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14 – 2
끄악.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줄리아의 입에서 바로 엘리엇이 나올 줄 몰랐는데.
내가 머리를 부여잡자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아, 물론 올리버도 제외하는 거죠?”
얜 대체 어디서 사람을 놀리는 법을 배운 걸까. 내가 노려보자 줄리아가 변명하듯 말했다.
“유제니랑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남자는 그 셋뿐이잖아요.”
그렇긴 하다. 원래는 어닝과 올리버뿐이었는데 엘리엇이 끼어들었다.
“유제니가 제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올리버예요.”
줄리아의 대답에 나는 다시 그녀를 흘겨봤다. 올리버는 내 오라버니다. 가끔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가족이란 말이다.
줄리아는 내 표정을 보고 깔깔대며 웃더니 다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둘 다 아닌 것 같아요.”
“둘 다?”
“번즈 백작님이랑 어닝이요. 유제니는 둘 다 별 마음 없어 보여요.”
“그건….”
별로 안 좋은데. 어닝은 내 약혼자잖아. 별 마음 없어 보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서로 집안도 맞고 적당히 괜찮을 것 같아서 약혼한 거지 불타는 연애를 한 게 아니니까. 다들 그렇지 않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줄리아에게 다시 물었다.
“내가 어닝 외의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이지?”
줄리아는 망설였다. 왜 망설이는 거지? 어리둥절해하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번즈 백작님은 유제니가 아니었으면 넘어갔겠다 싶을 때가 있긴 해요.”
“내가 아니면?”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줄리아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모르는 거구나.”
“뭐를?”
그녀는 몸을 내밀더니 무릎에 팔을 대고 말했다.
“말 안 할래요.”
“뭔데?”
“모르는 편이 나을 거 같아요.”
뭘 모르는 편이 나아? 호기심이 폭발하려는데 줄리아가 물었다.
“약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싶을까요?”
엘리엇에게 그렇게 티가 났나? 나는 멍하니 줄리아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난 아냐.”
설령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나는 모르는 편이 낫다. 그게 마음이 편하니까.
하지만 줄리아의 말로 한 가지는 알겠다. 그녀가 보기엔 엘리엇이 내게 관심이 있어 보인다는 거구나.
나는 인상을 썼다. 하긴, 그걸 줄리아에게 물어볼 필요까지도 없다. 나도 가끔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엘리엇은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고 나 역시 모르는 척하는 게 현명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감정이란 금세 소모된다. 받아 줄 수 없는 감정이라면 모른 척 흘러가도록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런데 그건 왜 물어요?”
줄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냥, 요즘 번즈 백작과 가까워진 것 같아서 남들이 오해할까 봐.”
이제 줄리아는 실망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의 연애담만큼 재미있는 건 없겠지. 그녀는 다시 파이가 남은 접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에이, 어닝보다는 번즈 백작님 쪽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줄리아!”
왜 다들 그런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재빨리 줄리아에게 주의를 줬다. 그런 소리는 하는 게 아니다.
줄리아는 뭐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난 갈 데가 있는데.”
줄리아가 차와 파이를 다 먹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 접시는 좀 남았지만, 여전히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으으, 엘리엇.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올리버의 조정 경기에서 그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아파 왔다. 하지만 줄리아와 이야기한 덕에, 그리고 맛있는 파이를 먹은 덕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디 가요?”
“작가를 만나려고.”
“작가요?”
줄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줄리아도 그 책을 읽었으려나?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봤어요. 아카데미 도서관에 있다던데.”
아카데미에 큰 도서관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온갖 종류의 책을 망라해서 비치해 뒀다는 말에 올리버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
물론 올리버는 도서관에 무슨 책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 작가를 만나 보려고.”
“그 작가, 엄청 유명한데. 유제니를 만나 준대요?”
“유명해?”
인기 있는 소설을 썼으니 유명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만나기 어려울 정도인가? 놀라는 내게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재예요, 천재. 이 사람이 만든 거 중에 음악도 있고 연극도 있어요. 전에 본 연극이요. 그것도 이 사람이 만든 걸걸요?”
어, 진짜? 줄리아가 보고 싶어 했던 연극이 생각났다. 좀 잔인해서 에스컬레 경이 허락하지 않았지. 잠깐, 그것도 엘리엇과 함께 봤지.
젠장.
간신히 머릿속에서 몰아낸 엘리엇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머릿속을 차지했다. 나는 그를 쫓아내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가 왜 그러냐는 줄리아의 질문을 듣고 멈췄다.
“아냐. 방문하겠다고 편지 보내 놨거든.”
뒷말은 작가와 만나기로 했다는 말이다. 잠깐 작가가 아니라 천재라고 해야 하나? 소설뿐 아니라 음악과 연극까지 제작했다고?
“요정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긴 한가 봐요.”
같이 가고 싶다며 마차에 올라탄 줄리아가 말했다. 요정의 사랑? 나는 입술을 비틀며 물었다.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요정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이 독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안다. 어릴 때 읽은 책에 나온 거다.
내 질문에 줄리아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당연히 좋은 쪽이죠. 한 사람에게 대체 몇 가지 재능이 있는 거예요?”
지금 들은 것만 세 가지다. 그러게. 재능이 많다는 건 그게 어떤 재능이건 부러운 일이다.
“누구는 하나도 없는데 누구는 여러 개라니,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요.”
그런가. 나는 마차가 출발하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생각했다. 재능이라. 난 그런 건 생각도 안 해 봤다. 우리에게 재능이란 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는 어닝과 결혼해 렌시드 자작 부인이 될 거다. 적어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설령 어닝과 파혼한다 해도 누군가와 결혼해서 귀족 부인이 되겠지.
거기서 내 재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줄리아도 마찬가지 아닌가?
“재능이라는 게 필요해?”
“로렌을 보니까 필요하겠던데요.”
“응?”
로렌? 로렌이 왜?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줄리아가 설명했다.
“격자무늬 천을 엄청나게 샀잖아요. 그게 유행한다고.”
그랬지. 그 천을 사는 데 필요한 자금은 내가 지원해 줬다.
올리버가 로렌의 행적을 못마땅해하는 것도 약간은 이해가 된다. 오라버니는 내가 지원해 준 돈으로 로렌이 헛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런데?”
“정작 옷 만드는 재능은 없더라고요.”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줄리아가 다시 설명했다.
“로렌은 손재주가 별로 없거든요. 자수 시간에도 내가 대신 해 주고 그랬어요.”
“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손재주가 없으니 옷도 못 만든다는 말인가 보다. 지금이야 작은 의상실에 의뢰해서 옷을 만든다 해도 앞으로는 로렌이 만들어야 할 거다.
하지만 배워 보니 영 재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야 의상실을 할 수 있겠어요?”
한숨을 내쉬는 줄리아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리아의 말이 맞다.
재능과 상관없이 의상실을 하려면 적어도 옷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개개인의 체형과 피부색에 따라 어떤 디자인이 어울리는지 알아보는 눈이 필요하고.
지금 로렌에게는 가장 기본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걸 보니까 좀, 생각이 복잡해지더라고요.”
너무 로렌의 험담을 했다고 느꼈는지 줄리아가 재빨리 덧붙였다. 생각이 복잡해졌다니, 왜?
내가 쳐다보자 줄리아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어도 재능이 없을 수 있다는 거잖아요. 전 지금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는데.”
“하고 싶은 일?”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줄리아는 당연히 귀족과 결혼할 줄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바라 마지않는 일이기도 하고, 줄리아도 나와 함께 무도회에 다니는 걸 즐겼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나 보다. 줄리아는 내가 당황하는 걸 보더니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알아요. 아버지도 유제니도 내가 좋은 남자한테 시집가길 원한다는 거.”
“잠깐, 잠깐.”
갑자기 어지럽다. 나는 머리가 아파 와서 이마를 짚었다. 줄리아도 귀족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좋은 집안에 시집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나 보다. 줄리아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 좋은 집안에 시집가면 좋기야 하겠지만요.”
“무도회에 데려가 달라고 했잖아.”
“춤추는 건 재미있잖아요?”
난 아니다.
맙소사. 나는 지금까지 내가 엄청난 오해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 무도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구두는 아프고 옷은 무겁거든.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자들이 춤을 청하는 것도 불편했다. 그들과 몸이 닿는 것도 달갑지 않았고 거절할 때 그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