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66/239)

71화. 15 – 5

“그래?”

왕대비 전하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엘리엇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난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게 가장 좋을 듯한데.”

“누구에게 가장 좋은 겁니까?”

엘리엇의 질문에 왕대비 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번즈 백작에게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자네에게는 엄청난 재산이 있어.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하는 가문이 있지. 그리고 여기 레이디 비스컨에게는….”

좀 창피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 나는 어깨를 움츠리지 않기 위해 등을 세웠다. 왕대비 전하는 나를 쳐다봤다가 다시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유서 깊은 비스컨 백작가의 사람이지. 자네의 가문을 같이 일궈 줄 테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완벽하게 가지고 있어.”

그건 맞는 말이다. 나는 모르는 척 차를 마시며 왕대비 전하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는, 그러니까 나와 엘리엇은 겉으로 보기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재산이 있고 내게는 귀족으로서의 지식이 있으니까.

동시에 나는 왕대비 전하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나와 엘리엇의 결혼이 가장 좋다는 것 말이다.

“제 말은, 가문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왕대비 전하의 설명이 끝나자 엘리엇이 말했다. 응? 나는 차를 마시다 말고 그를 쳐다봤고 왕대비 전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문으로만 보면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가문도 결국은 사람으로 이뤄져 있죠.”

잠깐, 지금 엘리엇이 나랑 결혼하기 싫다고 말하는 건가? 나는 눈을 깜빡였고 왕대비 전하는 엘리엇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레이디 비스컨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엘리엇은 피식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허탈한, 씁쓸한 미소였다.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래도 찻잔 안으로 들여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돛단배입니다.”

뭐라고? 뜬금없는 엘리엇의 말에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우리는, 그러니까 나와 왕대비 전하는 멍하니 엘리엇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당신이 바람이라면, 저는 돛단배입니다.”

아는 시였다. 내가 좋아하는 시였다.

당신이 바람이라면, 저는 돛단배입니다. 세상 속에서 나는 당신이 이끄는 대로 나아갑니다.

내 말에 왕대비 전하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노의 시로군.”

엘리엇은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꼭,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다.

세상에. 나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져서 나는 시선을 피했다. 툭 떨어졌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왜 저렇게 잘생긴 거야?

“레이디 비스컨이 하자는 대로 따르겠다는 말이군?”

왕대비 전하는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으아아, 저 쳐다보지 마세요. 나는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싶은 심정을 억눌렀다. 그랬다가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일 것 같았다.

“전하, 저와 렌시드 경의 파혼이 확실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다행히 내 목소리는 그렇게 떨리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엘리엇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게다가 그는 저와 번즈 백작의 관계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렸고요. 지금 이 상황에서는 우리의 결혼이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닐 겁니다.”

어차피 지나가면 사람들은 잊어버린다고 하겠지만, 나와 엘리엇이 곧바로 약혼을 알리면 사람들은 어닝의 헛소리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거다.

그리고 그게 우리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겠지.

그건 싫다.

“흠.”

왕대비 전하는 나와 엘리엇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엘리엇에게 물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저는 돛단배입니다. 생각 같은 건 없죠.”

이유는 모르겠는데 좀 부끄러웠다. 얼굴이 뜨거워져서 나는 뺨에 손을 대려다가 멈췄다. 왕대비 전하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번즈 백작,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왕대비 전하의 말에 엘리엇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그녀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아서 먼저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하지만 당장은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왕대비 전하는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문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내가 너희 둘의 결혼을 명령해 주마.”

놀라울 정도로 다정한 제안이다. 나는 감동한 나머지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명령한다면, 나와 엘리엇의 결혼이 왕족의 명령이 된다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다.

심지어 렌시드 자작가에서도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겠지.

“괘, 괜찮습니다.”

나는 목이 메어서 더듬거리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왕대비 전하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알겠지만, 레이디 비스컨. 남자의 마음은 바람과 같아서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

알고 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대비 전하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이야 번즈 백작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지 알 수 없어. 그러니 지금 결혼을 결정하는 편이 나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번즈 백작도 렌시드 경처럼 변할 거라는 말이네요.”

작게 왕대비 전하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가만히 차 표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닝이 좋은 남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는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고 부족한 것을 보완해 가면서 살아갈 거라 생각했다.

그를 조용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정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약혼 기간에 그렇게 변했지. 몇 번이나 나를 비난했고 나와 내 집안을 모욕했다. 그 전까지의 다정함이 나와 결혼하기 위해 꾸민 행동이었다면, 그렇다면 엘리엇은 어떨까.

“내가 또 실수를 했군.”

왕대비 전하는 그렇게 말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아니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왕대비 전하가 전에 실수한 게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번즈 백작을 들여보내게.”

곧이어 왕대비 전하의 명령에 다시 문이 열리고 엘리엇이 들어왔다. 그녀는 엘리엇에게 침울하게 말했다.

“그래. 시기상조인 것 같으니 좀 시간을 두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엘리엇은 마치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아는 것처럼 대답했다. 왕대비 전하는 잠시 우리 둘을 쳐다보다가 내게 말했다.

“다음에 또 보지, 레이디 비스컨.”

이번에는 엘리엇과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괜히 이야기했나. 복도를 걸으며 나는 왕대비 전하께 어닝과의 일로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다는 걸 밝힌 걸 후회했다.

왕대비 전하가 그럴 리 없지만, 내가 이런 걸 걱정한다는 게 사교계에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너무 자존심이 상하거든.

나도 안다. 모든 사람이 어닝처럼 그렇지 않다는 걸.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아도 나랑 사는 사람은 한 명이잖아. 그 한 명이 어닝같이 굴면 그게 문제인 거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느라 나는 어느새 내가 건물에서 나와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궐 담을 따라 멍하니 걷고 있었다.

“이런.”

출입구로 나가서 마차를 불러야 했는데 생각에 잠겨서 여기까지 걸어와 버렸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내가 철의 궁에서 꽤 멀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냐면 본궁의 지붕이 보였을 정도다. 꽤 걸었나 본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기사들이 순찰을 하는 게 보인다. 잠깐, 저게 순찰인 건지, 근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상관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이대로 담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출입구가 나오겠지? 문제는 얼마나 걸어야 나오냐는 거다.

돌아가야 할지, 그대로 가야 할지 모르겠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였다. 누군가가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붙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당장 취소해.”

“뭐?”

누구야?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허드슨 경이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 사람 왜 이래? 나는 그에게서 떨어지며 물었다.

“뭘 취소해요?”

하지만 허드슨 경은 내가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내게 붙어 왔다. 진짜 왜 이러는 거야?

“나, 나랑, 나랑….”

나랑 뭐?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인상을 쓴 채 허드슨 경을 쳐다봤다. 그가 날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안다. 왜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친구의 부인을 싫어하는 남자들. 결혼하고 나서 남자들끼리 밤늦게까지 몰려다니면서 술 마시고 도박을 할 수 없으니 그게 친구의 부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하지만 나는 어닝과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솔직히 어닝은 나보다 허드슨 경과 더 자주, 오래 붙어 있었다. 굳이 날 싫어할 이유가 없단 말이지.

“어닝과 파혼한 것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나는 다시 허드슨 경을 떨쳐 내려 하며 말했다. 이전까지 날 싫어하는 건 이해가 안 되지만 지금부터 싫어하는 건 이해가 된다.

자기 친구를 클럽에서 공개적으로 차 버린 여자잖아. 내가 예쁠 리 없겠지.

“모르는 척하지 마! 어닝한테 다 들었어. 네가, 네가 우리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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