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0/239)

65화. 14 – 5

놀랍게도 나는 길더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했다. 내가 레이첼과 함께 있는 걸 봤다는 말이다. 내가 그녀의 임시 거처에서 나올 때 길 건너편 마차에서 나를 지켜보던 남자가 떠올랐다.

시야 한쪽 끝에 줄리아가 내게 뭔가 손짓하는 게 보였지만 나는 아무 티도 내지 않았다. 대신 계속 길더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퍽!

길더가 휘두른 조각상이 내가 있던 테이블에 부딪혔다. 엄마야. 나는 조각상이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저거 비쌀 것 같은데.

하지만 부서질 것 같았다. 저렇게 가늘고 긴 건 잘 부서진다.

“거짓말 마! 그년 원고를 봤잖아!”

역시 길더가 말하는 사람은 레이첼이 맞았다. 내가 레이첼의 원고를 가지고 나오는 모습까지 봤던 거다.

문득, 레이첼의 집에서 난 화재가 떠올랐다. 책상 쪽에 집중돼 있었다. 레이첼이 원고는 그녀가 침대 밑에 숨겨 둔 덕에 무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이라면 원고는 책상 서랍에 넣어 두겠지.

“당신이군.”

나는 소파 뒤로 돌아가서 소파 등받이를 잡으며 말했다.

“저그만 양의 집에 불을 낸 사람 말이야. 그 원고를 태우려고 한 거야.”

“원고만일까.”

길더의 얼굴에 분통 터진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길이가 절반으로 줄어든 조각상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난로 옆에 있는 부지깽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년 목숨도 끊어 놨어야 했는데!”

이해가 안 된다. 길더가 레이첼의 원고를 베낀 거라면, 왜 그녀의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쓸 수 있었지?

나는 줄리아가 내 시야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했다. 부디 길더의 눈에 띄지 않고 도망쳤기를 빈다.

“원고를 훔친 거로도 부족해? 왜 저그만 양의 목숨까지 노리는 건데?”

“왜라니.”

길더는 우습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는 부지깽이를 단단히 쥐며 말했다.

“문제가 될 소지는 싹부터 잘라야지. 네가 잘하던 짓 아냐?”

내가? 내가 뭘 잘했다는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에 길더가 말했다.

“발시안의 마녀는 연기도 잘하는군.”

“발시안의 마녀?”

이 나라의 이름이 발시안이긴 하다. 그리고 발시안에도 아주 옛날에는 마녀가 있었다. 하지만 발시안의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마녀는 없다.

무슨 소리냐는 내 태도에 길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다 알고 온 것 아냐? 너도 예지몽을 꿨으니 그자를 곁에 둔 거겠지.”

모르겠다. 이 미친놈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하지만 나를 마녀라고 부른 사람은 이 미친놈이 세 번째다. 나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자?”

어렴풋이 길더가 말하는 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번즈 백작 말이야?”

길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내게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너도 예지몽을 꾼 게 아니야?”

예지몽이라니. 문득 로렌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신의 인생을 꿈으로 꿨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나에 대한 것도 봤다고.

아니, 들었다고 했나?

나는 길더가 부지깽이를 쥔 손을 천천히 내리는 것을 보며 말했다.

“내가 왕이 되는 꿈 말이야?”

다시 부지깽이가 올라갔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거봐. 너도 예지몽을 꾼 거지. 아니면, 네가 날 돌려보냈던가.”

내가? 돌려보내?

시야 끝에 줄리아가 문 쪽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아직이다. 나는 길더의 시선을 내게 붙잡아 놓기 위해 말했다.

“내게 그런 힘이 없다는 걸 알 텐데.”

“모르지!”

길더는 부지깽이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소파를 향해 휘두르며 소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부지깽이에 맞은 소파의 천이 터져 나갔다.

그는 내게 부지깽이를 겨누며 말을 이었다.

“발시안의 마녀에게는 기묘한 힘이 있다던데! 번즈 장군을 꾀어낸 힘 말이야!”

번즈 장군?

이상한 호칭에 의문을 품는 것과 동시에 ‘탁’ 하고 문이 닫혔다. 그제야 길더는 줄리아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는지 뒤로 몸을 돌렸다.

“젠장!”

그가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나는 그에게 미리 챙겨 둔 찻잔을 집어 던졌다.

‘퍽’ 하고 길더의 머리에 부딪힌 찻잔은 안타깝게도 깨지지 않았다. 젠장, 주제에 튼튼한 걸 쓰잖아?

“발시안의 마녀를 죽이는 것도 괜찮지.”

내 도발에 고개를 돌린 길더가 그렇게 말하며 부지깽이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이미 나는 안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줄리아가 나갔으면 됐다. 그녀가 사람을 불러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내가 할 일은, 길더가 줄리아를 쫓아가지 못하도록 막고 그에게 죽지 않는 것뿐이다.

“날 죽이면 비스컨 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걸!”

나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던 조각상을 들어 길더를 향해 집어 던졌다.

쨍그랑!

이번에는 좀 약한 거였는지 조각상은 길더의 발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좀 작은 걸 던졌어야 했나 보다.

다행히 내 공격보다 말이 더 길더에게는 위협적이었던 모양이다. 비스컨 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말에 멈칫한 길더가 재빨리 문으로 다가가 걸쇠를 걸었다.

“널 죽이고 이 집을 불태울 거야. 너는 운 나쁘게 화재에 휘말려 사망한 거지.”

길더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왔다. 자기 집을 불태우려 할 줄은 몰랐는데. 하긴, 레이첼을 죽이려 그녀의 집에 불을 지른 사내다.

자기 집에도 불을 지를 수 있겠지.

나는 다시 조각상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길더도 재빨리 고개를 숙여 피했다.

“두 번이나, 윽!”

그걸 노렸단다. 길더가 피하자마자 나는 미리 챙겨 뒀던 찻잔을 그의 얼굴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찻잔은 박살이 나지 않았다.

그랬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찻잔을 집어 던지자마자 곧바로 집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보통 집은 뒷문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화재라도 난다면 대피할 수 있도록.

“젠장.”

뒷문은 빡빡해서 열리지 않았다. 나는 좀 더 힘을 줘 본 다음에야 포기했다. 포기는 빨라야 한다. 거기 걸린 게 내 목숨이라면 더더욱.

쾅!

뒤통수가 선뜻해서 몸을 피한 순간, 내 옆에 있던 벽에 부지깽이가 부딪쳐 왔다. 벽이 움푹 파인 것 같지만 그걸 볼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열린 문으로 뛰쳐 들어갔고 곧바로 길더가 따라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아마 식당인 것 같다. 우리는 긴 식탁을 사이에 두고 다시 술래잡기와 비슷한 행위를 펼쳤다. 나는 반대편 문 쪽으로 나갈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가 길더가 속아 넘어가자 그대로 몸을 돌려 들어온 문으로 나가 버렸다.

“이것이!”

바로 눈앞에서 나를 놓친 길더의 분노가 생생하게 터져 나왔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고작해야 이 집 안을 반 바퀴 정도 돌았을 뿐이다.

차라리 현관으로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마자 나는 현관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길더가 부지깽이를 휘둘렀다.

“죽어!”

피했다. 피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퍽!’ 소리와 함께 팔에 번개가 꽂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졌다.

“잡았다.”

길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이다. 오른팔은 멀쩡하다. 나는 오른팔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날아올 길더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굴렀다.

쾅!

뭔가가 세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누군가의 다리와 구두가 보였다. 그 구두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안도가 밀려오는, 익숙한 남성적인 향기였다. 놀랍게도 나는 그 향기의 주인이 누군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번즈 장군?”

길더가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문으로 달려간 다음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집 안에는 엘리엇이 쓰러진 길더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맙소사.

길더는 기절한 모양이다. 아니면 죽었거나. 단순히 기절한 거였길 빈다. 그가 꾼 꿈이라는 게 매우 궁금하니까.

“유제니.”

엘리엇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 상황에서 내게 인사를 건넨다는 게 비상식적인 것 같지만 그게 또 엘리엇다웠다.

나는 엘리엇이 손에 든 게 검이 아니라 검집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 안에 검이 들어 있긴 했지만 적어도 검집째로 들고 있으니 길더는 검에 찔린 게 아닐 거다.

“으.”

왼팔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인상을 쓰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내 체면을 지키기 위해 애써 무표정하게 말했다.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잠깐, 목을 부러트렸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죽인 거 아니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목을 부러트려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나는 길더의 목이 기묘하게 꺾이거나 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기묘하게 꺾였다 해도 내가 그걸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엘리엇은 내 시선을 따라 길더를 돌아보더니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말했다.

“안 죽었습니다.”

그거면 됐다. 레이첼을 죽이려 한 게 이 남자다. 그리고 나를 죽이려 했다.

내가 증인이다. 이제 레이첼의 무죄를 밝혀 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치안관이 조사한다면 길더가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그리고 내게 한 이야기가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겠지.

“뭐가 말입니까?”

엘리엇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도움 받은 자로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예의 바르게 말했다.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타나는 거 말이에요.”

엘리엇은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하나도 유쾌하지 않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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