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4/239)

69화. 15 – 3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파혼이라니. 그것도 레이디 비스컨과 렌시드 경의 파혼이라니.

다른 누구의 파혼 소식이 들린다 해도 이보다 더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어닝이 이상한 소리를 떠들고 다니기 전까지만 해도 레이디 비스컨과 렌시드 경의 사이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자, 잠깐, 유제니!”

어닝은 파혼 선언을 한 유제니가 몸을 돌리자 재빨리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자 유제니가 무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

그녀를 유제니라고 부를 수 있었던 건 어닝이 그녀의 친구이자 약혼자였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녀의 집안을 배신하고 모욕한 이상 그는 친구도 약혼자도 아니다.

감히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는 경고에 어닝은 어안이 벙벙해서 멈췄다.

“지, 진심이야?”

진짜로 파혼하겠다고? 어닝은 믿을 수 없어서 물었다. 그는 그저 결혼 전에 유제니를 조금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번즈 백작과 어울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버지가 백작이라고 결혼 뒤에도 콧대 높게 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유제니가 파혼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이미 유제니는 선 시장에 다시 나오기엔 나이가 많다. 심지어 파혼했으니 다음 신랑감은 어닝보다 조건이 나쁜 남자를 골라야 할 것이다.

다음 순간, 어닝의 머릿속에 번즈 백작이 떠올랐다. 그 번지르르한 야만인. 감히 그를 위협했던 남자.

“그놈이지?”

역시 유제니는 번즈 백작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수 있는 거겠지.

어닝의 머릿속에 그런 계산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유제니의 팔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그놈과 그렇고 그런 거지? 역시 날 배신한 거야!”

유제니의 시선이 어닝을 향했다. 그녀는 경고하듯 그녀의 팔을 움켜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어닝은 여전히 그녀를 꽉 잡고 있었다.

“역시라니? 확실한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내가 번즈 백작과 수상한 관계라고 떠들고 다닌 거잖아.”

“뭐?”

“렌시드 경,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약혼자의 명예를 더럽히고도 널 신사라고 할 수 있을까?”

완곡한 비난에 어닝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당황해서 유제니의 팔에 손을 떼고 물러났다.

그제야 자유의 몸이 된 유제니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방을 나서다가 지배인의 앞에 서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비스컨 가로 와요.”

그 뒤로 유제니가 여유 있게 클럽을 나서는 것을, 거기 있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가가자 허둥지둥 문을 열어 준 하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세상에.”

유제니가 떠나고, 하인이 문을 닫자마자 사람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반쯤은 놀랍고 반쯤은 두려움에 휩싸여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다들 렌시드 경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았다. 쉽게 말하면 기선 제압을 한 거다. 간혹 결혼 전에 배우자가 될 사람의 행실을 문제 삼아 기를 꺾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기껏 해 봐야 말투나 옷차림 정도지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는 소문을 내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제정신으로 저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

사람들은 허둥지둥 클럽에서 빠져나가는 어닝을 구경하며 수군거렸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듣기로는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관심이 있다더군.”

“약혼자를 뺏길까 봐 그런 짓을 한 건가?”

그렇다면 매우 멍청한 짓을 한 거다. 레이디 비스컨이 직접 클럽까지 와서 파혼 선언을 했으니까. 번즈 백작이 정말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면 지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잠깐,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관심이 있다고?”

“그럼 소문이 영 거짓말만은 아닌 거잖아?”

그렇긴 하다. 하지만 올리버와 함께 카드 게임을 하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지. 듣기로는 레이디 비스컨은 아무 관심 없었다니까.”

“그래?”

그건 좀 놀랍다. 정말 레이디 비스컨이 번즈 백작과 아무 사이도 아닌지 설왕설래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비스컨 남작은 아까워하더군. 렌시드 경보다는 번즈 백작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건 몰랐다. 하지만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집안으로 따지면 렌시드 자작가가 더 유서 깊긴 하지만 부유하기로는 번즈 백작이 더하니까.

비스컨 백작가는 유서 깊지만 그리 부유하지 못하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집안의 격은 조금 떨어지지만, 훨씬 부유한 번즈 백작이 나을 수도 있다.

“레이디 비스컨은 아무 관심이 없었다고? 정말로?”

굳이 같이 붙여 놓고 보지 않아도 남성적인 매력은 번즈 백작이 훨씬 낫다. 렌시드 경과 비교하는 게 번즈 백작에게 무례한 일이 될 정도로.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펄쩍 뛰었다더군. 동생이 융통성이 없다고 비스컨 남작이 꽤 투덜거렸지.”

그랬단 말이야? 사람들의 표정이 왜 그걸 이제 말하냐는 표정으로 변했다. 남자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난 렌시드 경이 그런 소릴 하고 다니는 줄 몰랐지!”

원래 소문은 소문의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에게 가장 늦게 들어가는 법이다.

* * *

“유제니! 유제니!”

왔다. 응접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올리버의 고함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내 맞은편에서 책장을 팔락이던 줄리아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 줄리아. 그거 내일까지 읽고 독후감 써야 한다며.”

나는 책갈피를 찾으며 줄리아에게 말했다. 여름 방학 숙제 중 하나다. 딸이 여름 방학 숙제를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된 에스컬레 경이 오늘 아침 직접 우리 집에 그녀를 데려와서 부탁했다.

나이가 몇 살인데 숙제를 미루는지, 원. 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줄리아에게 다시 한번 눈짓했다. 오늘 아침부터 붙잡고 있었는데 아직도 책 한 권을 못 읽다니. 줄리아의 교육 상태가 의심스러운데.

“유제니 비스컨!”

쿵쾅거리며 여기저기를 찾던 올리버의 발소리가 드디어 나와 줄리아가 앉아 있던 일 층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 말은, 올리버가 이 층 내 방까지 올라갔다는 뜻이다.

저렇게 시끄럽게 걸어 다니면서 어떻게 새벽에 어머니 몰래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너, 너….”

드디어 나를 발견한 올리버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 무슨 일인지 알겠다.

나는 올리버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가 왜 그러는지 깨닫고 책갈피를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책갈피가 어디 갔나 했더니 내 무릎 사이에 있었다.

“너 진짜야?”

“내가 진짜 유제니 비스컨이냐는 질문이라면 맞는데.”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올리버의 얼굴에 답답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지금 올리버가 내게 따지려는 일로 이미 어머니께 실컷 혼났거든. 아니나 다를까 올리버는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진짜야? 진짜로 어닝과 파혼했어?”

“파혼했어요?”

그제야 올리버는 응접실에 줄리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저런. 나는 주위를 좀 돌아보고 다니라는 표정을 지었고 올리버는 콧잔등을 찡그린 채 줄리아에게 말했다.

“줄리아.”

“자리 비켜 드릴게요.”

줄리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책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이번에는 창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줄리아.”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불렀다. 싸움 구경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리가 보여 줄 생각이 없다. 내 경고에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시도할 가치는 있었어요.”

우리 싸움을 보고 싶어 하는 만큼 손에 든 그 책도 보고 싶어 했으면 좋겠는데.

“어닝과 파혼했다던데. 그것도 클럽에서.”

올리버는 줄리아가 나가자마자 나를 몰아세우듯 말했다. 적어도 줄리아 덕분에 진정할 시간이 생겼는지 붉었던 올리버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누가 그래?”

나는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러자 올리버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테드가, 아니, 아니야?”

누군지 알겠다. 테드 라이언. 올리버의 친구인데 우리 집에도 종종 놀러 왔다. 그리고 올리버의 친구라는 점에서 알겠지만, 이 사람도 난봉꾼이다.

그 말은, 그 나이를 먹도록 아직도 결혼은커녕 약혼도 안 하고 술과 도박이나 즐기고 있다는 말이다.

“아니, 맞아.”

심드렁한 내 대답에 올리버는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 왜 이렇게 뻔뻔하게 구냐는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그런데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왜 물어봐?”

“오라버니 친구 중 누가 제일 입이 싼지 궁금해서.”

“유제니!”

웃긴 건 난봉꾼들 사이에도 의리라는 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자기 친구의 입이 싸다고 한 게 기분이 나빴는지 올리버가 버럭 화를 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오라버니는 큰 소리 칠 자격 없어. 오라버니 친구들도 그렇고.”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수준 높은 클럽에서 나와 번즈 백작 사이를 두고 상스러운 농담을 하고 있던데.”

내 말에 올리버의 얼굴이 확 굳었다. 몰랐나 보다.

당연하지. 올리버가 몰랐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그가 알고 있었다면 더 화가 났을 거다. 감히 그런 저열한 농담을 하게 두다니.

“뭐라고 했는데?”

낮은 목소리로 올리버가 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는 이를 악문 것 같은 말투로 다시 물었다.

“어떤 새끼야?”

“올….”

“어떤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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