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15 – 6
아무래도 올해 나한테 뭔가 안 좋은 게 낀 모양이다. 나는 미친 사람 같은 허드슨 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닝과 그를 갈라놓으려 한다고? 꼭 연인 같은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으려 한다는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렸다. 너네 둘이 사귀니?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허드슨 경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라 무서웠다.
“가, 갈라놓으려 했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허드슨 경이 펄펄 뛰며 소리쳤다.
“아닌 척하지 마! 여우 같은 년! 전부터 우리를 갈라놓으려 했잖아!”
“잠깐, 잠깐.”
나는 허드슨 경이 휘두르는 팔에 맞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다 벽에 막혀 멈췄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확인하지 않고는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될 것 같다.
“당신과 어닝이? 그러니까, 어….”
당황하는 내 태도에도 허드슨 경의 흥분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는 내게 더욱 바짝 다가오며 소리쳤다.
“그래! 사랑하는 사이야! 너만 없었으면….”
“정말로?”
진짜였어? 잠깐, 허드슨 경이 사실은 여자라거나, 어닝이 사실은 여자인 건 아니겠지?
나는 붕대를 감은 팔을 들어 허드슨 경을 막으려 했다. 이성이 있다면 상대방이 다친 걸 보고도 물러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허드슨 경은 이성을 잃은 모양이었고 그는 내 붕대를 감은 팔을 확 낚아챘다.
“악!”
반사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의사가 삼각건을 빼지 말라고 했는데 역시 일렀던 모양이다. 다행인 건 내 비명을 들은 허드슨 경이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는 점이고.
“나, 나는….”
정신을 차린 허드슨 경은 자신이 내 팔을 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 팔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고.
정말로 이성을 잃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놓아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할까요?”
안타깝게도 허드슨 경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당장 가서 취소해.”
허드슨 경은 내 팔을 잡은 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이 남자가 미쳤나. 나는 그가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가서 어닝에게 결혼하겠다고 해.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를 떠들고 다니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진짜였나 보다. 허드슨 경의 확인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세상에. 맙소사.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약혼 전에 그렇게 다정하고 신사 같았던 어닝이, 약혼 후에 갑자기 돌변한 이유가 이거 때문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가 나를 속였다는 거다. 그리고 우리 가족도.
그렇게 생각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나와 비스컨 가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해? 나는 허드슨 경을 향해 소리쳤다.
“이거 놔, 마르셀 허드슨!”
내 거친 행동에 허드슨 경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나는 허드슨 경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뒤로 물러났다.
“내가 당신에게 예의를 지킨 건, 당신이 내 약혼자의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렌시드 경은 더 이상 내 약혼자가 아니고, 둘이 작당해서 나와 우리 집안을 속이고 있었다면 더 이상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지.”
“뭐, 뭐?”
“건방진 것. 감히 내게 명령해? 마르셀 허드슨. 비스컨 가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뭘 믿고 이따위로 구는 거야? 내가 예의를 지켜 주니까 만만해 보이던?
나는 다시 허드슨 경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아까까지와 달리 그는 내게서 주춤거리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봐. 내 앞에서. 감히 네 연인이 나와 비스컨 가를 속이고 있었다고. 어서!”
내 비난에 허드슨 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내가 그와 어닝이 연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모, 몰랐다고?”
몰랐다. 세상에. 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피식 웃었다. 어닝이 마르셀과 유독 가깝긴 했다. 항상 둘이 놀았으니까. 하지만 남자들은 다 그러지 않은가.
가장 친한 친구와 뭐든 하려고 하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잖아.
“하지만, 하지만 어닝이….”
어디 계속 떠들어 보렴. 나는 가만히 허드슨 경이 말하는 것을 지켜봤다. 어디 어닝과 그의 가문이 얼마나 나와 우리 집안을 농락했는지 알아야겠다.
“그, 극장에서 나와 함께 있는 걸 당신이 보고 협박했다던데?”
이제 나를 칭하는 허드슨 경의 호칭은 너에서 당신이 되어 있었다. 정신이 좀 돌아온 모양이다.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난 렌시드 경을 협박한 적도 없고 두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뭐로 협박한다는 거지?”
“우, 우리가….”
허드슨 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극장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다. 극장의 박스석은 약간 뒤로 물러나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다. 거기서 애정 행각을 하는 연인이 종종 있는데 각도를 잘못 잡으면 그게 보이는 위치가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나는 허드슨 경의 고백을 비웃었다. 어닝의 거짓말을 믿었다는 건, 그들이 렌시드 가의 박스석에서 애정 행각을 벌인 적이 있다는 뜻이다.
문득, 엘리엇과 렌시드 가의 박스석에 갑작스럽게 방문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어닝과 그 친구는 이상할 정도로 허둥대고 있었지.
“내가 본 건 당신이 아니었는데.”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닝이 자기 친구를 소개해 주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나와 엘리엇을 빨리 내보내려고 했지.
“무슨 소리야?”
허드슨 경의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말해 줬다. 어닝의 자리에서 뭘 봤는지. 갈색 머리에 좀 허약하게 생긴 남자였다. 어닝보다 훨씬 어렸고.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웠지.
내 설명에 허드슨 경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허. 아는 사람인 모양이네.
“그, 그 자식이랑? 어닝, 이 자식!”
어닝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르셀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게 퍽 우스워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그러셨지. 바람을 한 번만 피우는 사람은 없다고.
어닝이 딱 그 꼴이었다. 그러네. 나는 그가 결혼하기 전에 본색을 드러낸 것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그와 결혼했다면 끔찍한 생활을 해야 했을 것이다.
“뭐, 뭐가 웃겨?”
분노로 붉어진 얼굴로 허드슨 경이 물었다. 나는 웃음을 뚝 그치고 그를 쳐다봤다.
“뭐가 웃기냐고? 남의 눈을 피해 약혼자가 있는 남자와 바람을 피운 주제에, 자기가 당하니까 화가 나나 보지?”
“네, 네가 뭘 안다고….”
“모르겠네. 난 너희처럼 뻔뻔한 철면피가 아니라서.”
“우, 우리는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우리 사이를 밝히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나를 속이려 한 사기꾼들인데.
나는 멀쩡한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대단한 사랑 하셨네. 그래 봤자 바람인 주제에.”
허드슨 경의 얼굴이 다시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며 소리쳤다.
“이, 이게!”
“거기, 뭡니까?”
그때, 허드슨 경의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 나는 그의 뒤로 보이는 여자가 기사 차림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사 중에 여자가 있었나? 없는 거로 아는데.
하지만 그녀는 기사 차림이었다. 상체를 보호하는 간단한 갑옷과 허리에 찬 검까지. 심지어 머리카락은 아주 짧게 자른 상태였다.
기사와 내 시선이 부딪쳤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또냐.
슬슬 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을 어떤 범주 안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여자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허드슨 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낮에 왕궁 안에서 여자를 때리려는 겁니까, 지금?”
“아, 아니….”
“이름이 뭡니까?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딱딱한 기사의 질문에 허드슨 경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야?”
기사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잡을까요?”
마치 내가 지시하기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에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냥 두세요.”
어차피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다. 내 말에 기사는 다시 한번 도망치는 허드슨 경을 돌아봤다. 저러다 넘어지면 우습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허드슨 경이 꽈당 넘어졌다.
“어머.”
나는 놀라서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었다. 좀 허둥지둥 도망치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넘어질 줄은 몰랐는데.
“괜찮습니까?”
기사가 물었다. 괜찮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어서 나를 꾸짖듯 물었다.
“왜 위험하게 혼자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뭐라는 거야. 나는 고맙다고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 허드슨 경과 싸운 것 때문에 여전히 내 호승심이 끓고 있었다.
“기사님 말씀대로, 여기는 대낮의 왕궁인데요. 위험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기가 위험하다면 왕궁의 기사는 물론 병사들까지 전부 다시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곳은 커런트는 물론 발시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어야 하니까.
내 반문에 기사의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그녀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저 뒤에서 눈에 확 띄는 남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