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5/239)

59화. 13 – 5

“미안해요.”

남의 말을 넘겨듣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다. 나는 재빨리 사과한 뒤 변명했다.

“느낌만으로 뭔가를 결정하는 건 안 좋잖아요.”

“그렇습니까?”

엘리엇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세를 고치며 말을 이었다.

“경험치가 아니고요?”

“경험치요?”

“당신이 살면서 겪었던 것들이 전부 합쳐져서 당신의 느낌으로 발산된 게 아닐까요? 예를 들면 어두운 골목은 느낌이 나쁘잖습니까?”

그렇다. 처음 보는 골목인데도 느낌이 나쁠 때가 있다. 문득, 엘리엇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갈 때 골목으로 들어가던 어닝이 떠올랐다.

그때도 기분이 좀 이상했다. 골목도 느낌이 안 좋았지만 어닝의 뒷모습도 내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그러네요.”

나는 엘리엇의 말에 수긍했다. 내 경험치가 쌓여서 느낌으로 발산이 된 거라니. 그럴듯하다.

엘리엇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덧붙였다.

“보통 그걸 감이라고 하죠.”

그렇네. 보통은 그걸 감이라고 한다. 기사의 감이나 마법사의 감. 요리사의 감.

“그래서, 그자는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엘리엇은 곧바로 주제를 돌렸다. 내가 본 남자가 어땠냐는 질문에 나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진짜로 생긴 건 기억이 안 난다. 어느 정도였냐면 본 건 눈뿐인데 눈 색도 모르겠다. 내가 느낀 건 누군가가 내 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거였다.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갔고, 마차 안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사람의 눈을 발견했다.

“눈높이가 창문의 어디쯤이었습니까?”

이어진 엘리엇의 질문에 나는 “아”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네. 창문의 중간쯤에 있었다. 중간보다 약간 높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그럼 남자가 맞겠네요.”

여자였다면 그보다 높이가 낮았겠지. 엘리엇은 그것 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듣기로는 원고를 가지고 오셨다던데요.”

그랬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 원고, 어젯밤에 늦게까지 읽었다. 비교하느라 거의 새벽까지 읽었던 것 같은데. 이건 어머니께는 비밀이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가지고 있는 소설책을 옆에 두고 비교해 보니 약간 다른 부분도 있긴 했다. 자잘한 사건 같은 거.

묘사나 표현 같은 것도 좀 달랐다. 물론 큰 줄거리는 같았지만.

“저그만 양이 대신 태워 달라고 했거든요.”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비교해 보면서 느낀 건, 우연히 겹친 게 아닌 것 같다는 거였다.

“안 태우실 것 같은 표정인데요.”

엘리엇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표정에서 잘 드러나나? 나는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싸며 말했다.

“아뇨, 태울 거예요. 저그만 양이 부탁했으니까요.”

그녀가 원한 게 그거라면 태워 줘야 한다. 하지만 좀 아쉬웠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엘리엇이 다시 물었다.

“그럼 뭐가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나, 진짜로 표정에 다 드러나나? 나는 정확한 엘리엇의 말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리고 시선을 찻잔에 고정한 채 말했다.

“주인공이 여자인 게 더 마음에 들더라고요.”

안다. 유치한 행동인 거. 어린애도 아니고 주인공의 성별에 연연하다니. 소설이나 연극의 주인공이 남자라 해도 이야기에 집중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임에도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자 내게 다르게 느껴졌다. 괴물에게 가족을 잃고 괴물을 사냥하러 다니는 여자. 그녀의 곁에 있는 동료들과의 관계가 내게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군요.”

다행히 엘리엇은 내 어린애 같은 말을 비웃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러냐고 말했을 뿐이다.

이런 점 때문에 내가 그와 있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거.

“아, 그리고 잊기 전에 알려 주겠는데요.”

오전 중에는 남의 집에 방문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걸 알려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 집사가 문을 두드리더니 열린 문을 통해 말했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뭐라고요?”

오늘 무슨 일 있어? 오전에 손님이 둘이나 오다니?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사에게 다가가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닝 렌시드 경이십니다.”

어닝이? 이 시간에?

나는 저도 모르게 엘리엇을 돌아봤다. 별일이 아니라면 먼저 온 손님은 다른 손님이 왔을 경우 돌아가는 게 관례긴 하다. 하지만 그가 그런 관례를 안다면 오전에 방문하지도 않았겠지.

“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나는 엘리엇에게 양해를 구하고 어닝이 있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응접실에 들어서는데 앉아 있던 어닝이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유제니.”

어닝의 손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응?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나?

“간밤에 잘 잤어?”

어닝은 그렇게 말하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곧이어 어닝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널 주려고 산 거야.”

뭐, 그야 그렇겠지. 어닝이 올리버에게 꽃을 주진 않을 테니까 말이야. 나는 약간 떨떠름하게 받아 들었다. 설마 꽃을 주려고 오전에 방문한 건 아니겠지?

“무슨 일 있어?”

급한 일이 있어서 온 줄 알았는데 꽃다발을 내미니까 기분이 얼떨떨했다. 내 질문에 어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혼자를 보러 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예전이었다면 참 낭만적인 대답이라고 감탄했을 거다. 하지만 어닝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내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게 꽃을 선물한 것도 한 번인가 두 번 정도밖에 없었고.

와, 이 꽃다발 크기도 하네. 엘리엇이 선물해 준 꽃다발보다 큰 것 같다. 이것도 좀 이상하네.

나는 웃으며 물었다.

“뭐 잘못한 거 있어?”

“뭐?”

생각보다 어닝은 더 크게 당황했다. 응? 나는 사색이 된 그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자, 잘못이라니!”

어닝이 다음으로 선택한 건 화를 내는 거였다. 그는 벌컥 화를 내더니 내 손에서 꽃다발을 빼앗았다.

“아야!”

뭔가가 휙 하고 손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그는 빼앗은 꽃다발을 바닥으로 집어 던지며 말했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남이 기껏 생각해서 사 왔더니!”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닝의 갑작스러운 분노 앞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

“잘못한 거? 뭐 잘못한 거 있냐고? 내가 너한테 한 번이라도 잘못한 적 있어? 왜 말을 그따위로….”

다음 순간, 어닝의 말이 뚝 끊겼다. 아니, 누군가가 그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어닝의 몸이 마치 구겨진 종이처럼 벽에 부딪혔다. 엄마야!

얼마나 놀랐는지 어닝은 물론 나 역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내 뒤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엘리엇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게….”

고개를 든 어닝이 뭔가를 말하려다 멈췄다. 그게 공포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엘리엇을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엇은, 모르겠다. 그는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내 손님이 손님을 때렸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는 말은 들었다. 구혼자들이 응접실에서 다투다가 몸싸움까지 가는 경우. 하지만 그건 구혼자들이고, 엘리엇은 내 구혼자가 아니다. 어닝 역시 구혼자가 아니라 약혼자고.

“엘리엇, 어닝에게 사과하는 게 좋겠어요.”

나는 우선 두 사람의 싸움을 정리하기로 했다. 싸웠다기보다는 어닝이 일방적으로 엘리엇에게 맞은 거지만 말이지.

“싫습니다.”

엘리엇은 내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그가 여전히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또 어닝을 때리지는 않겠지?

“이, 이 자식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거야?”

턱을 맞았는지 자기 턱을 부여잡고 있던 어닝이 비척비척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 맙소사. 진짜로 울고 싶어졌다. 신이시여, 나한테 왜 이러세요?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엘리엇의 목소리는 낮았고 어두웠다. 잠결에 들었으면 악몽을 꾼다고 생각했을 거다. 아니, 잠깐. 이거 혹시 악몽인 거 아닐까?

나는 내 손등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제발 일어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고 불운하게도, 그리고 비관적이게도 이건 꿈이 아니었다.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내가 이 방에서 나가 버리면 이 둘이 알아서 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닝은 내 약혼자고 우리 집 응접실에서 내 약혼자가 내 지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기사가 나면 끝장이다.

머릿속에 어머니가 기절하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부여잡았다.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번즈 백작, 렌시드 경에게 사과해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엘리엇이 여기서 어닝에게 사과해야 한다. 이대로 두 사람이 헤어져 버리면 수습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렌시드 경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먼저 사과하면 하겠습니다.”

그제야 어닝은 엘리엇이 자신을 때린 이유가 내게 난폭하게 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의 눈이 커지더니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어휴.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이 이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어닝에게 사과를 받아 낼 능력이 있단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엘리엇의 요구대로 어닝은 내게 사과했다.

“미, 미안해, 유제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엇을 쳐다봤다. 이제 너도 사과하라는 태도를 알아차렸는지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예절 교육을 다시 받는 게 좋겠군, 렌시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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