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15 – 1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며칠 뒤, 내 초대를 받아 방문한 레이첼은 내게 원고를 돌려받으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태워 달라고 했지만 나는 태우지 않았다.
태우지 않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고민했는데, 지금은 잘한 일 같다. 나는 레이첼의 미소를 따라 빙그레 웃었다.
“팔은 좀 괜찮으세요?”
레이첼의 질문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 팔을 향했다. 그 말은 레이첼뿐 아니라 엘리엇도 같이 있다는 말이다.
부담스럽다. 나는 슬그머니 몸을 틀어 왼팔을 감추려 했지만 그건 그리 쉽지 않았다. 팔뚝에 붕대를 감고 삼각건으로 고정한 건 누가 봐도 환자로 보이니까.
“괜찮아요. 이젠 거의 아프지도 않아요.”
거짓말이지만 상관없다. 나는 주제를 바꾸기 위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번즈 백작이 이걸 책으로 내면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이 자리에 엘리엇이 있는 건 그런 이유다. 엘리엇이 레이첼에게 출판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길더는 사망했다. 천재 예술가가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길더의 모든 작품이 남의 것을 훔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였다.
사망한 길더의 집에서 레이첼의 원고 일부가 발견됐다고 들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무명의 음악가가 죽기 전에 남긴 악보가 길더가 발표한 음악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출판사요?”
레이첼의 물음에 엘리엇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괜찮은 인쇄소를 하나 가지고 있거든.”
내 증언을 들은 치안관은 길더의 음악과 유사한 악보를 남긴 음악가의 죽음도 수상하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리고 어제 커런트의 속삭임에는 어쩌면 연극도 다른 누군가의 작품일지 모르겠다는 기사가 실렸다.
덕분에 사교계는 길더의 도작으로 난리가 났다. 내가 그 일에 엮여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 아침에도 편지가 쏟아졌다. 그중에는 자기 집에 놀러 오라는 초대장도 다수 있었고.
안타깝게도 팔을 다쳐서 어딜 놀러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닐뿐더러 답장을 쓰기도 어렵다. 덕분에 내 답신은 끝도 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레이디 비스컨 덕분이에요.”
다시 한번 레이첼이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길더의 작품은 전부 중단됐다고 들었다. 음악은 물론 연극까지. 덕분에 레이첼의 원고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요. 길더의 집에서 저그만 양의 원고가 발견된 덕이죠.”
그것까지 신문에 실렸다. 덕분에 길더가 레이첼의 작품을 훔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이첼은 이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금세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니에요. 레이디 비스컨이 아니었으면 그것도 밝혀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길더가 절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도요.”
맞다. 적어도 레이첼이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는 누명에서 벗어난 건 내 덕이다. 내가 증언했거든. 길더가 레이첼을 죽이려 했다고 말이지.
내가 사는 집이야 우리 집이니 나나 올리버가 화재를 일으켰다고 해도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다. 인명 피해만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올리버는 어릴 때 집에 불을 낼 뻔한 적이 있다. 마구간 지기의 아들과 나뭇잎을 모아서 뭘 구워 먹는다고 했는데.
하지만 레이첼은 공동 주택이고 자기 집도 아니다. 그런 건물에 화재를 일으킨다면 최소한 몇 달은 감옥살이를 해야 했을 거라고 치안관이 말했다.
그건 정말 다행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까?”
레이첼이 떠난 뒤, 엘리엇이 물었다. 나는 자세를 고치려다 포기하고 말했다.
“내 이름을 레이디 괜찮습니까로 바꿔야겠어요.”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들어 보니 엘리엇이 내 옆에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데 그가 내 팔을 대고 있던 쿠션을 빼앗았다. 그리고 내 오른손을 잡고 내가 자세를 고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고, 고마워요.”
나는 엘리엇이 꼼꼼하게 쿠션을 내 왼팔 아래에 대 주는 것을 보며 인사했다.
우리 집 사람들보다 더 꼼꼼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집 사람들보다 더 좋은 점은 잔소리를 한마디도 안 한다는 거고.
엘리엇은 내가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와주더니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 옆에 앉거나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담백하네.
그건 그가 내게 고백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 놀라운 일이다. 어닝과 약혼하기 전, 몇 명의 구혼자가 있었는데 그들 전부 차이만 있을 뿐 부담스럽게 굴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내 옆자리에 앉으려고 다른 구혼자를 밀어 버린 사람도 있었고 나와 산책을 하면서 끈덕지게 내 손을 잡으려 한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닝과의 약혼을 결정한 데는 그도 엘리엇처럼 행동이 담백했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나요?”
저도 모르게 질문이 흘러나왔다. 나는 말을 내뱉은 다음에야 얼마나 멍청한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다. 적어도 나는 엘리엇을 만난 적이 없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만났다면 잊어버렸을 리 없다.
하지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던 엘리엇의 말도. 내가 엘리엇을 일부러 곁에 둔 거라던 길더의 말도.
“내 말은….”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건지 궁금했다.
“당신은 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잖아요.”
우리가 만난 건 고작해야 몇 달 전이다. 불타는 사랑에 빠진 연인은 한 시즌 만에 결혼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불타는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고 한 시즌이 채 지나지도 않았다.
심지어 나는 약혼 중이다.
“글쎄요.”
엘리엇은 자리에 앉은 채 다리를 꼬았다. 그의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 위로 우아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바짓단이 올라가면서 그의 발목이 살짝 드러났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압니다.”
어떤 사람인데? 그렇게 물어보려는데 어디선가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돌아오셨나? 나는 어딘지 모르게 서두르는 듯한 어머니의 구둣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열린 문틈으로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번즈 백작.”
“비스컨 백작 부인.”
어머니는 노크도 없이 문을 활짝 열더니 엘리엇에게 인사를 건넸다. 꽤 드문 일이다. 손님이 있는데 불쑥 들이닥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예의를 중시하는 어머니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비틀거렸다. 왼팔을 쓸 수 없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훨씬 불편하다.
그때, 엘리엇이 재빨리 나를 부축해 주었다.
“고마….”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네.”
엘리엇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어머니가 다가와서 끼어들었다. 그녀는 엘리엇의 손에서 내 팔을 빼앗더니 엘리엇을 내게서 밀어 내려 했다.
물론 밀린 건 어머니와 나였지만.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무례한 태도에 놀라 그녀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먼저 순순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오래 있었군요.”
그의 예의 바른 태도에 어머니도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나와 엘리엇 사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번즈 백작, 자네 잘못이 아니네. 아니, 자네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어머니는 내 잘못도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엘리엇에게 말했다.
“자네와 내 딸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렌시드 경이 불평하고 있다더군.”
뭐라고? 나는 깜짝 놀라서 움직이려다가 비틀거렸다. 왼팔을 못 움직이니까 균형을 잡기가 힘들다. 다행히 엘리엇이 재빨리 내 등에 손을 대고 나를 부축해 주었다.
“어닝이 불평을 한다고요?”
그 사람이 무슨 불평을 한다는 거야? 화가 나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어머니는 나를 돌아보더니 엘리엇에게 말했다.
“자네를 비난하는 건 아니네. 그러고 싶지만, 내 딸의 잘못도 있으니까.”
“레이디 비스컨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엇이 재빨리 말했다. 아니, 그건 내가 할 소린데.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어머니께 말을 이었다.
“렌시드 경이 뭐라고 하건, 전부 헛소문이라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진짜? 나는 당당한 엘리엇의 말에 놀라 그를 쳐다봤다. 입증할 수 있어? 안 한 걸 안 했다고 증명하기란 어렵다.
어머니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엘리엇에게 말했다.
“하지만 명예는 떨어지겠지. 내 딸이 약혼자를 두고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만으로 말일세.”
“감히 어닝이 그랬다고요?”
내가 엘리엇과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단 말이야? 그제야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미쳤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이디 비스컨의 명예는 털끝 하나 손상되지 않을 겁니다.”
단호한 엘리엇의 말에 어머니는 물론 나도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지금 어머니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어닝이 감히 날 모함했다니까?
결국, 어머니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엘리엇에게 말했다.
“번즈 백작, 설령 자네가 어닝과 결투해 그를 죽이고 유제니와 결혼한다 해도 이 애가 뒤집어쓴 소문은 여전할걸세.”
“어머니!”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닝과 결투를 한다니. 그것 또한 사교계의 가십이 될 거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엘리엇과 결혼하고 싶지도 않고.
“제가 알아서….”
엘리엇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만 돌아가 주게. 이건 우리 집안일이니까.”
엘리엇은 어머니의 단호한 거부에 잠시 나를 쳐다봤다. 이걸 과연 우리 집안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잠깐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여기에는 엘리엇도 얽혀 있다. 어닝은 결국 번즈 백작이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유혹했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물론, 이런 가십은 남자에게 좀 더 우호적이긴 하다. 내가 아는 한, 기혼 남자와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난 미혼 여자는 수녀원으로 쫓겨나거나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남자의 후처로 들어가지만 반대의 경우는 큰 피해 없이 결혼하곤 했다.
나는 곧바로 이 층 내 방으로 올라갔다. 왜 나한테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신을 원망하면서 울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어닝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