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65/239)

70화. 15 – 4

젠장. 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좀 참았어야 했다. 올리버는 좀 단순한 편이고 화가 나면 골치가 아프다. 아프다고 들었다.

왜 들었냐는 거라면 그는 내 앞에서는 폭력을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아주 엄격하게 나와 올리버를 가르치셨고, 올리버가 내 앞에서 욕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호되게 혼을 내셨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카데미에서 상급생과 싸우다가 유리창을 죄다 깼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걸 보상해 주느라 부모님이 좀 고생하셨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아직도 아카데미 안에서 회자된다고 줄리아에게 들었다.

“말하기 싫으면 상관없어.”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안 된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라버니의 손을 잡았다. 클럽 유리창을 깨면 보상하기 힘들단 말이다.

“우리 집 또 돈 들게 되는 거 알지?”

“뭐?”

“나 말이야. 파혼했으니까 또 무도회장을 전전해야 할 거 아냐.”

당연히 드레스를 또 사야 한다. 같은 옷을 연속으로 입고 오는 건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로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은 없다. 셔츠를 바꾸거나 드레스에 레이스를 다는 식으로 다른 옷인 척한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두 벌은 맞춰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돈은 로렌의 의상실을 지원하느라 대부분 나갔다.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올리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돈 들어갈 일 많으니까 오라버니까지 합세하지 말라는 말이야.”

“그걸 아는 사람이 우리한테 말도 없이 파혼을 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지만, 아니다.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럼 멍청하게 어닝이 상스러운 소문을 내고 다니는데 모르는 척해?”

내 명예와 우리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냥 있을 수는 없다. 올리버 역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우리 집이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냐.”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고 올리버도 나를 따라 킬킬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앉더니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네가 욱해서 파혼했을 것 같지는 않고. 후회 안 하는 거지?”

후회 안 하냐고? 이미 했다. 어젯밤에.

나는 쓰게 웃었다. 침대에 누워서 몇 번이나 곱씹었다. 내가 잘했는지. 솔직히 말하면 잘한 짓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올리버, 내가 다시 어제로 돌아간다면 그냥 참고 넘길까?”

내 질문에 올리버는 입을 다물었다. 고민 끝에 내가 한 생각은 그거였다. 만약 다시 어제로 돌아간다면, 내가 다른 선택을 할까?

어닝이 나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트리는 걸 알면서도, 그게 나와 우리 가문에 불명예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못 들은 척 그와의 결혼을 진행할까?

“네가 참고 넘겨도 내가 안 그러겠지.”

올리버의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어머니도 똑같이 말했다. 거기서 내가 참고 있어야 했냐고 반발하자 어머니가 집안 대 집안으로 파혼 선언을 하도록 기다렸어야 했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 집안은 어닝과의 파혼은 동의한다는 말이다.

“한동안 조용히 있어야겠네.”

올리버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누굴 말하는 거야? 나는 붕대를 감은 팔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난 어차피 나가지도 못해.”

“그 팔을 하고도 클럽에 가서 파혼해 놓고 말은 잘한다.”

파혼은 입으로 하는 거지 팔로 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이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냐며.”

“맞아.”

올리버의 손이 내 머리를 향했다. 어허. 나는 고개를 슬쩍 뺐다.

“나 열 살 아니거든?”

“열 살 때도 머리는 못 쓰다듬게 했으면서.”

“당연하지. 열 살짜리 머리가 얼마나 공들인 건 줄 알아?”

지금보다 더 공들였다. 우리는 웃으면서 응접실을 나섰다. 분명 줄리아는 복도에 서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거다.

“유제니.”

내 생각대로 줄리아는 복도에 서 있었다. 어라. 나와 올리버를 보자마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뭐야 이게? 나 대신 올리버가 편지를 받으며 물었다.

“어디서 온 거야?”

봉투에 안 적혀 있나 보다. 그가 편지 봉투 앞뒤를 살피는 게 보였다. 봉투를 봉한 밀랍 역시 아무 인장도 안 찍혀 있다.

그때, 줄리아가 말했다.

“왕궁에서 왔대요. 유제니한테.”

그러고 보니 나한테 내민 거긴 하다. 올리버는 심각한 표정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고 안의 내용을 읽더니 말없이 내게 내밀었다.

“어?”

철의 궁에서 보낸 편지였다. 왕대비 전하께서 나를 부르셨다.

“전하. 레이디 유제니 비스컨입니다.”

다음 날, 나는 올리버가 태워 준 마차를 타고 입궐했다. 물론 올리버는 안 들어왔다. 그냥 가는 길에 태워다 준 것뿐이다.

“팔은 어쩌다….”

들어가던 나를 쳐다본 왕대비 전하는 깜짝 놀라서 물어보다가 멈췄다. 그녀가 저렇게 놀라는 건 처음 봤다. 나는 멈칫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전하.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그놈이 그런 건 아니고?”

그놈? 설마 왕대비 전하께서 길더를 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금세 그녀가 말하는 그놈이 어닝이라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말했다.

“아뇨, 아닙니다, 전하. 렌시드 경은 이 일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래도 한때 약혼자라고 감싸 주는 건 아니겠지?”

내가 어닝을? 나는 왕대비 전하의 말도 안 되는 걱정에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게 어닝의 잘못이라면 나는 직접 커런트의 속삭임에 제보할 생각도 있다.

“아니면 됐고.”

다시 한번 아니라고 말하자 왕대비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우리 앞에는 다과가 놓여 있었다.

내가 다친 팔이 왼팔이라 다행이야. 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으니 말이야.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왕대비 전하가 내주시는 차는 아주 맛있다. 떫은맛이 전혀 없고 향이 은은하니 좋다. 거기에 어우러지는 디저트도 마찬가지고.

“번즈 백작과 결혼해.”

“콜록.”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왕대비 전하의 귀한 얼굴에 뿜어 버릴 뻔했다. 나는 가까스로 입 안에 든 차를 찻잔에 다시 뱉어 놓고 그녀를 쳐다봤다.

뭐, 뭐라고요?

왕대비 전하는 더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다가온 데번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의 차를 다시 가져다주게.”

“네, 전하.”

창피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데번 백작 부인이 차를 가져다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가 멀어진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전하, 지금 그 말씀을 번즈 백작도 아나요?”

“그에게 나쁠 게 없는 조건이잖나.”

“나쁠 게 없다니요?”

“번즈 백작가에 비스컨 백작가면 차고도 남지. 인물로만 봐도 자네가 훨씬 낫고.”

아니, 잠깐. 잠깐만요.

나는 느닷없이 훅 들어온 왕대비 전하의 칭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어느 모로 보나 엘리엇보다 낫다는 말인데.

“전하, 번즈 백작은 영웅인데요.”

그는 드래곤을 막았다. 그 공으로 백작이 된 자가 아니었던가. 나라의 영웅보다 내가 더 낫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왕대비 전하의 입장은 확고했다. 그녀는 차를 홀짝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영웅이라고 해 봤자 신흥 귀족이야. 자네가 훨씬 나아.”

그건 왕대비 전하가 왕족이기 때문이다. 왕족 입장에서는 평민 영웅보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사람이 더 믿을 수 있는 사람일 테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아직 번즈 백작은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알면? 감히 그가 자네를 거절하겠어?”

그야 거절 안 하겠지.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번즈 백작은 왕대비 전하의 지시를 흔쾌히 받아들일 거다.

하지만 내가 싫다. 내가 어닝에게 파혼하겠다고 한 게 고작해야 이틀 전이다. 저쪽은 아직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걸 어떻게 아냐면 오늘 아침에도 어닝이 쫓아왔기 때문이다. 집사가 정중히 돌려보냈다고 들었다. 그러자 우습게도 어닝은 선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꽃부터 손수건, 책, 장갑이나 머리핀 같은 것도 있었다. 내가 어닝과 알아 온 시간보다 어제오늘 받은 선물이 훨씬 많다.

“전하.”

나는 어떻게 말해야 왕대비 전하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데 기분 좋을 사람이 있을까.

“전 번즈 백작과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전하, 번즈 백작입니다.”

아, 진짜.

타이밍 한 번 끝내준다. 내가 말한 순간, 문이 열리면서 엘리엇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아, 젠장. 저 남자는 꼭 곁에 없었으면 할 때 나타난다.

“어때, 번즈 백작. 레이디 비스컨은 자네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데.”

“전하!”

뭐라고 하시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서 왕대비 전하를 불렀다. 이 남자가 들어올 줄 모르고 한 말이다. 아니, 물론 눈앞에서 못 할 말은 없는 데서도 안 하는 게 맞다.

“압니다.”

그때, 엘리엇이 말했다. 으악, 넌 또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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