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1/239)

66화. 14 – 6

진짜냐고 묻고 싶지만 그건 너무 무례해 보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숨겨 뒀던 작은 조각상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것도 여차하면 길더에게 집어 던질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집에 이런 작은 조각 같은 게 많아서 다행이었다. 누군가가 공들여 만든 작품을 내 손으로 부순다 생각하니 죄책감이 차오르지만, 내 목숨이 더 소중했다.

엘리엇은 바닥에 떨어지는 조각상을 보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것보다는 찻잔이 낫지 않았을까요?”

“그럴 줄 알았는데 안 깨지더라고요.”

처음에 찻잔을 던진 건, 그게 길더의 얼굴에 부딪혀 깨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찻잔은 깨지지 않았고 내가 두 번째로 선택한 건 작은 조각상이었다.

기억해 놔야지. 의외로 찻잔은 사람의 얼굴에선 깨지지 않는다고.

“괜찮습니까?”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엘리엇이 물었다. 왼팔의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젠장. 어머니께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어머니와 올리버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물었다.

“한 소리 안 할 거예요?”

“한 소리요?”

“위험한 데 다니지 말라거나, 그런 거요.”

평소라면 가족도 아닌 사람이 그런 소릴 할 자격은 없다고 하겠지만 엘리엇은 몇 번이나 날 도와줬으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는 씩 웃으며 물었다.

“위험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전혀 생각도 안 했다. 그냥 천재를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혹시 영감을 받은 게 뭔지 묻고 싶었다. 같은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면 레이첼의 원고와 길더의 소설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은 이유가 설명될 수도 있으니까.

“아뇨.”

“그렇다면 당신은 할 일을 한 거죠.”

어머니와 올리버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는 왼팔의 통증을 무시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조심하라거나….”

“유제니.”

나는 아주 순순히 잔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잔소리해도 된다는 내게 조금 전까지의 미소를 지우고 확고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마음껏 하길 바랍니다. 위험하다거나 남의 눈이 신경 쓰인다는 그런 시답잖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요.”

말도 안 된다. 위험하다는 건 무시할 수 있지만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 나는 귀족이니까.

그래도 엘리엇의 마음은 고마웠다. 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팔이 너무 아팠다.

“유제니?”

엘리엇은 내가 걱정된다는 듯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에게 왼팔이 닿을까 봐 무서워서 몸을 틀었다. 그것만으로도 고통이 몰려왔다.

내 표정을 본 엘리엇의 표정이 확 굳었다.

“댁까지 모시겠습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팔을 뻗었다. 괜찮다. 마차가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그가 나를 안아 들었다.

맙소사. 엘리엇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안아 들었고 늘어진 내 팔을 내 몸 위로 올리는 건 정말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걱정은 내 몸이 아니었다.

“저 사람을 누군가가 감시해야 해요.”

기절했다고 해도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거다. 그리고 내가 도망쳤다는 걸 알면 자신도 도망치려 하겠지.

치안관을 불러야 한다. 그들이 와서 길더를 잡아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엘리엇은 쓰러진 길더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성큼성큼 집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 * *

어둠 속에서 불이 하나 나타났다. 하지만 불을 든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길더는 묶인 채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에게는 돈이 많으니까. 돈뿐만 아니다. 어떤 예술품의 값이 오를지도 알려 줄 수 있다. 원한다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예술가를 소개해 줄 수도 있다.

“돈은 얼마든지 주지!”

길더는 사내가 자신의 재갈을 잡아당기자 재빨리 소리쳤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의 앞에 선 사내가 누군지 알아차리고 입을 딱 벌렸다.

“버, 번즈 장군.”

엘리엇은 램프를 든 채 길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램프의 빛이 일렁거리면서 마치 조각상처럼 보였다.

“소, 속고 있는 겁니다.”

길더의 입에서 제일 먼저 엘리엇이 속고 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엘리엇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길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그 여자에게 속고 있는 거예요! 제, 제 말 좀 들어 보십쇼. 제가 얼마 전에 꿈을 꿨는데 말입니다.”

“용의 침략을 받아 이 나라가 불바다가 되는 꿈이겠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엘리엇이 말했다. 뭐가 그리 좋은 일이라고 하나같이 떠드는지 모르겠다.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 용의 침략을 받아 발시안은 불바다가 됐고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왕족이 전부 사망했다. 그 과정에서 죄 없는 발시안 사람들이 사망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아, 알고….”

알고 있었냐는 길더의 말에 엘리엇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돌아온 게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나?”

그랬다. 어쩌면 그 마녀도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가 레이첼 저그만을 죽이려 할 때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에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번즈 장군을 이용해서 저그만을 보호했다.

“그, 그럼 당신이….”

꿈을 꾼 건 마녀 유제니가 아니라 번즈 장군이라는 사실에 길더는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 그렇다면 알고 있잖습니까?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짓을 했는데?”

“예술가를 핍박했죠!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하고 공연을 금지했잖습니까!”

엘리엇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이런 멍청한 자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멍청한 놈들과 말을 섞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멍청한 놈들이 헛소리를 하고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림에 금과 보석을 처바르는 걸 금지했지.”

나라는 전란으로 난리인데 부유한 자들은 그림에 금과 보석을 발라 댔다. 그리고 그걸 수출이라는 명목으로 외국으로 빼돌려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데 이용했다.

공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부유층들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공연을 즐겼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금지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냥도 금지했고 물놀이도 금지했다.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연회 역시 금했다. 백성들이 하루에 빵 한 조각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귀족들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차렸다가 버렸다.

이러다간 옷도 제한하겠다는 빈정거림까지 들려왔지만, 유제니는 꿋꿋했다. 그녀는 그렇게 빈정거린 자에게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쳤고 더 이상 그녀의 앞에서 빈정거린 자는 없었다.

“예, 예술을 제한하면 안 됩니다!”

길더가 소리쳤지만 엘리엇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예술에 관심이 없다. 유제니의 곁에 있기 위해 소양을 갖추긴 했지만 어떤 음악도, 그림도 그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 쳐도 그런 말을 길더가 하는 건 우습다. 엘리엇은 길더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제한하지 않는다는 게 남의 작품을 훔치는 것까지 포함되나 보지?”

그의 말에 길더의 표정이 굳었다. 소설뿐만이 아니다. 그가 발표한 음악도, 연극도. 모두 그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이군. 엘리엇은 길더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소설을 훔친 것을 보고 그가 발표한 음악이나 연극 역시 그렇지 않을까 했다.

길더는 그저, 자신이 살고 돌아온 미래에서 인기를 끌었던 음악과 연극을 훔쳤던 것뿐이지 천재 따위가 아니었다.

“후, 훔친 게 아니죠.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이잖습니까.”

유제니가 들었다면 그럼 레이첼의 원고는 뭐냐고 되물었을 말이지만 엘리엇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건 그래.”

어차피 그에게 예술은 알 바 아니다. 게다가 길더가 훔친 음악과 연극 역시 레이첼의 원고처럼 완성된 게 아니다. 완성된다 해도 길더가 발표한 것만큼이나 인기를 얻을지도 알 수 없다.

그 음악과 연극은 드래곤의 분노를 사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황폐한 발시안에서 태어난 예술이다. 그 세상에서는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드래곤의 분노를 막은 지금의 발시안에서도 인기를 얻을지, 아니 어쩌면 아예 같은 예술이 태어날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그럼 저는 잘못이 없는 거지요?”

엘리엇이 길더의 말에 순순히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길더는 그가 자신을 풀어 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으며 물었다.

하지만 애초에 엘리엇은 그가 잘못을 해서 납치한 게 아니었다. 그는 잠시 길더를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우선 혓바닥부터 자르고 싶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부러트리는 거다.

유제니를 다치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엘리엇은 길더의 피부를 산 채로 벗겨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는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 살려 주시면 가진 재산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길더는 엘리엇이 고민하는 것 같아 보이자 애원하기 시작했다. 돈이야 살아 있으면 다시 모을 수 있다. 그는 이미 천재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난 돈은 별 관심 없어. 예술도 내 알 바 아니고.”

남의 인생도, 나라의 안위도 그와 상관없는 일이다. 엘리엇 번즈라는 사람은 명예도 부도 관심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 그럼 왜….”

길더는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를 왜 납치했단 말인가. 원하는 게 돈도 아니고, 그가 남의 작품을 훔쳤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원한이라고 하기엔 길더와 엘리엇은 만난 적도 없다. 길더가 일방적으로 번즈 장군과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이니까.

엘리엇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여자 주인공인 쪽이 더 마음에 드신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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