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14 – 4
줄리아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녀는 “아”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친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겠네요.”
“나이가 많은 분들도.”
사람은 누구나 다칠 수 있고 반드시 늙는다. 건물 하나가 전부 자기 집인 사람이야 침실을 일 층으로 옮기면 되겠지만 이런 공용 주택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할 거다.
어쩌면 영지에 있는 저택에도 이 엘리베이터라는 걸 설치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도 침실을 일 층으로 옮기지 않으실 것 같거든.
이거, 설치하는 데 많이 비쌀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죠?”
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마르지 않았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빈약한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다. 나는 미리 꺼내 둔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유제니 비스컨이에요.”
남자는 내 이름을 듣고 멈칫했다. 그리고 명함을 받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요즘 호칭을 이상하게 착각하는 사람이 많네. 비스컨 영애라면 모를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라니. 나는 재빨리 정정해 주었다.
“아뇨. 레이디 비스컨이에요. 길더 씨와 만나기로 했는데요.”
“레이디 비스컨이라고?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아니라는 거죠?”
남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나는 그가 하인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내 아버지가 비스컨 백작이시니까 레이디 비스컨이죠.”
“어….”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내 아버지가 비스컨 자작이나 비스컨 남작이라면 나를 비스컨 영애라 불러야 한다.
여자들은 아버지의 작위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귀족이 아니라면 헷갈릴 수 있겠지. 나는 남자가 하인이라고 다시 한번 판단했다. 하인치고는 상당히 좋은 옷을 입었지만.
이 집 하인은 보수가 꽤 좋은 모양인데. 남자가 맨 크라바트에 금실 자수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저 정도 보수를 받는다면 일을 이것보다는 잘해야 할 것 같은데.
“길더 씨는 출타 중인가요?”
내 질문에 명함과 나를 번갈아 보던 남자가 갑자기 가슴을 내밀었다. 공작새야, 뭐야? 왜 가슴을 내미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제가 길더입니다. 들어오시죠.”
“당신이 길더 씨라고요? 로니 길더 씨?”
길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활짝 열었다. 이 사람이 그 천재라고? 유명한 음악은 물론 연극과 소설까지 쓴?
물론 천재가 이마에 천재라고 찍고 다니지 않는다는 건 안다. 하지만 길더는 천재로 보기엔 좀 평범해 보였다. 아니, 정정하자. 천재보다는 공작새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집으로 들어가며 그가 입은 옷차림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깨에 패드를 넣은 재킷과 금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크라바트. 바지는 최신 유행대로 허벅지까지 딱 맞는 스타일이었다.
“아, 하녀는 밖에서 기다려 주시죠.”
막 줄리아가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길더가 그녀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세상에. 나는 그의 무례함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줄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 사촌 동생이에요.”
나는 재빨리 길더와 줄리아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러자 길더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 레이디의 하녀인 줄 알았습니다.”
“하녀 복장이 아니잖아요.”
줄리아는 하녀 복장이 아닐 뿐 아니라 머리카락도 내리고 있다. 복장 자체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대체 무엇을 보고 그녀를 하녀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길더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다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제가 밖에 잘 안 나가다 보니 그만, 실례했습니다.”
말도 안 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밖에 안 나간 건 아닐 것 아닌가. 나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나가는 사람치고는 공작새처럼 차려입었네요.”
다시 길더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줄리아가 내게 속삭였다. 사람 눈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가슴을 내밀고 걷는 길더를 보고 공작새를 떠올린 걸 보니 말이다.
길더의 집은 생각보다 더 화려했다. 솔직히 말하면 대체 취향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림과 조각품이 시대와 상관없이 뒤섞여 있었고 그가 내놓은 찻잔은 짝이 맞지 않았다.
나는 금테가 들어간 화려한 찻잔을 내려다보며 길더가 금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비스컨 백작가라고요?”
길더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편지에 그렇게 썼다. 비스컨 백작가의 유제니라고.
“비스컨 가를 못 들어 본 모양이군요.”
비스컨 가는 유서 깊은 가문이다. 부유한 건 아니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부유한 것보다 유서 깊은 가문이 더 평가가 높다.
그게 엘리엇보다 어닝이 남편감으로 더 인기 있는 이유다. 번즈 백작가가 얼마나 부유한지는 몰라도 렌시드 자작가는 부유하고 유서 깊은 가문이니까.
어쩌면 길더는 비스컨 백작가에 대해 들어 보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귀족도 아닌데 귀족 가문에 대해 꿰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아니, 아닙니다. 들어 봤죠. 들어 보고 말고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허둥지둥 아니라고 말하는 길더의 귀를 피해 줄리아가 속삭였다.
“못 들어 본 거 같은데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나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나서 품에서 가져온 책을 꺼냈다.
“엄청 재미있게 읽었어요. 사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내가 왜 왔는지 걱정했던 모양이다. 사인 요청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긴, 모르는 귀족이 갑자기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긴장했을 만도 하다. 방금 전까지의 그의 행동이 긴장해서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된다.
나는 조금 미안해져서 그에게 참 재미있게 잘 읽었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그가 사인할 수 있도록 내 이름 철자를 불러 주었다.
“고귀, 아니, 레이디 비스컨께서 제 책을 재미있게 보셨단 말이죠?”
“네. 원래 이런 소설은 잘 안 보거든요. 괴물이 나오는 건 꿈자리가 뒤숭숭해서요.”
거짓말이다. 난 공포 소설을 꽤 잘 본다. 오히려 어머니가 끔찍하게 생각해서 공포 소설을 아무 데나 두지 말라고 혼내셨을 정도다.
하지만 길더에게 미안한 마음에 나는 약간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책은 뒤숭숭하지도 않고 재미있어요. 굉장히 흥미롭기도 하고요.”
“그래요?”
길더는 이제 꽤 행복해 보였다. 그는 내 책에 화려한 사인을 큼지막하게 하며 신이 나서 물었다.
“어느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습니까?”
어느 부분이냐고?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괴물에게 가족을 잃은 여자가 복수를 위해 괴물 사냥을 떠난다니,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예요.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신 거죠?”
“하하.”
길더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그는 내게 책을 돌려주고 줄리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가씨도 사인해 줄까요?”
“아뇨, 필요 없어요.”
조금 전 하녀로 착각한 것 때문인지 줄리아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길더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안 봤으면 내가 책 한 권 주죠.”
“필….”
줄리아가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굳이 그렇게 해서 분위기를 깨트릴 필요는 없다.
대신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좀 이상해.”
“뭐가요?”
길더가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줄리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괴물에게 가족을 잃은 여자가 복수를 위해 괴물 사냥을 떠났다고 했잖아?”
“어, 네.”
줄리아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닌지 생각하며 말했다.
“내가 본 소설은 괴물에게 가족이 아닌 친구를 잃어서 괴물 사냥을 떠난 거였거든.”
“제대로 못 들었나 보죠.”
“저 사람이?”
“친구나 가족이나.”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까 하녀 취급 받은 게 아직 앙금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리고 주인공 성별도. 저 사람이 쓴 건 남자 주인공이었단 말이야.”
그제야 줄리아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네요. 아까 유제니는 여자라고 했죠?”
자기가 쓴 주인공의 성별도 헷갈릴 수 있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저 사람이 쓴 책이 많아?”
너무 많아서 헷갈렸을까 봐 물어본 거였다. 하지만 대답하려던 줄리아의 표정이 확 굳었다.
다음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피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소름이 돋았다.
퍽!
그리고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뭔가가 부딪쳐 왔다. 뒤늦게 벌떡 일어난 줄리아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다쳤을 것이다.
“줄리아!”
나는 줄리아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길더가 끼어들었다. 그는 들고 있던 긴 조각상을 휘둘러 나와 줄리아 사이를 떨어트려 놓더니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뭘 어떻게 알았다는지 모르겠다. 나는 줄리아가 무사한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길더가 조각상을 휘둘렀다.
“어떻게 알았냐고! 이 마녀!”
맙소사. 미친 모양이다. 가까스로 그의 공격을 피한 나는 소파 뒤로 몸을 피했다. 줄리아 역시 길더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그대로 도망쳐야 한다. 나는 길더의 시선을 내 쪽으로 붙잡기 위해 물었다.
“뭐가 말이에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물론 이런다고 길더가 갑자기 조각상을 내려놓고 ‘앗, 실수했군요. 죄송합니다. 그만 가셔도 됩니다.’ 이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길더가 멈칫하기는 했다. 그는 조각상을 든 채 나를 멍하니 보다가 다시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이크.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길더가 들고 있던 조각상이 내가 있던 공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짓말 마! 네가 그년과 같이 있는 걸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