상처받을 겨를도 없이 엘리엇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렌시드 자작 부인의 이름이 소니아인가 보죠?”

엄마야.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 때문에 깜짝 놀랐다. 나는 흠칫 놀라 그에게서 떨어진 채 고개를 돌렸다.

“어, 네. 맞아요.”

소니아 렌시드 자작 부인. 그게 렌시드 자작 부인의 이름이다. 내 대답에 엘리엇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귓가에 들리던 엘리엇의 목소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

나는 손을 들어 귀를 만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와 렌시드 자작 부인의 대화에 관심을 돌렸다.

“어닝이 잘못한 게 뭔지 모르겠네요. 무릇 약혼자라면 상대방에게 정절을 바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요?”

맙소사.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렌시드 자작 부인은 내가 어닝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고 어머니께 항의하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바람피운 상대라고 지목받는 엘리엇이 내 뒤에 있다면 안 돌아보는 게 현명한 일일 테니까.

“맞아요, 소니아. 무릇 약혼자라면 상대방이 자신의 명예를 더럽힐 헛소문을 퍼트리지 않을 거라고 믿죠.”

이어진 어머니의 공격에 렌시드 자작 부인이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그녀가 다시 말했다.

“과연 사람들도 그게 헛소문이라고 생각할까요?”

“헛소문이죠. 유제니는 남의 눈에 부끄러울 짓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나를 향한 어머니의 믿음에 기분이 멍해졌다. 그 정도로 나를 믿고 계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말하면 내 아카데미 입학을 극구 반대하셔서 날 안 믿으시는 줄 알았다.

나는 감동받아서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엘리엇이 속삭였다.

“좋은 어머니시군요.”

그렇다. 나는 엘리엇을 돌아보고 미소 지었다.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따듯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엘리엇이 내 뒤에서 나를 감싸듯 서 있는 덕에 진짜로 따듯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응접실의 살짝 열린 문을 통해 안을 응시했다.

“이혼보다는 죽음이 낫다는 말이 있죠.”

렌시드 자작 부인의 말에 어머니가 대꾸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소니아. 우리는 이혼이 아니라 파혼을 한 거예요.”

렌시드 자작 부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에서 어느 쪽이 더 피해를 보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 거예요. 어닝은 아무 문제 없이 다른 여자를 찾겠지만 유제니는 다르죠.”

“협박하는 건가요?”

어머니의 말에 자작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일까.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는 건 보인다. 그리고 ‘달칵’ 하고 찻잔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딸이 제대로 된 혼처를 구하기 어려워질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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