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57/239)

61화. 14 – 1

어닝과 엘리엇이 떠난 뒤, 나는 점심도 거르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지금 나를 더 화나게 하는 사람을 고르자면 어닝이 아니라 엘리엇이다.

이 미친 남자 같으니. 미쳤냐고, 진짜.

나는 머리를 감쌌다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멈췄다. 아무것도 안 먹고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집사가 문밖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하루만 괜찮냐는 질문을 몇 번 듣는지 모르겠다. 그중 대부분은 엘리엇이 물어본 거였지.

다시 머릿속에 엘리엇이 떠오르자 나는 그를 머릿속에서 쫓아내기 위해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내 이름을 레이디 비스컨이 아니라 레이디 괜찮습니까로 개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다들 날 레이디 괜찮습니까로 부르는 거지. 그럼 나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괜찮냐고 물어볼 수 있으니 편리하지 않을까.

“아가씨?”

시답잖은 생각을 하느라 대답이 늦자 빅스가 걱정이 된 모양이다. 그는 나를 부르며 문을 열었다가 나를 보고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배고프지만 입맛이 없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엘리엇 때문에 더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소파에 조심스럽게 주저앉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차라도 가져올까요?”

솔직히 말하면 뭐가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빅스가 걱정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 못 마시겠으면 창문 밖으로 버리지 뭐.

나는 여기가 이 층 서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정정했다. 창문 밖이 아니라 화분에 버려야겠군.

“아가씨.”

차를 가져온다던 빅스는 생각보다 더 빨리 돌아왔다. 미리 끓여 뒀나? 내가 들어오라고 하자 그는 문을 열고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안 받고 싶지만 이미 오늘 줄리아가 온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젠장. 나는 지친 표정으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고 집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돌아가시라고 할까요?”

“오, 아니에요.”

그럴 수야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천천히, 조심스럽게.

“유제니, 무슨 일 있어요?”

아무래도 진짜 내 이름을 레이디 괜찮습니까로 바꿔야 할 모양이다. 줄리아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냐. 파이는 어때? 괜찮아?”

나는 그렇게 물어보며 접시를 집어 들었다.

괜찮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아주 맛있겠지. 요리사가 잘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복숭아 파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다. 아침에 소란이 있었던 걸 들은 거겠지. 내 기분을 달래 주려고 급하게 복숭아를 사다가 파이를 만들어 준 모양이다.

나는 걱정해 주는 요리사와 집사를 생각해서 억지로 파이를 입에 넣었다.

“말해 뭐해요. 복숭아 파이를 이 집보다 잘하는 데가 어디 있다고. 복숭아 파이는 왕궁 요리사보다도 잘 만들걸요?”

줄리아의 밝은 이야기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물론 복숭아 파이도 한몫했고.

나는 피식 웃으며 파이를 한 입 더 먹었다. 맛있네. 평소 요리사가 만드는 것과 좀 달랐다. 그러고 보니 모양도 좀 다르네.

요리사는 항상 격자 모양으로 파이를 덮었는데 오늘 거는 꽃 모양을 냈다. 파이지도 평소보다 조금 두꺼웠다. 안의 필링은 좀 달았고.

요리사가 서두르느라 좀 다르게 했나? 구워서 식히려면 급하게 만들긴 했을 거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줄리아에게 말했다.

“몇 조각 가져가. 아버지는 잘 계시지? 리즈 양도.”

에스컬레 경은 요새 바쁘다고 들었다. 사교 시즌이라 왕궁에서도 행사 준비가 한창이기 때문일 것이다.

줄리아는 파이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로렌의 이름이 나오자 멈칫했다.

무슨 일 있나?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린 채 줄리아를 쳐다봤다. 파이를 먹던 그녀는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에 그, 그, 나쁜 놈이요.”

나쁜 놈? 내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줄리아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인상을 쓴 채 입술을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에 유제니를 공격한 나쁜 놈이요.”

아, 케스로. 누굴 말하는지 알겠다. 내가 알겠다는 시늉을 하자 줄리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유제니를 마녀라고 불렀다고 했잖아요.”

그랬다. 왜 하필 마녀라고 불렀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런 작자들이 사용하는 욕이 험하다는 건 안다. 그중에서 마녀는 가장 약한 수준일 거고.

“전에 로렌이 그랬거든요. 자기 꿈에 유제니도 나왔다고요.”

“나도?”

그건 좀 놀라운데. 로렌의 꿈은 로렌이 원치 않는 인생을 사는 거였다. 거기에 내가 등장할 이유가 뭐가 있어?

“거기서 유제니 별명이 마녀였다고 하더라고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내가 이야기해서 생각났다는 말이다.

이상한 일이네. 로렌이 꿈을 꾼 건 나와 만나기 전의 일이다. 모르는 사람이 꿈에 나올 수도 있나?

“로렌이 날 알았어?”

나는 사교계에서 그리 유명한 인사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한테 가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그게 다예요.”

내가 꿈에 나올 정도로 로렌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는 말이다. 나는 인상을 쓰고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왜 별명이 마녀였대?”

별로 좋은 별명은 아니다. 잠깐, 설마 내가 로렌의 꿈에서 진짜 마녀로 등장하기라도 하나?

마녀처럼 인적이 드문 숲에 살면서 약초를 달여 판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꿈은 현실에 있는 사람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잖아.

문득, 엘리엇이 떠올랐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는 내 꿈에서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죽이는 살인마로 등장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내가 엘리엇을 만나기 전에 꾼 꿈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 그게…. 걔 꿈에서 유제니가 되게 높은 사람이었다나 봐요. 그래서 뭐라고 하지? 사람들을 막 벌주고 그래서 별명이 마녀였다던데요.”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말도 안 되는 줄리아의 이야기에 입을 딱 벌렸다. 되게 높은 사람이라고? 레이디 비스컨보다 더 높아지려면 왕비가 되어야 한다.

현재 이 나라의 왕자는 네 살이다. 잠깐, 다섯 살인가?

어쨌든 나와 결혼하기엔 너무 어리다는 말이다. 심지어 나는 약혼을 했고. 아, 물론 파혼을 고민 중이지만.

“내가 로렌 꿈에서 왕비였다는 말이야?”

내 질문에 줄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아니었는데, 음, 뭐라고 하지. 걔 꿈에선 유제니가 왕이었대요.”

뭐라고?

이번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채 줄리아를 쳐다보던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된다. 국왕 전하와 왕자 저하는 건강하다. 설령 국왕 전하와 왕자 저하에게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이 나라에는 공작이 있다. 공작에게는 결혼한 자식이 있고.

물론 내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기는 하다. 아마도. 내 앞으로 한 백 명쯤 죽는다면, 아니, 잠깐. 백 명으로도 부족할걸?

나는 배를 잡고 웃다가 눈물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개꿈이네. 말도 안 되는 꿈이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도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운을 차린 나는 남은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점심을 걸렀더니 배고프다. 나를 따라 웃은 줄리아가 파이를 먹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올리버는 요즘 조정 연습하느라 바쁘죠?”

“음,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던데.”

아마 그럴 거다. 평소에는 점심때나 나가서 클럽에서 빈둥대다 들어오더니 요즘은 시합이 가까워서 그런지 아침 일찍 나간다.

집사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늦은 시간에 들어와서 지쳐 잠든다고 한다.

“유제니도 경기를 보러 갈 거예요?”

당연하지. 줄리아에게 그렇게 말하려던 나는 그녀가 왜 묻는지 깨닫고 씩 웃었다. 가고 싶은 모양이다.

“당연히 가야지. 넌 안 갈 거야?”

줄리아는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다. 그건 올리버도 마찬가지일 거고.

내 질문에 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가고 싶었던 거다. 그녀는 파이가 반쯤 남은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로렌을 데려가도 돼요?”

“그럼. 요리사한테 도시락 맛있는 거 싸 달라고 하자.”

“이 파이도요. 맛있네요.”

그래야겠다. 위에 크림을 얹지 말라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득 엘리엇이 생각났다.

맞다. 그도 참석하고 싶다고 했지. 심지어 배도 준비한다고 했다. 젠장.

“왜 그래요?”

내 얼굴이 일그러졌는지 줄리아가 물었다. 아오, 젠장.

진짜 그 남자 미친 거 아니냐고. 뜬금없이 무슨 사랑 고백이야. 심지어 약혼한 여자한테.

다시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누군가가 내게 고백을 해 왔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거다. 아니, 애초에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약혼자가 있는 여자에게 고백할 생각도 안 했겠지.

너무 놀라서 엘리엇에게는 거절하지도 못했다. 잠깐, 그거 거절할 수 있는 말이었나?

나를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자기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했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 그 남자 미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떠올랐다.

“유제니?”

걱정스러운 줄리아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 혹시 그렇게 보이고 있었나?

어닝이 아닌 다른 남자와 가깝게 있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줄리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줄리아, 혹시, 혹시 말이야. 내가 누굴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

“어닝이랑 번즈 백작님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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