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3/239)

68화. 15 – 2

“레이디 비스컨이 번즈 백작과?”

수도에 있는 몇 개의 남성 클럽은 대부분 부유한 사람들 대상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름대로의 조건을 걸어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올리버 비스컨과 어닝 렌시드, 엘리엇 번즈가 가입한 높은 모자 클럽은 일정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거나 자기 소유의 영지가 있는 귀족 남성만으로 그 조건을 제한하고 있었다.

애초에 클럽 이름인 높은 모자라는 것 자체가 상급 귀족들만 쓸 수 있는 모자를 말한다. 초기에는 상급 귀족만 가입할 수 있었으나 문턱이 약간 낮아진 것이다.

놀라운 소식을 들은 남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이 들은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물론 사실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어닝 렌시드, 그 본인이 이야기한 거니까.

“렌시드 경도 안됐군.”

“레이디 비스컨은 정숙한 줄 알았는데.”

“렌시드 경이 오죽하면 그랬겠나.”

설령 약혼자가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 해도 조용히 묻어 버리는 게 보통이다. 그런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는 건 어닝에게도 그리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수치심을 각오하고 떠들고 다니는 건, 확실하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었다.

“렌시드 경.”

그때, 클럽 안이 조용해졌다. 소문의 주인공이 등장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수군거리던 것을 멈추고 흩어졌다. 어닝의 곁으로 모여든 것은 평소 그와 게임을 하던 무리였다.

“여자들은 원래 새로운 것에 잘 넘어가지.”

“번즈 백작 같은 야만인에게 잠깐 넘어간 걸세.”

무리의 위로에 어닝은 씩 웃었다. 그는 감격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 않아도 사소한 것에 예민하게 굴길래 한 집안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지 걱정하던 터였거든.”

“사소한 것에 예민하게 굴다니, 평범한 귀족 아가씨잖나.”

누군가의 농담에 남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금세 어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꽃다발을 줘도 싫다니 별수 있나.”

“그럼 설마 파혼이라도 하게?”

어닝의 말에 무리 중 한 명이 기대를 품고 물었다. 부유하긴 하지만 집안이 한미한 남자다. 그런 그에게 어제까지의 레이디 비스컨은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였지만 흠집이 난 오늘의 레이디 비스컨은 다르다.

약간의 기대를 품은 친구를 보고 어닝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도 유제니가 특정 남자들에게 얼마나 선호도가 높은 신붓감인지 안다. 집안은 한미하지만 부유한 자들. 그런 남자들에게 부유하지 않지만 유서 깊은 비스컨 가의 아가씨라면 가장 꿈꾸는 신붓감일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흠집이 났다면 그들에게도 고분고분하게 시집와 줄 테니 더더욱.

“결혼을 약속했는데 어떻게 그러겠나. 잘 가르쳐야지.”

어닝이 파혼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모여든 남자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에이, 혹시나 했는데.

그들은 슬쩍 물러나며 말했다.

“그렇지. 잘 생각했네. 잘 가르치면 되겠지.”

“첫애는 잘 살펴보고.”

결국, 누군가가 선을 넘는 농담을 던졌다. 어닝은 물론 주변에 있던 남자들과 선 넘는 농담을 던진 남자까지 얼굴이 핼쑥해졌다.

자신들만의 이야기에 몰두해 있느라 어닝과 그 무리는 바로 곁까지 누군가가 다가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수준 높은 남성 클럽에서 할 만한 아주 수준 높은 이야기로군요.”

사람들은 빈정거리는 그 말의 내용보다 그 목소리가 여자의 목소리라는 사실에 더 놀라 물러났다. 물론 가장 놀란 건 어닝이었다. 그 목소리가 그가 아는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유, 유제니.”

“오랜만이야, 어닝.”

어닝의 생각보다 유제니는 그리 화가 나지 않아 보였다. 물론, 당연히 화가 난 거긴 하다. 하지만 어닝은 몰랐고 그래서 용감했다.

“여, 여긴 어떻게….”

유제니가 말한 대로 여기는 높은 모자 클럽이고 남성 전용 클럽이다. 즉, 여성들의 출입이 금지된다는 말이다.

대체 여기에 여자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직원을 부르러 간 사람도 있었다.

“나와 우리 집안을 모욕하고 모함하고 모독한 어닝 렌시드 경을 보러 왔지.”

유제니의 말에 어닝은 그녀가 치맛자락에 무기라도 숨겼을까 하는 두려움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이미 테이블까지 물러난 뒤였기 때문에 덜컥 하고 의자와 부딪쳤다.

그 모습을 유제니가 피식 웃자 어닝의 분노가 다시 끓어 올랐다. 그는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날 무시하고 번즈 백작과 단둘이 공연을 보러 간 건 너야.”

“오, 렌시드 경. 말은 바로 해야지.”

“레이디 비스컨.”

어닝의 곁에 있던 남자가 유제니를 말리려 했으나 그녀는 멀쩡한 오른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리고 여전히 어닝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여유롭게 말했다.

“번즈 백작은 날 초대한 게 아니라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초대했지. 나는 너와 공연을 보고 싶었는데 네가 친구와 단둘이 봐야겠으니 집 안에 혼자 남아 있으라고 종용했고.”

거기까지 말한 유제니의 시선이 방 안을 훑었다. 그녀는 여기에 그날 어닝과 함께 있던 남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어닝에게 물었다.

“네 친구를 찾으면 내가 너를 만나러 네 자리까지 갔다는 걸 증언해 줄 것 같은데. 어때? 네 친구도 너처럼 비열하니?”

그날 극장에서 같이 있던 친구를 찾겠다는 말에 어닝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눈에 직원과 함께 헐레벌떡 이쪽으로 다가오는 지배인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지배인에게 손을 들며 말했다.

“자네 뭐 하는 건가! 어떻게 여기에 여자가 들어올 수 있나!”

“죄, 죄송합니다.”

지배인은 땀을 닦으며 어닝과 방 안의 사람들에게 연신 사과를 했다. 그가 들여보낸 게 아니다. 유제니에게 속아 넘어갔을 뿐이다. 지배인은 억울한 마음에 변명했다.

“레이디 비스컨께서 도와달라고 하셔서 잠깐 사람을 부르러 갔는데….”

돌아와 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레이디 비스컨이 안으로 들어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유제니는 지배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해요. 내 약혼자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요. 이 일로 피해를 입게 된다면 나를 찾아와요.”

혹시라도 이 클럽에서 해고가 된다면 유제니가 책임지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주겠다는 말이다. 지배인은 괜찮다고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 일로 잘리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굳이 괜찮다는 말로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제니는 다시 어닝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닝, 내게 무례하고 폭력적으로 굴었을 때도 참았어. 심지어….”

“잠깐, 폭력적이라고?”

어닝이 폭력적이었다는 말에 다시 방 안의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닝은 깜짝 놀라 소리쳤고 유제니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집 응접실에서 내게 어떻게 굴었는지 지금 여기에 집사와 번즈 백작님을 불러올까?”

꽃 선물을 받은 유제니가 뭐 잘못한 거 있냐는 말에 갑자기 흥분해서 난리를 부렸을 때를 말하는 거다. 그러다 번즈 백작에게 한 대 맞고 나가떨어졌던 것을 떠올리자 어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유제니는 그가 꽃다발을 빼앗아 가면서 그녀의 손바닥이 긁힌 것을 이야기한 거지만 방 안의 사람들 눈에는 그녀의 팔에 감긴 붕대가 먼저 들어왔다.

“맙소사.”

사람들의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유제니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어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네가 친구와 매셔 거리와 린델 거리 사이로 가는 것도 모른 척해 줬지.”

이어진 유제니의 말에 다시 방 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모여 있던 모든 남자는, 심지어 지배인조차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닝은 유제니의 말에 하얗게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어닝을 거기서 봤다고 했을 때 올리버의 표정이 굳었다. 유제니는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거기가 어딘지 알아봤다.

“행동을 조심해야 할 건 너야, 어닝. 백주에 그런 곳을 다니면서 뻔뻔스러운 것도 정도껏이지.”

신랄한 유제니의 비난에 어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매셔 거리와 린델 거리. 높은 모자 클럽의 회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매춘 거리이기 때문이다.

“자, 잘못 본….”

어닝은 유제니가 잘못 본 거라고 말하려 했다. 그래야 한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가 그럴 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확인해 볼까? 네가 허드슨 경과 어느 가게로 들어갔는지?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네게 의리가 있을 것 같아?”

유제니의 정확한 지적에 어닝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말을 잃었다. 심지어 누구와 갔는지까지 지목하자 몇몇 남자들은 슬금슬금 방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증인이 필요하다. 유제니는 곧바로 도망치려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들의 발이 멈췄다.

“어닝 렌시드, 감히 나와 우리 집을 모욕하고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넘어갈 줄 알았다. 어닝의 얼굴이 이번에는 새빨갛게 변했다. 두 사람은 이미 약혼했다. 그는 대담하게 말했다.

“어, 어쩔 건데? 파혼이라도 하게?”

싸늘한 방 안에 다시 “헉”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파혼이라니. 사교계의 소문 거리가 될 거다. 어닝은 물론 방 안에 있던 사람 모두 유제니가 그것만은 선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유제니 비스컨은 융통성이 없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몇몇 사람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들은 융통성 없는 유제니 비스컨이 사교계의 수치가 되는 파혼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약혼자의 무례와 배신을 모른 척 넘기는 걸 융통성 없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맞아.”

다음 순간, 방 안의 정적을 깨고 유제니가 말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어닝을 향해 다시 말했다.

“어닝 렌시드 경. 파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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